노바 니발리스
제112화.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군
문 너머는 겨울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수연의 후드를 뒤로 잡아당겼다.
눈 덮인 언덕 아래로 거대한 왕국이 펼쳐져 있었다. 성벽은 검은 돌로 쌓여 있었고, 수십 개의 첨탑 끝에 붉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성 안쪽의 창문들은 불빛이 아니라 어두운 붉은색으로 빛났다.
멀리 왕궁이 보였다. 눈보라 속에서도 지나치게 선명했다. 마치 왕국 전체가 그 건물을 중심으로 한 문장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수연은 얼음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 안에 있는 거죠?"
"그래."
라면사장은 왕궁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성벽을 통과하고, 돌과 철과 봉인을 지나, 지하 깊은 곳에 닿아 있었다.
파빌라가 보였다.
왕궁이 이름을 지우고 통증을 감췄지만, 이제는 성냥이 길을 만들었다. 한 번 연결된 시야는 끊어지지 않았다.
수연이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이를 데리고 나갈게요. 뒤는 나중에 생각하고요."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종이 울렸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침입자다!"
화살이 날아왔다.
수연이 얼음검을 휘둘렀다. 푸른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화살을 얼려버렸다. 얼어붙은 화살들이 공중에서 부서져 눈처럼 쏟아졌다.
그녀가 바닥을 박찼다. 서리가 폭발했다.
수연의 마법은 물리였다. 얼음검으로 두들겨 패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몸이 낮게 미끄러지며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창을 검등으로 쳐올리고, 몸을 회전시켜 손잡이 끝으로 병사의 가슴을 밀어냈다. 뒤에서 휘둘러진 검을 숙여 피한 뒤, 얼음검을 바닥에 꽂아 솟아오른 얼음기둥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넘어뜨렸다.
검이 갑옷을 갈랐지만 치명적인 곳은 피했다. 얼음은 병사들의 발목과 무기를 묶었고, 마법의 충격은 그들을 의식을 잃을 만큼만 날려 보냈다.
명령으로 휘둘러지는 검이 어떤 것인지, 수연은 알고 있었다. 이 병사들의 검이 그랬다. 그래서 베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뛰어내린 병사의 방패를 밟고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성문 위의 궁수를 걷어찼다. 착지와 동시에 얼음검으로 쇠사슬을 끊어 성문의 빗장을 무너뜨렸다.
굉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가요."
수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라면사장은 성문 밖에 서 있었다.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가게에서 보던 얼굴과 달랐다.
"뭘 보고 계세요?"
수연이 물었다.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파빌라가 보였다. 작은 손가락이 성냥갑을 여는 모습. 손톱 아래로 피가 맺히도록 성냥을 쥐지 않으려 버티는 모습. 갑옷 입은 손이 그 손가락을 하나씩 펴는 모습.
성냥이 켜졌다.
왕은 불꽃 속에서 영원한 왕조를 보았다. 귀족은 가문의 번영을 보았다. 장군은 전쟁의 승리를 보았다. 성직자는 신이 자신에게 무릎 꿇는 모습을 보았다.
파빌라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불꽃이 꺼졌다. 아이의 숨이 멎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고 싶으세요?"
라면사장의 걸음이 멈췄다.
수연은 앞쪽의 병사에게 얼음 충격파를 날린 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눈송이 하나가 라면사장 앞에서 멈췄다. 바람이 사라졌다. 성벽 위의 깃발도 움직임을 멈췄다. 공기가 바뀌었다.
수연은 본능적으로 검을 세웠다.
라면사장이 공책을 펼쳤다.
"아이부터 데려가요."
수연이 말했다.
그의 오른손에서 만년필이 움직였다. 아직 종이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펜촉이 허공을 가르는 것만으로 금빛 글자가 나타났다.
써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감정 앞에서 소리 없이 금이 가고 있었다.
"사장님."
수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중에 처리하세요. 지금은 파빌라부터요."
그는 왕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왕궁이 남아 있을 때 만들어질 미래를 보고 있었다.
다른 끝난 이야기들이 끌려오는 모습. 죽은 영웅이 다시 전쟁터에 세워지는 모습. 멸망한 세계의 아이가 예언 장치로 분해되는 모습. 비극이 연료가 되고, 기억이 상품이 되고, 죽음마저 휴식이 되지 못하는 세계.
라면사장의 얼굴에서 마지막 인간적인 망설임이 사라졌다.
"이곳은 남겨두면 안 된다."
수연이 그의 앞을 막았다.
"파빌라를 구하는 게 먼저예요."
"이곳이 남으면 다음 아이가 생긴다."
"없애야 하는 건 장치랑 그걸 만든 사람들이에요."
"구분하는 동안 계속 사용한다."
"그래도 왕국 전체를—"
라면사장이 그녀를 보았다. 그 눈에는 분노가 없었다. 분노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었다.
결론.
"끝난 존재에게 다시 끝을 강요하는 곳이다."
그가 말했다.
