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13화. 불을 켜도 죽지 않는 음식

왕궁 지하에는 창문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추위가 심해졌다. 벽에는 수백 개의 성냥갑이 진열되어 있었다. 모든 상자에는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눈송이와 불꽃.

파빌라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자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수연은 지나가는 족족 얼음검으로 상자를 부쉈다. 안에는 성냥이 없었다. 검게 탄 기억의 조각들만 들어 있었다.

복도 끝에 거대한 문이 있었다.

라면사장이 손을 뻗자 문에 새겨진 문장들이 스스로 지워졌다.

문이 열렸다.


파빌라는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붉은 두건은 군데군데 타고 찢어져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과 어깨에 엉겨 붙어 있었고, 가느다란 손목과 발목에는 검은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의 두 손 사이에는 작은 성냥불이 켜져 있었다.

불꽃을 둘러싼 공기 속에는 수많은 장면이 비쳤다. 왕의 번영. 군대의 승리. 귀족들의 축제. 끝없이 이어지는 왕조.

파빌라는 그 어느 것도 보지 않았다.

그녀는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기대도 없는 눈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고 싶으세요?"

수연의 손이 얼음검을 움켜쥐었다.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왕궁을 지우려 했던 분노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얼굴을 스쳤다.

파빌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익숙한 침묵이었다. 명령이 내려오기 전의 침묵.

그녀는 알아서 성냥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승리인가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을 보고 싶으신가요?"

수연이 검을 내렸다.

"아니."


파빌라가 수연을 보았다.

수연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무것도 안 봐도 돼."

파빌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성냥은 왜 켜나요?"

"끄면 돼."

"꺼지면 다시 시작해요."

"이번에는 안 그래."

"어떻게 알아요?"

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라면사장이 앞으로 걸어왔다.

파빌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멈췄다. 아이에게 더 가까이 가지 않았다. 대신 만년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공책도 닫은 채 옆에 놓았다.

두 손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를 뒤엎을 수 있는 손이었다. 그 손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아무것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네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파빌라의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끝났는데 왜 저는 여기 있나요?"

라면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수연은 그가 왕궁을 향해 보였던 분노보다 그 표정이 더 아프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끝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시작해야 하나요?"

"아니."

라면사장이 말했다.

"부서졌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부서진 다음을 누가 정하는지는, 이제 다르다."

파빌라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파빌라는 불꽃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는 어떻게 해요?"

그 질문에 수연은 숨을 멈췄다.

라면사장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라면가게의 빈 의자를 떠올렸다. 붉은 테두리의 작은 그릇. 매일 끓였다 식힌 물. 세레나가 꺼냈다가 다시 넣은 계란. 비아가 어묵을 훔쳐 먹는 모습. 수연과 이리스가 계란 하나를 두고 싸우던 소리.

"배우면 된다."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그래."

"어디서요?"

"라면가게에서."

파빌라가 고개를 들었다.

"라면이 뭐예요?"

수연이 웃을 뻔하다가 참았다.

라면사장은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불을 켜도 죽지 않는 음식이다."

파빌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수연이 얼음검을 사슬에 가져다 댔다.

검은 쇠사슬 위로 서리가 번졌다. 그녀가 손목을 비틀자 사슬이 소리 없이 부서졌다. 발목의 사슬도 끊었다.

마지막으로 파빌라의 손 안에 있는 성냥을 바라보았다.

"꺼도 돼."

수연이 말했다.

파빌라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작은 불 안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따뜻한 방을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시는 추위가 오지 않는 미래를. 어쩌면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고요한 곳을.

파빌라는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후.

불이 꺼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을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뒤 파빌라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수연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자."

파빌라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어디로요?"

"아까 말했잖아. 라면가게."

"저를 데려가면 뭘 해야 해요?"

"먹어."

"그다음에는요?"

수연이 라면사장을 돌아보았다.

그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파빌라는 이번에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손을 잡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왕국의 병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너진 성벽과 광장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검을 들지 않았다. 누구도 서기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라면사장은 왕궁을 돌아보지 않았다.

수연은 한 번 뒤를 보았다. 왕국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성벽도, 왕좌도, 파빌라를 가뒀던 사람들도.

이것이 옳은 결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라면사장이 멈추지 않았다면, 앞으로 생길 더 많은 고통을 없앴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그를 막은 탓에 다른 누군가가 고통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은 오래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수연은 파빌라의 손을 보았다. 아이는 스스로 걷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비아의 문은 성문 밖 눈밭에 열려 있었다.

문틀 주변의 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반대편에서 세레나가 두 손으로 문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녹사는 문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진홍빛 망토 안의 검은 선들이 끊어지고 있었다. 이제 감출 필요가 없어진 파빌라의 통증이 한꺼번에 풀려나며 눈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하늘에는 별자리가 떠 있었다. 아홉 개의 금백색 빛과 하나의 어둠. 이리스의 구체들이 눈보라 위에서 좌표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문 너머로 수연이 나타나자 이리스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왔어요!"

