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9화. 벽값 청구서

수연이 벽값 청구서를 받은 것은 대청소 다음 날이었다.

종이 한 장이 그녀의 자리, 그러니까 첫날부터 그녀 것이 되어버린 그 카운터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였다. 봉투도 없이, 이름만 적혀 있었다.

"수연 님."

수연은 그 종이를 집어 들며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이게 뭐야."

"청구서다."

라면사장은 냄비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청구서? 무슨 청구서."

"펴봐."

수연은 종이를 폈다.

## 청구 내역

| 항목 | 수량 | 비고 |
|---|---|---|
| 벽 1면 (외벽 포함) | 1 | 전면 파손 |
| 놀란 냄비 | 1 | 뚜껑 튐 |
| 분위기 값 | 1식 | 손님 셋 이탈 |
| 비아의 트라우마성 눈물 | 미정 | 협의 필요 |

**합계: 산정 불가**

**결제 방법: 가게 일 열흘**

수연은 그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다시 읽어도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잠깐, 벽은 그때 내가 얼음으로 고쳤잖아. 사장님이 됐다고 했었고."

"그날은 응급처치였다."

"됐다며."

"그날은 됐다. 오늘은 안 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대청소하다가 봤다. 네가 얼렸던 자리, 반쯤 녹아서 금 갔다."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벽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진짜로?"

"거짓말할 이유가 없다."

"그럼 그때 그건 뭐였는데."

"버틴 거다. 오래는 못 버틴다고 안 했을 뿐이다."

수연은 항의할 말을 찾다가 결국 포기했다. 따지고 보면 얼음으로 벽을 때운 것 자체가 애초에 오래갈 방법은 아니었다.

"……분위기 값이 뭔데."

"네가 벽 부수는 거 보고 도망간 손님들 다시 안 왔다."

"손님이 셋이나 있었어? 그날?"

"없었다. 그런데 있었으면 도망갔을 거다."

"그건 청구가 아니라 상상이잖아!"

"상상도 값이 나간다. 여기서는."

수연은 종이를 흔들며 항의했지만, 라면사장은 국자를 든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반박을 무력화시켰다. 화를 낼 상대가 화낼 준비를 안 하고 있으면, 화도 갈 곳을 잃는다.

"……비아의 트라우마성 눈물은 또 뭐야."

카운터 위에서 비아가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거 진짜다……이다."

"뭐가 진짜야."

"그때 울었다. 진짜 울었다……이다. 증거 있다."

"무슨 증거."

"눈물이다……이다."

증거로서 눈물을 다시 흘릴 기세로 비아가 눈을 크게 뜨자, 수연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알았어, 알았어. 인정할게. 그거 협의는 나중에 하자."

"협의는 라면으로 한다……이다."

"그건 또 무슨 협의 방식이야."

"어묵 두 개면 없던 일로 해준다……이다."

수연은 순간 진지하게 어묵 두 개의 가치를 저울질하다가, 이게 지금 자기가 할 고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도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갚으라는 거야. 산정 불가라며."

"산정 불가니까 숫자로 안 갚는다."

"그럼?"

"가게 일 열흘."

라면사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열흘 동안 일해라. 그럼 퉁친다."

"……퉁친다고? 벽 하나 부순 게 겨우 열흘로?"

"싸게 해주는 거다."

"싸게 해주는 거치고 너무 구체적인데."

"미리 계산해뒀다."

수연은 그 말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혹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이 사기꾼."

"장사꾼이다."

"장사꾼도 사기 치잖아."

"안 친다. 청구서 다 진짜다."

"분위기 값이 진짜라고?"

"진짜로 청구했잖아."

수연은 그 순환 논리 앞에서 잠깐 말을 잃었다.


결국 수연은 서명했다.

정확히는 서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라면사장이 청구서 아래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고, 수연은 국물 묻은 손가락으로 종이 구석에 지문을 남겼다. 계약서치고는 세상에서 가장 허술한 형식이었지만, 이 가게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오늘부터야?"