"기록에서 지운다고 존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그러니 기록 밖에서 지우겠다."
"잠깐만요!"
수연이 손을 뻗었다.
너무 늦었다.
하늘이 찢어졌다.
검은 구름 위로 거대한 빛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별처럼 작았다. 곧 불타는 암석의 윤곽이 드러났다.
운석이 떨어졌다.
왕궁 앞 광장 한가운데에 충돌했다. 폭발적인 충격이 성벽을 흔들었다. 돌바닥이 파도처럼 들려 올라갔고, 병사들이 갑옷째 공중으로 튕겨 나갔다.
수연은 얼음벽을 세워 충격파를 막았다.
"사장님!"
그는 듣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디뎠다. 왕궁 앞 지면의 중력이 옆으로 꺾였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벽을 향해 떨어졌다.
두 번째 걸음. 바닥에 검은 문들이 열렸다. 병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잠시 뒤 왕궁 상공에서 다시 나타나 눈과 잔해 위로 쏟아졌다.
세 번째 걸음. 공책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금빛 문장이 지면을 따라 번졌다. 문장이 지나간 자리마다 돌이 갈라지고, 탑이 기울고, 군대의 대열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이것이 서기관이었다.
언제든 세계를 뒤엎을 수 있었으나, 뒤엎지 않기를 스스로 선택해온 존재. 그 선택이 지금 반대로 뒤집혀 있었다.
수연은 그를 향해 달렸다.
"그만하세요!"
라면사장은 걸었다. 그가 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늘이 대신 떨어지고, 땅이 대신 뒤틀리고, 문이 대신 삼켰다.
그의 분노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었다.
수연은 낮게 자세를 내렸다. 서리가 발밑에서 폭발했다. 그녀는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현실이 무너지는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운석이 수연의 바로 뒤에 떨어졌다. 충격파가 등을 밀었다.
수연은 쓰러지는 대신 한 손으로 부서진 기둥을 짚고 몸을 회전시켰다. 충격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병사 몇 명이 그녀의 옆을 지나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중력이 다시 꺾였다. 세계가 옆으로 쓰러졌다.
수연은 성벽을 바닥처럼 밟고 달렸다. 흰 후드와 은백색 머리카락이 옆으로 휘날렸다.
발밑의 벽이 갈라지기 직전, 그녀는 허공으로 뛰었다. 공중에 얼음 발판을 만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발판을 박차며 몸을 회전시켰다.
검은 문이 아래에서 열렸다. 병사 하나가 문 속으로 떨어졌다. 수연은 떨어지는 병사의 어깨를 밟아 궤도를 틀었다.
금빛 문장들이 창처럼 솟아올랐다.
수연은 얼음검을 크게 휘둘렀다. 푸른 검광과 금빛 문장이 충돌했다. 빛과 얼음 파편이 폭발하며 렌즈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그 안을 뚫고 나왔다.
라면사장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아니, 가까이 있었다. 분명 몇 걸음 앞인데 거리가 줄지 않았다. 그가 페이지를 넘겼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공간이 복도처럼 늘어났다.
수연은 얼음검을 바닥에 그었다. 좁은 얼음길이 왜곡된 공간을 관통해 만들어졌다.
그녀가 달렸다.
신이 만든 루프를 찢고 나온 사람이었다. 서기관이 늘인 복도 정도는, 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금빛 창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첫 번째 창을 몸을 숙여 피했다. 두 번째는 검으로 갈랐다. 세 번째 창 위에 발을 올려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네 번째와 다섯 번째를 동시에 베었다.
라면사장은 공책에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었다.
수연은 그의 손목을 노렸다. 높이 뛰어올라 온몸을 회전시켰다. 얼음검이 대각선으로 치솟았다.
그 순간 공간이 다시 어긋났다.
검끝이 손목을 지나쳤다. 검은 코트와 검은 셔츠가 갈라졌다. 얼음검이 라면사장의 상체를 깊게 베었다.
시간이 멈췄다.
수연은 피가 튈 줄 알았다.
그러나 피는 나오지 않았다.
찢어진 코트와 셔츠 사이로 어둠이 열렸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었다. 밤하늘보다 깊은 공간이었다.
검푸른 우주 안에서 수많은 별들이 천천히 회전했다. 보랏빛 성운이 살아 있는 숨결처럼 흐르고, 멀리 붉고 금빛인 은하핵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든 빛의 중심에는 작은 검은 점이 있었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완전한 어둠.
블랙홀.
별빛이 상처 밖으로 새어 나왔다. 피처럼 흐르지 않았다. 가벼운 먼지처럼 공중에 떠올라 수연의 얼굴과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수연의 검이 천천히 내려갔다.
"……뭐예요."
라면사장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초점이 돌아왔다. 마치 그 역시 처음 보는 것처럼.
"그렇군."
그가 아주 작게 말했다.
수연은 숨을 삼켰다.
"……사람이 아니었어요?"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펜촉이 공책 위로 향했다.