그녀는 열쇠를 두 손으로 꼭 쥔 채였다.

"진짜 오는 거 맞았죠? 문이 자꾸 찢어져서, 저는 또 제가 잘못한 줄 알고—"

"비켜."

수연이 말했다.

"아, 네."

이리스가 옆으로 물러났다.

비아는 가장 먼저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왔다!"

그녀는 수연도 라면사장도 지나쳐 파빌라 앞에 멈췄다.

둘은 비슷한 키였다.

비아는 파빌라의 붉은 두건과 손에 든 검은 성냥개비를 번갈아 보았다.

"너구나……너인 것이다."

파빌라는 수연의 뒤로 반걸음 숨었다.

비아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비아다."

파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라면 먹어봤나?"

파빌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빨리 와야 한다."

"비아."

세레나가 힘겹게 말했다.

"문부터 통과하게 해줘요."

"아."

비아는 파빌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파빌라가 놀랐지만 놓지는 않았다.

두 아이가 문턱을 넘었다.


그 순간 파빌라의 손에 남아 있던 검은 성냥개비 끝에서 작은 불꽃이 다시 켜졌다.

모두가 동시에 불을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눈 덮인 도시가 오랫동안 평화롭게 이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녹사는 더 이상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고요한 밤을 보았다.

이리스는 모두가 무사히 돌아와 식탁에 앉아 있는 장면을 보았다.

수연은 왕국의 사람들이 각자의 선택으로 다른 길을 걷는 미래를 보았다.

라면사장은 왕궁이 완전히 사라지고, 끝난 존재들이 다시는 끌려오지 않는 세계를 보았다.

같은 불꽃이었다.

그러나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비아는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또 다 다른 거 본다……보는 것이다."

그녀는 불꽃 앞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주 작은 문이 열렸다. 빛과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 놓인,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문.

비아가 문의 방향을 돌렸다.

"이번에는 이거 봐."

불꽃 속 장면이 바뀌었다.

좁은 라면가게가 보였다. 수연은 비빔면을 먹으며 콜라를 마시고 있었다. 이리스는 계란을 훔치다 들켰다. 녹사는 너무 매운 국물을 조용히 마셨고, 세레나는 각자의 그릇에 계란을 하나씩 넣었다. 라면사장은 국물이 튄 공책을 닦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비아는 의자 위에 올라가 파빌라와 어묵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파빌라는 처음으로 성냥이 아니라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불꽃이 꺼졌다.

비아가 말했다.

"가면 된다……되는 것이다."

파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아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비아는 데려가지 않았다. 문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각자의 선택이었다.


라면가게로 돌아왔을 때 냄비의 물은 반쯤 졸아 있었다. 이리스가 문을 지키느라 불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라면사장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냄비를 내렸다.

상체의 찢어진 코트와 셔츠 사이로 은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별빛이 가게 바닥에 조용히 쏟아졌다.

세레나는 그 상처를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마침내 드러났네요."

라면사장이 그녀를 보았다.

"알고 있었나."

"정확히는 몰랐어요."

"다들 모르는 게 많군."

"당신도 몰랐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이 옆에서 말했다.

"진짜 처음 본 표정이던데요."

"조용히 해."

"자기 몸에 은하가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왕국을 지우려 했네요."

"살아 있는 데 문제없다."

"그게 살아 있는 거예요?"

라면사장은 잠깐 생각했다.

"아마도."

"아마도래요."

수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긴장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 라면사장을 예전처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상체 안에 은하가 들어 있든, 심장이 없든, 세계를 지울 수 있든.

그는 여전히 돌아오자마자 냄비 상태부터 확인한 사람이었다.


녹사가 그의 앞에 섰다.

"미안하다."

라면사장은 냄비에 새 물을 받으며 말했다.

"무엇이."

"숨긴 것."

"끝나지 않았다."

녹사는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왕국."

그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내 판단도."

수연이 카운터에 얼음검을 기대놓았다.

"다시 가려면 저도 데려가요."

라면사장이 그녀를 보았다.

"또 벨 셈인가?"

"필요하면요."

"이번에는 손목을 정확히 노려."

"공간만 비틀지 마세요."

녹사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누구의 편인지는 여전히 명확했다. 가장 적게 아픈 결말.

왕국이 남겨질 때 더 많은 고통이 생긴다면, 녹사는 다시 서기관의 앞에 설 것이다. 이번에는 그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곁에 서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세레나도 그것을 알았다. 수연 역시 알았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서기관의 규율에는 이미 금이 갔고, 금이 간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부서졌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 말은 이제 그 자신에 대한 말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왕국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라면사장은 새 물을 냄비에 올렸다.

붉은 테두리의 작은 그릇을 꺼냈다.

그릇은 깨끗했다. 매일 닦아두었으니까.

파빌라는 비아 옆에 앉아 가게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김이 올라오는 냄비를 볼 때마다 어깨가 움찔했다.

라면사장은 성냥을 켜지 않았다. 가스불의 손잡이를 돌렸다. 파란 불이 조용히 켜졌다.

