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96화. 별빛 다리의 소원
겨울이 깊어지던 어느 밤, 도시에 처음으로 진짜 폭풍이 몰아쳤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이 옆으로 휘몰아쳤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집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이런 것도 처음이네요."
수연이 가게 창문을 단속하며 말했다.
"그래. 이 도시에 진짜 날씨라는 게, 이제야 생긴 거다."
라면사장은 폭풍이 부는 내내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혹시 몰라 여분의 담요와 국물을 준비해두었다. 폭풍 속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몸을 피할 곳을 찾아 가게로 뛰어들었다.
"밖에 진짜 못 다니겠어요!"
이든 홀트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들어오며 외쳤다.
"여기서 쉬어라. 폭풍 지나갈 때까지."
그날 밤, 가게는 임시 대피소가 되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뜨거운 국물을 나눠 먹으며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두려움 속에서도, 이상하게 따뜻한 시간이었다.
"이거, 꽤 낭만적이지 않아요?"
누군가 그렇게 농담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폭풍은 밤새 이어지다가, 새벽 무렵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밤새 벌어진 피해를 살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지만, 몇몇 지붕과 간판이 날아가 있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세레나가 순찰을 돌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면사장과 이든 홀트는 함께 날아간 간판들을 정리하며 대화를 나눴다.
"어제 폭풍, 진짜 무서웠어요. 근데 사장님 가게에 다들 모여있어서 그나마 나았어요."
"다음에도 저런 일 있으면, 가게로 와라. 문 열어둘 거다."
"고마워요, 사장님."
폭풍이 지나간 아침, 도시 외곽에 있는 별빛 다리 위에는 오랜 전통 하나가 있었다. 다리 난간에 작은 종이배를 매달고, 그 안에 각자의 소원을 적어두는 것이었다. 폭풍에 다리가 상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갔던 수연은, 그 종이배들이 여전히 온전히 매달려 있는 걸 보고 안도했다.
"이거 다 사람들 소원이에요?"
그녀가 다리를 정비하던 볼도에게 물었다.
"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무도 안 들여다보는 소원함이죠. 다들 자기 걸 적고, 남의 건 안 봅니다."
수연은 그 말에 문득 자신도 하나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그녀는 몰래 작은 종이배 하나를 만들어 다리에 걸었다. 그 안에는 아주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녀 자신조차,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라면사장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저 그녀가 요즘 부쩍 다리 쪽을 자주 산책한다는 것만 눈치챘을 뿐이었다.
"요즘 그 다리, 자주 가나."
"네. 그냥, 거기 풍경이 좋아서요."
"그런가."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도 가끔 그 다리를 지날 때면 난간에 매달린 종이배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물론 수연의 것이 어느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편, 세레나는 최근 부쩍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폭풍 대응과 도시 순찰, 거기에 겨울 준비까지 겹치면서 그녀의 업무량이 크게 늘어난 탓이었다.
"세레나 씨, 요즘 안색이 안 좋아요."
수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좀 바빠서요."
그러나 며칠 뒤, 그녀는 결국 순찰 중 잠깐 쓰러질 뻔했다. 다행히 볼도가 옆에서 부축해 큰일은 없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었다.
"저도, 쉬는 법을 좀 배워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녹사에게 그렇게 털어놓았다.
"맞다. 너는 항상 남 챙기는 데만 익숙하다. 너 자신 챙기는 것도 배워라."
그 무렵, 도시에는 또 하나의 미묘한 갈등이 자라고 있었다. 오르 니에베라는 이름의 한 주민이, 이웃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계속 지켜만 보는 일이 있었다.
"제가 나서야 하나, 그냥 지켜봐야 하나, 그 경계가 너무 어려워요."
그가 상담소에서 그렇게 털어놓았다.
"기다리는 것과 방관하는 것, 그 차이가 뭘까요."
녹사는 그 질문에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답했다.
"기다림은, 상대가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다고 믿는 거다. 방관은, 그냥 관심이 없는 거다. 네가 계속 신경 쓰고 있다면, 그건 방관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그 구분, 되게 어렵네요."
"어렵다. 근데 그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네가 방관자는 아니라는 증거다."
그해 겨울, 도시에는 또 하나의 신나는 행사가 열렸다. 로키 밤이라는 이름의 눈싸움 대회였다. 도시 전체가 두 팀으로 나뉘어 커다란 눈덩이 요새를 쌓고 서로에게 눈을 던지는 대규모 놀이였다.
"이번엔 저희 팀이 이길 거예요!"
돈키호테가 우렁차게 선언하며 요새를 쌓았다.
대회는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다. 세레나와 볼도가 이끄는 팀과, 돈키호테와 피피가 이끄는 팀이 몇 시간에 걸쳐 눈싸움을 벌였다. 라면사장과 수연도 각자 다른 팀에 참가해, 오랜만에 아이처럼 눈덩이를 던지며 웃었다.
"사장님, 저 팀인데 봐주기 없기예요!"
"봐줄 생각 없다."
대회가 끝난 뒤, 마르타 벨지는 손수레 국밥집을 열어 지친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국밥을 나눠주었다.
"눈싸움 끝나면 뜨거운 국물이 최고지!"
그녀가 호탕하게 웃으며 국밥을 퍼주었다. 사람들은 그 뜨거운 국물 한 그릇에, 얼었던 몸과 마음이 함께 녹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마감 후 수연은 문득 자신의 작은 습관 하나를 발견했다. 매일 가게 문을 닫기 전, 카운터를 정리하며 그날 팔린 그릇 수를 손가락으로 세어보는 습관이었다.
"저 이거 왜 하는 걸까요?"
그녀가 문득 라면사장에게 물었다.
"뭘."
"그릇 수 세는 거요.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매일 하게 돼요."
"그거, 오늘 하루가 얼마나 채워졌는지 확인하는 거다. 나쁘지 않은 습관이다."
"사장님도 그런 습관 있으세요?"
"있다."
"뭔데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답했다.
"네가 가게 문 들어올 때, 몇 시인지 확인하는 습관."
수연은 그 대답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왜 확인하시는데요?"
"네가 늦으면 걱정되니까."
그 담백한 대답에, 수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장님, 그럼 저 물어볼 게 하나 더 있어요."
"뭔데."
"별빛 다리 소원함, 사장님도 하나 걸어보신 적 있으세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없다. 나는 아직, 뭘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저는 벌써 하나 걸었거든요."
"뭘 빌었나."
"비밀이에요."
"……그런가."
그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별빛 다리를 지날 때마다 조금 더 오래 멈춰 서서 종이배들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수연의 소원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그녀 스스로 말해줄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며칠 뒤, 세레나는 녹사의 조언대로 처음으로 하루 온전히 쉬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볼도가 그날 순찰을 대신 맡았다.
"저 없이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도시는 하루쯤, 세레나 씨 없이도 잘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래야, 세레나 씨가 오래 이 도시를 지킬 수 있고요."
그 말에 세레나는 오랜만에 마음 편히 하루를 쉬었다.
쉬는 날, 그녀는 오랜만에 가게에 들러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손님으로 앉아 국물을 먹었다.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이상해요. 항상 순찰하면서 지나치기만 했는데."
"가끔은 이래야 한다."
라면사장이 국물을 더 채워주며 말했다. 세레나는 그 하루를, 오랜만에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썼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작은 습관을 하나씩 알아가며, 조용히 서로에게 더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창밖에는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고요하고 맑은 눈이 소복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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