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94화. 비아는 자라지 않는다
소므니움이 떠난 뒤 처음 맞는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라면사장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가게 문을 열었다. 거리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고, 밤새 내린 눈만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게 4부의 첫 아침인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도 조금 낯설어했다. 자신이 이 도시의 이야기를 몇 부, 몇 화로 세고 있다는 자각이, 요즘 들어 유난히 선명해지고 있었다.
수연이 뒤이어 나오며 기지개를 켰다.
"사장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그냥. 뭔가 새로 시작되는 기분이 들어서."
"소므니움 일 끝나서 그런가 봐요. 저도 오늘 아침, 이상하게 개운했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아직 인적 없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눈 덮인 지붕들 위로, 아침 해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그 무렵, 도시 시계방의 주인 켈 도미르는 요즘 들어 손님이 부쩍 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원래 이 도시에서 시계란 그저 장식품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도시에서, 정확한 시각을 잴 필요가 없었으니까.
"요즘 왜 이렇게 시계를 많이들 찾으시나요?"
그가 한 손님에게 묻자, 손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그냥, 이제는 시간이 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요."
켈 도미르는 그 대답에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원래 시계 수리보다는 시계를 만드는 일 자체를 사랑하는 장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시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도시에서, 그의 솜씨는 오랫동안 그저 취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그의 시계를 실제로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가, 진짜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이겠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랜만에 새 시계를 만들기 위해 작업대에 앉았다.
가게에도 그 변화가 찾아왔다. 라면사장은 어느 날 저녁,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수연에게 말했다.
"우리도 마감 시간이라는 걸 정해야 할 것 같다."
"마감 시간이요? 지금까지는 손님 있으면 계속 열어뒀잖아요."
"그래. 근데 이제, 사람들한테도 각자의 시간이 생겼다. 손님들도, 우리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가게는 처음으로 정식 마감 시간을 정하게 되었다. 밤 열 시. 그 시각이 되면, 라면사장은 간판의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이거, 생각보다 되게 큰 발명이네요."
수연이 첫 마감을 치르며 그렇게 말했다.
"뭐가."
"마감이 있다는 거요. 그거,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정하는 거잖아요. 그게 없으면, 계속 일만 하게 되니까."
라면사장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사장님은, 마감 시간 정하는 거 아쉽지 않으세요? 손님 하나라도 더 받고 싶으실 것 같은데."
"아쉽다.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걸 배웠다."
"뭔데요?"
"쉬는 것도, 일의 일부라는 거. 계속 열어두기만 하면, 정작 중요한 순간에 힘이 없다."
수연은 그 말에 조용히 웃으며 마지막 그릇을 정리했다.
그 무렵, 도시에는 또 하나의 낯선 질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나이를 어떻게 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던 도시에서, 사람들은 원래 나이를 세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계절이 돌고 시계가 필요해지면서, 자연스레 그 질문이 따라왔다.
"저는 몇 살로 쳐야 할까요? 여기 온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원래 살던 곳에서의 나이까지 합치면……."
한 주민이 상담소에서 녹사에게 그렇게 물었다.
"정답은 없다. 근데 내 생각은 이렇다. 나이는, 네가 살아낸 시간의 총합이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든, 저기서 보낸 시간이든, 다 네 것이다. 굳이 하나만 골라 지울 필요 없다."
"그럼 그냥, 다 더하면 되나요?"
"더해도 되고, 안 더해도 된다. 결국 숫자는 네가 정하는 거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네가 그 시간들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다."
그 대화가 도시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이를 세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원래 나이에 이 도시에서 보낸 시간을 더했고, 어떤 이는 아예 이 도시에 온 날을 새로운 생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논의 한가운데서, 유독 침묵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비아였다.
"비아 씨는 나이 어떻게 세세요?"
수연이 문득 그렇게 물었다. 비아는 그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짧게 답했다.
"나는……안 센다……이다."
"왜요?"
"나는……안 자란다……이다. 문은, 나이를 안 먹는다……이다."
그 대답에, 수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사실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비아는 이 도시가 세워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였다.
"……외롭지 않으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조금씩 자라고, 변해가는데."
"외롭다……이다. 근데 익숙하다……이다. 원래 그런 존재니까……이다."
라면사장이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다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자라지 않는다고, 변하지 않는 건 아니다."
비아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이다."
"너는 예전보다 말이 늘었다. 예전에는 정말 필요한 말만 했다. 근데 요즘은,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힘들다는 말도 한다. 그게 변화다. 키가 안 자라도, 마음은 자랄 수 있다."
비아는 그 말에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아주 옅게, 정말 미세하게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이다."
"생각해봐라. 너는 분명히 자랐다. 다른 방식으로."
