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95화. 복숭아 사건
그날은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평범한 오후였다. 시장에서 복숭아 통조림 한 상자가 가게로 배달되었다. 겨울 대비 저장 식품 주문 중 하나였다.
"어, 이거 신선한 복숭아네요! 사장님, 이걸로 디저트 하나 해볼까요?"
수연이 신이 나서 상자를 열었다. 라면사장은 그 상자를 보는 순간,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거, 치워라."
"왜요? 상한 거예요?"
"아니다. 그냥…… 나는 그거, 못 먹는다."
수연은 그 말투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알레르기 있으세요?"
"……그런 셈이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눈에 띄게 낮았다. 수연은 더 캐묻지 않고, 조용히 상자를 창고 가장 안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문제는 그날 저녁에 터졌다. 재하가 우연히 그 상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저녁 손님상에 복숭아 디저트를 하나 내놓은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저 창고에 있던 재료를 활용했을 뿐이었다.
"사장님! 이거 손님상에 나갔는데……!"
수연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황급히 주방으로 달려갔다.
라면사장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곧장 손님상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 손님은 아직 디저트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이거, 다른 걸로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접시를 거두었다. 손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 문제 있나요?"
"제가…… 그 재료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주방으로 돌아온 그는, 그 접시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수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괜찮다. 근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연은 그 침묵 속에서, 이것이 단순한 알레르기 이상의 무언가라는 걸 직감했다.
그날 밤, 마감을 마친 뒤 수연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사장님, 복숭아가 그렇게 안 좋으신 이유,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근데 혹시 위험한 거면, 알려주세요. 다음에 또 실수하면 안 되니까."
라면사장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아주 짧게 답했다.
"위험한 거 맞다. 근데 지금은, 그 이유까지는 말 못 한다."
"괜찮아요. 이유는 나중에 말씀하고 싶으실 때 하세요. 대신 이건 지금 약속해주세요. 앞으로 복숭아 관련된 건, 가게에 아예 안 들이는 걸로."
"……그래주면 좋겠다."
"그리고 재하 씨한테도 제가 잘 설명해둘게요. 사장님 탓 아니에요. 저도 제대로 안 알려드린 제 잘못이고요."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라면사장은 그 손길에 조금씩 표정이 풀렸다.
다음 날, 수연은 재하에게 조용히 그 사실을 전했다.
"복숭아는 앞으로 가게에서 절대 쓰면 안 돼요. 사장님한테 정말 안 좋은 재료래요."
재하는 깜짝 놀라며 사과했다.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확인했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이제 알았으니까 됐어요. 대신 다들 기억해둬요. 이 도시 어디든, 복숭아 들어간 건 사장님 앞에 안 두기로."
그렇게 그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라면사장은 며칠간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세레나가 그 변화를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별거 아니다. 그냥, 오래된 걸 하나 마주쳤을 뿐이다."
"오래된 거요?"
"내가 원래 있던 곳에서, 잊고 싶었던 기억 중 하나다."
세레나는 그 대답에 더 캐묻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는, 모두가 저마다 캐묻지 않기로 한 과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그럼 그냥, 그 기억이 다시 잠잠해지길 기다릴게요. 근데 혹시 힘드시면, 저희한테 기대셔도 돼요."
"……고맙다."
한편, 그 무렵 이든 홀트는 자신이 최근 겪은 위기 하나를 곱씹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서 갑작스러운 눈사태 경보가 울렸을 때, 그는 반사적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자신도 위험에 처할 뻔했다.
"나, 그때 진짜 무적인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그가 녹사에게 그렇게 털어놓았다.
"당연하다. 너는 무적이 아니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것뿐이다."
"그거 알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무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지니까."
"맞다. 무적인 척하는 것보다, 한계를 인정하는 게 더 오래 버틴다."
이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도시 상담소에는 새로운 목록 하나가 생겼다. '금지 목록'이라는 이름의 종이였다. 복숭아를 필두로, 각 주민들이 서로에게 피해가는 게 좋은 것들을 하나씩 적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되게 좋은 아이디어네요."
수연이 그 목록을 보며 말했다.
"녹사 씨가 만든 거예요?"
"아니, 다들 자발적으로 적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종이만 걸어뒀을 뿐이다."
목록에는 복숭아 외에도, 누군가의 큰 소리를 무서워하는 사람, 특정 향을 못 견디는 사람 등 소소한 항목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이 도시,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이 참 조용하네요."
세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 무렵, 도시 유리 온실에서는 특별한 밤이 준비되고 있었다.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온실 식물들을 구경하는 야간 행사였다. 이리스가 그 조명 연출을 맡았다.
"이번엔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어요."
그녀가 시엔 바르에게 말했다.
"어떤 거?"
"그냥 예쁜 조명 말고, 식물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서 조명이 천천히 바뀌는 거요. 시간이 흐른다는 걸, 눈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그날 밤, 온실은 은은한 조명 아래 서서히 색을 바꿔가는 진귀한 풍경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그 느린 변화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감탄했다.
"이거, 진짜 새로운 종류의 무대네요."
수연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리스는 그 반응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초조함도 자라고 있었다.
"저, 요즘 데드라인이라는 걸 느껴요."
그녀가 세레나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다.
"데드라인이요?"
"제가 만들고 싶은 무대가 계속 커지는데, 시간은 한정돼 있잖아요. 예전엔 시간 신경 안 썼는데, 이제는 자꾸 조급해져요."
"그것도 이 도시가 진짜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예요. 조급함도, 살아있다는 증거고요."
한편, 그 무렵 수연은 문득 예전보다 무료함을 느끼는 날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가끔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날도 있었는데, 요즘은 하루하루가 늘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게, 요즘은 심심할 틈이 없어요."
그녀가 라면사장에게 말했다.
"좋은 거다."
"근데 가끔은 심심한 것도 그리워요. 예전엔 그 시간에 이것저것 생각할 수 있었거든요."
"그럼 가끔은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만들어봐라. 마감 시간처럼."
수연은 그 제안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재하는 우연히 가게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시 사람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라면사장의 얼굴 부분만 살짝 초점이 흐릿했다.
"사장님, 이 사진 좀 이상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또렷한데, 사장님만 흐릿해요."
라면사장은 그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답했다.
"카메라가 오래돼서 그렇다."
재하는 그 대답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넘어갔지만, 수연은 그 순간 라면사장의 표정에서 아주 미세한 긴장을 읽어냈다. 그녀는 그 일을 마음속에 조용히 담아두었을 뿐, 그에게 다시 캐묻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저것도 이유가 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진을 다시 원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그날 밤, 가게 문을 닫은 뒤 라면사장은 홀로 남아 그 사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흐릿한 자신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것도 또렷해질 날이 오려나.'
수연이 마감 정리를 마치고 그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여전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고, 그녀는 굳이 말을 걸지 않고 그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안 물어보나."
"물어보면 대답해주실 거예요?"
"……아직은, 아니다."
"그럼 안 물어볼게요. 대신, 대답해주고 싶어지시면 그때 말씀해주세요. 저 여기 계속 있을 거니까요."
라면사장은 그 말에 사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복숭아도, 이 사진도, 결국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요?"
"내가 완전히 이 도시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근데 요즘은, 그 사실이 예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요?"
"네가 옆에 있으니까."
수연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애써 담담한 척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저 어디 안 가요."
"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진 속 흐릿한 얼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도, 지금 이 순간의 온기 앞에서는 그리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고, 도시는 그렇게 저마다의 비밀과 저마다의 배려를 품은 채 다음 계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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