"오늘부터."

"뭐부터 해."

라면사장이 앞치마 하나를 건넸다. 소예의 것과 색깔이 다른, 조금 더 짙은 남색 앞치마였다.

"설거지."

"내가?"

"네가."

수연은 앞치마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새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낡지도 않았다. 딱 적당히, 누군가 입다가 그만둔 흔적이 있는 앞치마였다.

"이거 원래 누구 거였어?"

"없었다. 새로 산 거다."

"근데 왜 이렇게 낡았어?"

"낡게 산 거다."

"그런 걸 왜 사?"

"새 옷 냄새 나면 손님이 어색해한다."

수연은 그 설명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앞치마를 둘렀다. 목뒤로 끈을 묶는 손이 어색했다. 처음 매보는 매듭이었다.

"묶는 법 몰라?"

"안다고 했잖아, 나 이거 처음 매."

"이리 와봐."

라면사장이 그녀 뒤로 돌아가 끈을 대신 묶어주었다. 손이 크고 무뚝뚝했지만, 매듭은 야무지게 지어졌다. 딱 알맞은 길이로.

"……잘 매네."

"많이 해봤다."

"누구한테?"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은 더 캐묻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 자란 습관이었다.


설거지는 예상보다 힘들었다.

수연은 세계관 최강의 무력을 가진 존재였다. 왕국 하나를 혼자 뒤엎을 수 있었고, 신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그릇 앞에서 쩔쩔맸다.

"……이거 왜 이렇게 안 닦여."

"기름기 있는 그릇은 찬물로 하면 안 된다."

"그럼?"

"따뜻한 물로."

"물리로 밀면 되잖아."

"물리로 밀면 그릇 깬다."

수연이 힘을 조절하지 못해 접시 하나를 미세하게 깨뜨렸다. 정확히는 깨뜨렸다기보다, 표면에 실금이 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그릇을 숨기려다가, 라면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것도 청구되는 거야?"

"청구서에 추가."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다."

"진짜야?"

"아니다."

라면사장이 그 접시를 받아 살펴보더니, 별말 없이 다른 통에 옮겨 담았다.

"금 간 건 국물 그릇으로 못 쓴다. 이제 반찬용이다."

"……버리는 게 아니라?"

"버릴 이유가 없다. 아직 쓸 수 있다."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이 가게가 물건을 대하는 방식이 손님을 대하는 방식과 똑같다는 걸 깨달았다. 흠이 나도 버리지 않는다. 자리를 옮길 뿐이다.

그녀는 다시 그릇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조심스럽게, 따뜻한 물로.


소예가 오후 근무를 마치고 카운터를 정리하러 온 것은 저녁 즈음이었다.

"어? 수연 씨, 왜 앞치마를 두 개나 입고 있어요?"

"이거 내 거야. 새로 생겼어."

"묻지 마."

"안 물어봤는데요."

"물어볼 것 같아서."

소예는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참았다.

"청구서 받으셨다면서요. 소문 다 났어요."

"벌써?"

수연이 말없이 종이를 건넸다. 소예는 항목을 읽으며 점점 표정이 미묘해졌다.

"……비아의 트라우마성 눈물이 뭐예요?"

"묻지 말라고 했지."

"협의 필요라고 적혀 있는데요."

"어묵 두 개로 퉁쳤어."

"그런 협의가 어디 있어요."

"여기 있어."

소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연이 노려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열흘이에요?"

"열흘."

"저도 낄까요? 재밌겠는데."

"네가 왜 껴."

"구경이요."

"구경은 청구 대상 아니야?"

라면사장이 무심하게 끼어들자 소예가 화들짝 물러났다.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벌써?"

"청구서 받기 전에요."

소예는 도망치듯 문을 향했다. 그러나 나가기 전, 카운터 위의 수연을 한 번 더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근데 어울려요, 그 앞치마."

수연은 대답 대신 행주를 집어 던지는 시늉을 했다. 소예는 웃으며 사라졌다.