"그런 방식의 자람이라면……나쁘지 않다……이다."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오랜만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 수연은 작은 습관 하나를 새로 들이기 시작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을 짧게 달력에 적어두는 것이었다. 원래는 그냥 날짜만 표시하던 낡은 달력이었는데, 이제는 그 위에 하루하루의 기록이 빼곡히 쌓여갔다.
"이게 뭐예요?"
라면사장이 우연히 그 달력을 보고 물었다.
"제 나름의 나이 세는 법이에요. 숫자로 세는 대신에, 하루하루 뭘 했는지 적어두는 거예요. 나중에 이걸 넘겨보면, 제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걸 겪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라면사장은 그 달력을 넘겨보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거기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사장님이 먼저 손을 잡아주셨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이런 것도 다 적어두나."
"네! 중요한 날이었으니까요."
"……그럼 나도 하나 적어야겠군. 어디에 적어야 하나."
"제 달력에 같이 적으실래요? 한 페이지 나눠드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하나의 달력을 나눠 쓰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필체로, 같은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도시에는 또 다른 계절 감각이 찾아왔다. 바로 저장의 계절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집 안에 김장독을 묻고, 말린 나물을 엮어 매달고, 얼린 고기를 저장했다.
가게에서도 라면사장은 겨우내 쓸 재료들을 대량으로 저장하기 시작했다. 창고 한쪽에는 그가 손수 담근 장아찌 단지들이 줄지어 놓였다.
"이거 다 사장님이 직접 담그신 거예요?"
수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 원래 이런 걸 좋아한다. 시간을 들여서, 나중에 먹을 걸 미리 준비해두는 거."
"신기해요. 사장님도 뭔가를 '나중을 위해' 준비하시는구나 싶어서요."
"나도, 나중이 있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는 중이다."
그 말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이 도시에서 그저 관측자로 머물렀던 그가, 이제는 자신에게도 '나중'이라는 시간이 쌓여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연은 그 속뜻을 정확히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그 말투에서 어떤 따뜻함을 느끼고 조용히 웃었다.
"그럼 저도 뭔가 저장해볼래요. 사장님한테 배운 거니까."
그렇게 그녀는 작은 유리병에 자신만의 저장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툴렀지만, 라면사장은 그 결과물을 진지하게 맛보아주었다.
"어때요?"
"짜다. 근데 나쁘지 않다."
"솔직하시네요."
"거짓말하면, 다음에 또 이런 거 안 해줄 것 같아서."
두 사람은 그렇게 웃으며, 저장의 계절을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며칠 뒤, 켈 도미르는 마침내 새 시계 하나를 완성했다. 그는 그 시계를 들고 직접 가게를 찾아왔다.
"이거, 받아주십시오. 이 도시에서 제가 만든 첫 '진짜' 시계입니다."
라면사장은 그 시계를 받아 들고 가게 벽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었다.
"이걸로 마감 시간을 재겠다."
"영광입니다. 시계가 진짜로 쓰일 곳이 생겼다는 게."
세레나도 그 무렵, 도시 순찰 중에 비슷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반복되던 순찰 경로가, 이제는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 길, 저번 순찰 때랑 눈 쌓인 모양이 다르네요."
그녀가 동행하던 볼도에게 말했다.
"그게 정상 아닙니까? 시간이 흐르니까요."
"그러네요. 근데 예전엔 그런 거 신경도 안 썼거든요. 항상 똑같았으니까."
"이제는 매일이 조금씩 달라요. 그게 신기해요. 무섭기도 하고, 근데 그보다는 설레요."
볼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창고 물건들도, 예전엔 그냥 쌓여만 있었는데. 요즘은 뭔가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이 생겼어요.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 도시가."
이리스도 그날 저녁, 스케치북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계, 달력, 저장 항아리들. 모두 이 도시에 새로 생긴 '시간의 흔적'들이었다.
"이것들, 다 모아서 뭔가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녀가 세레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떤 걸?"
"이 도시가 시간을 배워가는 과정, 그 자체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요. 언젠가는요."
겨울밤, 가게 문을 닫은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달력을 펼쳤다. 오늘 하루의 기록을 적어 넣으며, 라면사장이 문득 말했다.
"이 도시가, 확실히 변하고 있다. 시계가 필요해지고, 나이를 세게 되고, 저장을 하게 되고. 다 시간이 흐른다는 증거들이다."
"무섭지 않으세요? 시간이 흐른다는 거."
"조금은. 근데 그보다, 기대가 더 크다. 이 도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하루들을 더 쌓아갈지."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달력의 빈 페이지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그 많은 날들이, 이제는 두렵기보다 기대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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