파빌라가 불을 보았다.

라면사장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이 불은 네가 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파빌라가 물었다.

"그러면 왜 켜요?"

"물을 끓이려고."

"물이 끓으면요?"

"면을 넣는다."

"면을 넣으면요?"

"먹는다."

"먹고 나면요?"

라면사장은 잠시 고민했다.

"그때 생각한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는 면을 넣었다.

이번에는 손님이 이미 와 있었다.


면이 익는 동안 비아가 파빌라에게 젓가락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제대로 잡는 법이 아니라, 자신이 편한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는 거다."

"자꾸 떨어져요."

"떨어지면 다시 집으면 된다."

"몇 번까지요?"

비아가 이상하다는 듯 파빌라를 보았다.

"잡힐 때까지다."

파빌라는 젓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지면 다시 집는다. 꺼지면 죽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달랐다. 실패해도 같은 고통을 처음부터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시도하는 동안에도 자신은 계속 자신이었다.

라면사장이 그릇을 내려놓았다. 하얀 김이 파빌라의 얼굴을 감쌌다. 붉은 두건과 검은 머리카락 위로 따뜻한 습기가 맺혔다.

"뜨거우니 조심해."

파빌라는 그릇을 바라보았다.

"돈이 없어요."

"알고 있다."

"그러면 뭘 드려야 해요?"

"아무것도."

파빌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아직 어려웠다.

라면사장은 잠깐 생각한 뒤 말을 바꾸었다.

"다 먹은 뒤 그릇을 돌려줘."

파빌라가 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손가락 사이로 번졌다.

"그것만 하면 돼요?"

"그래."

"다 먹지 못하면요?"

"남겨."

"맛이 없으면요?"

"말해."

"다시 만들어주나요?"

"고려하지."

수연이 옆에서 콜라 캔을 열었다.

"저건 사장님 말로는 만들어준다는 뜻이에요."

"아니다."

"저번에 제 거 세 번 다시 만들어주셨잖아요."

"네가 계속 불평했으니까."

"그러니까 해주신 거잖아요."


이리스가 파빌라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머리 위의 구체들이 천장 아래로 낮게 내려와, 아홉 개의 따뜻한 빛이 식탁을 비추었다.

"계란 먹어요?"

수연이 즉시 말했다.

"네가 줄 것처럼 말하지 마."

"이번엔 진짜 제 거 줄 거예요."

"아까 내 것 먹었잖아."

"그건 이전 이야기고요."

비아가 웃었다.

세레나는 붉은 그릇 안에 계란 하나를 넣었다. 오랫동안 꺼냈다가 다시 넣었던 계란이었다.

녹사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입가의 끊어진 실밥 사이로 아주 작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망토 안에서는 더 이상 파빌라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라면사장은 카운터 안쪽에 섰다. 검은 코트와 셔츠의 찢어진 틈은 세레나가 임시로 봉합해두었다. 천 아래에서 은하의 빛이 아주 희미하게 비쳤다.

수연은 그것을 가끔 바라보았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현실에 문장을 내리고 세계를 지울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 힘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

이번에 처음으로, 쓰려고 했다는 사실.

그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국의 문제도 끝나지 않았다. 서기관의 분노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녹사의 판단과 수연의 선택은 언젠가 다시 충돌할 것이었다. 세레나는 자신이 기다린 시간과 방관한 고통을 오래 짊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누구도 다음 결말을 정하지 않았다.


파빌라가 젓가락으로 면을 집었다.

한 번 떨어뜨렸다. 다시 집었다. 두 번째에도 떨어졌다.

비아가 옆에서 말했다.

"또 하면 된다."

세 번째에는 면 몇 가닥이 젓가락 사이에 걸렸다.

파빌라는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혀끝에 닿자 눈이 커졌다. 그녀는 서둘러 삼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이 켜져 있었지만 죽지 않았다. 온기를 느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떠도 같은 가게였다.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되감기지 않았다.

"어때?"

비아가 물었다.

파빌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따뜻해요."

라면사장은 등을 돌려 냄비를 정리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그러나 수연은 보았다. 그가 국자를 쥔 손에 아주 조금 힘이 풀리는 것을.


그날 파빌라 닉스는 두 번째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냈다.

첫 번째 끝은 추운 거리에서 찾아온 죽음이었다.

두 번째 끝은 누군가가 정한 비극도, 왕궁이 되감은 고통도 아니었다. 따뜻한 국물 앞에서 스스로 선택한 휴식이었다.

그리고 그 끝 다음에는 새로운 모험도, 거대한 사명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비아가 훔쳐 먹으려는 어묵과, 이리스가 노리는 계란과, 수연이 따는 콜라 캔과, 세레나가 조용히 채워주는 그릇과, 녹사의 진홍빛 망토와, 몸 안에 은하를 숨긴 채 면을 삶는 라면사장이 있었다.

파빌라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배울 시간이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녀에게 성냥을 켜라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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