볼도가 창고에서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오늘은 짧은 방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십 분 만에 나온 걸 보면, 오래 머물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눈이 붉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한 얼굴로 카운터에 앉으려던 그는, 앞치마를 두른 수연을 보고 멈칫했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묻지 마세요."

"청구서 봤습니다. 소문 다 났어요."

"벌써요?"

"이 도시는 좁습니다."

볼도는 자리에 앉으며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시인답게, 그는 웃음을 직접 터뜨리는 대신 문장으로 표현하는 쪽을 택했다.

"세계를 부수던 손이, 이제는 그릇을 씻는군요."

"그거 시예요?"

"방금 지었습니다."

"별로예요."

"평가는 야박하시네요."

라면사장이 볼도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순한 맛으로 끓인 라면이었다.

"오늘은 창고 짧게 갔다 오셨네요."

수연이 물었다.

"요즘은 짧아지고 있어요."

볼도가 대답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좋은 일이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면을 몇 젓가락 넘기다가, 문득 수연을 다시 보았다.

"열흘이라고 했죠."

"네."

"열흘 뒤엔 뭐가 달라질까요."

수연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사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벽값을 갚으면 그걸로 끝. 그 이상은 계획한 적이 없었다.

"……몰라요. 그냥 청구서 갚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창고에 다녔어요. 처음엔."

볼도가 그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어느 순간 보니, 갚는 게 아니라 배우고 있더라고요."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라면사장은 아무 말 없이 냄비를 저었지만, 그의 손이 아주 살짝 느려진 것을 수연은 놓치지 않았다.

볼도는 그릇을 다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흘 뒤에 뭐가 됐는지,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왜 볼도 씨한테 알려줘요."

"저도 궁금해서요. 사람이 여기서 뭐가 되는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남은 것은 빈 그릇과, 수연의 머릿속에 남은 질문 하나였다.


밤이 깊었다.

가게는 조용했다. 수연은 마지막 그릇을 헹구고 있었다. 손끝이 붉게 부어 있었다.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손이, 접시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손이었다.

"몇 개 남았어?"

"이게 마지막이야."

"수고했다."

수연은 마지막 그릇을 물기 닦아 선반에 얹었다. 정확한 자리에. 이 가게에서 물건들은 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걸 오늘 하루 배웠으니까.

"내일도 이 시간에 와?"

"올 거야."

"굳이 물어본 이유가 있어?"

"확인."

라면사장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수연은 앞치마를 벗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둘렀다.

"……벗지 마."

"어?"

"내일 또 입어야 되잖아. 여기 걸어두면 되지, 뭐하러 매번 가져가."

라면사장이 카운터 아래 못을 하나 가리켰다. 원래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던 자리였다.

수연은 그 못에 앞치마를 걸었다. 소예의 붉은 앞치마 옆에, 자신의 남색 앞치마가 나란히 걸렸다.

두 개의 앞치마가 나란히 걸린 모습을 그녀는 잠깐 바라보았다.

문득 볼도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열흘 뒤엔 뭐가 달라질까.

그녀는 아직 답을 몰랐다. 다만 오늘 하루, 그릇 하나를 깨뜨리고 새로 배운 것들 — 기름기는 따뜻한 물로, 흠난 그릇은 버리지 않고 자리를 옮긴다는 것, 매듭은 알맞은 길이로 —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기 안에 조용히 쌓이고 있다는 감각만은 있었다.

그것도 답이라면 답일 것이다.

"……이거, 처음부터 못까지 준비해뒀지."

"글쎄."

"글쎄가 아니라 준비했지."

라면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냄비 뚜껑을 덮었다. 수연은 그 침묵을 이제 조금은 읽을 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 문턱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가게 안, 벽에 걸린 두 개의 앞치마. 카운터 안쪽의 붉은 그릇. 냄비 앞에 선 라면사장.

"내일 봐."

"그래."

문이 닫혔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벽값 청구서 따위로 시작된 열흘이,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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