은하를 본 충격보다 더 빠르게 수연의 몸이 반응했다.
하늘 위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열리기 시작했다. 운석과 문, 금빛 문장, 부서진 탑, 수천 장의 페이지와 황동 열쇠가 한꺼번에 끌려 올라갔다.
왕국 전체를 삼킬 마지막 문장이었다.
수연은 얼음검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떠오르는 돌판을 밟았다. 공중으로 솟은 기둥을 차고, 날아오는 문을 숙여 피하고, 무너지는 잔해 사이를 뛰었다.
마지막 몇 걸음.
수연이 라면사장의 손목을 붙잡았다.
펜촉이 종이 위에 닿기 직전 멈췄다. 검은 잉크 방울 하나가 끝에 맺혀 떨렸다.
"놔."
라면사장이 말했다.
"싫어요."
"이곳이 남으면 반복된다."
"알아요."
"더 많은 존재가 끌려온다."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왜 막지."
수연은 다른 손으로 공책을 세게 덮었다. 닫힌 책을 그의 가슴에 눌렀다. 은하의 빛이 책 가장자리로 새어 나왔다.
"지금 아무도 구분 안 하고 계시잖아요."
"구분하는 동안—"
말은 거기서 끝나지 못했다.
수연이 그의 옷깃을 확 끌어당겼다.
계산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이 말로는 안 되겠다는, 순간적인 확신뿐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정확히는, 부딪혔다. 각도도 맞지 않았고, 두 사람 다 서 있는 자세 그대로였다. 입술박치기에 가까웠다. 어딘가 아플 정도로 서툴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라면사장의 몸이 완전히 굳었다.
손끝에서 만년필이 스르르 힘을 잃었다. 펼쳐져 있던 공책이 그의 품에서 미끄러져, 눈 위로 툭 떨어졌다.
하늘의 소용돌이가 그 순간 흔들렸다.
수연은 숨도 안 쉬고 그를 붙잡은 채 떨어졌다. 몇 초였는지, 그보다 짧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떨어졌다.
"……"
라면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얼굴 그대로, 시선이 완전히 수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세계를 뒤엎던 존재가, 그 순간만큼은 그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보세요."
수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 여기 있어요."
그의 눈이 그제야, 완전히 그녀에게 닿았다.
소용돌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본 게 뭔지는 알아요."
수연이 말했다.
"저도 화나요. 저 왕궁을 다 얼려버리고 싶을 만큼 화나요. 근데 파빌라는 아직 저 안에 있어요."
상처 속 은하가 느리게 회전했다.
"지금 지우려는 것 안에, 데리러 온 아이도 있어요."
라면사장의 눈이 흔들렸다.
수연은 알고 있었다. 구분하지 않는 힘이 어떤 것인지. 그녀를 몰아붙였던 세계도 구분하지 않았다 — 소중한 것과 소모품을, 하나로 뭉뚱그려 넣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 서 있었다.
구분하라고 말하기 위해서.
"먼저 아이를 데리고 나가세요."
운석 하나가 하늘에서 갈라졌다. 불타는 조각들이 재로 변했다.
"그다음에요."
수연이 말했다.
"그다음에도 왕국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저랑 다시 싸워요."
문들이 하나씩 닫혔다. 금빛 문장들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공중에 떠 있던 돌들이 무겁게 땅으로 떨어졌다.
라면사장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소용돌이가 무너졌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었다. 수연은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라면사장은 눈밭에 떨어진 공책을 내려다보았지만, 줍지 않았다.
상처 속 은하는 아직 열려 있었다.
수연은 처음으로 이해했다. 가게에서 국자를 들고 면을 삶던 남자는, 인간이 인간을 흉내 낸 존재조차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기록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록이 흘러나오는 장소. 혹은 수많은 세계와 이야기가 지나가는 틈.
그런데도,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조금 전 별빛이 새어 나왔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가슴에서,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존재는 입맞춤 하나에 노트를 떨어뜨렸다.
"걸을 수 있으세요?"
수연이 물었다. 목소리가 아직도 조금 떨렸다.
라면사장은 대답 대신 손목을 빼려 했다.
수연이 놓지 않았다.
"또 쓰실 거잖아요."
"쓰지 않는다."
"못 믿겠어요."
"검으로 베어놓고 말이 많군."
"사람이었으면 죽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군."
수연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 라면사장 역시 자기가 한 말을 곱씹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방금 있었던 일을 애써 못 본 척하려는 기색도 함께 있었다.
둘 다 더 말하지 않았다.
수연은 손목 대신 그의 코트 소매를 잡았다.
"가요."
이번에는 라면사장이 따라왔다.
몇 걸음 걷다가, 수연이 뒤돌아 눈밭에 떨어진 공책을 집어 들었다. 눈을 툭툭 털어내고는, 그것을 그의 품에 도로 안겨주었다.
"이건 다시 가져가세요. 대신—"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또 이럴 땐, 말로 먼저 해요."
라면사장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공책을 받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