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43화. 세 개의 꿈

하얗게 지워졌던 시야가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다만 그 색은 방금까지 걷던 눈 덮인 산맥도, 잠든 마을의 광장도 아니었다. 안개는 각자에게 가장 그리운 자리를 하나씩 골라 내밀고 있었다— 마치 오래 손님을 받아온 상인이, 손님 저마다의 취향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가 딱 맞는 물건을 꺼내놓는 것처럼.

김이 서린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간판 불빛이 보였다. 수연은 그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낯익은 냄새부터 먼저 맡았다— 멸치와 다시마를 오래 우려낸 국물 냄새, 그 밑에 깔린 고춧가루와 마늘 냄새. 가게 안은 늘 그랬듯 따뜻했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안쪽 공기는 습하고 포근했다.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손님도, 소란도 없었다. 오직 카운터 안쪽에 서 있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왔나."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수연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전쟁도, 삭제도, 원정도— 이 좁은 가게 안에는 존재한 적조차 없다는 듯이. 그는 국자를 든 채 냄비를 젓고 있었고, 그 손짓 하나하나가 지겹도록 반복해온 사람의 익숙함으로 가득했다.

"…사장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서도 그녀의 입은, 그에게만은 다른 말을 쓰지 못했다. "여기, 어디예요."

"늘 있던 데다." 그가 국자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앉아라. 라면 끓여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연은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곳엔 지켜야 할 것도, 끊어야 할 실도, 두려워해야 할 힘도 없었다. 그냥 이 카운터 앞에 앉아, 김 오르는 그릇을 받아 들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스툴에 앉으며 카운터에 팔을 올렸다. 나무의 결이 손바닥에 닿는 감촉까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저번에 오셨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서도 그녀의 입은 그를 향해서만은 다른 말투를 허락하지 않았다.

"늘 똑같다." 그가 답하며 그릇에 대파를 얹었다. "장사도 잘된다. 걱정할 거 없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가 되물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안 해도 된다." 그가 짧게 답했다. "여기선 아무 일도 없다. 아무도 안 사라진다. 그냥 매일, 이렇게 라면 끓이고, 손님 받고, 저녁엔 문 닫고 잔다. 그거면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연은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가 짊어져온 모든 것— 신들의 전쟁, 삭제된 세계들, 끊어야 할 실들— 그 모든 무게가 이 한마디 앞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 앉아, 이 온기 안에 남으면 그만이었다.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 온도, 그 냄새, 나무 그릇 받침이 카운터에 닿는 달그락 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어긋난 데가 없었다. 젓가락을 쥔 손끝에 닿는 나무의 결마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완벽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건 재현이 아니라, 그 순간 자체를 통째로 옮겨온 것 같았다.

그는 그릇을 그녀 앞에 놓으며 웃었다.

바로 그 순간, 수연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웃음이었다. 분명 그의 얼굴이었고, 분명 그의 입매였다. 그런데 그 웃음이 퍼지는 각도가—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하게 어긋나 있었다. 눈꼬리가 먼저 휘어야 할 자리에서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아주 사소한 차이였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몇 밀리미터의 어긋남.

수연은 그 어긋남을 알아챈 자신에게 오히려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 어긋남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으며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그 웃음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좁은 주방에서, 그가 국물 간을 보다가 딱 맞게 됐다는 걸 확인하고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웃지 않았다. 그때는— 눈꼬리가 먼저 접히고, 그 다음에야 입꼬리가 마지못해 따라 올라갔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웃음이 끝나갈 때쯤이면 그의 귓불이 슬며시 붉어지곤 했다. 아주 사소하고, 아주 사적인, 그가 스스로도 모르고 지나쳤을 디테일. 아무도 지적한 적 없는, 오직 매일 그의 옆에서 그를 관찰해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흔적.

지금 이 웃음엔 그게 없었다. 완벽하게 그의 얼굴을 하고, 완벽하게 그의 목소리를 냈지만, 귀는 붉어지지 않았다. 마치 원본을 아주 정교하게 베낀 그림이, 딱 한 군데— 화가가 실수로 빠뜨린 붓 자국 하나— 때문에 가짜라는 걸 들키는 순간 같았다.

수연은 그 순간, 자신이 지금까지 이 세계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지겹도록 가까이서 지켜봐온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습관, 그의 말버릇, 그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던 사소한 몸짓들— 그 모든 관찰의 축적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 이 완벽한 가짜 앞에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사랑은 유혹의 문을 열지만, 그 문 안에서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건 결국 얼마나 오래, 얼마나 세심하게 봐왔는가— 그 축적된 시간의 무게였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 그녀는 오히려 더 아파왔다. 이 가짜가 이토록 완벽하다는 건, 소므니움이— 아니, 이 가짜를 만든 그 사람이— 그녀가 그를 얼마나 세심히 보아왔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정교함 자체가, 그가 그녀를 얼마나 정확히 읽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였다. 그 사실이 서글펐다. 유혹받는다는 것보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내 사장님은," 그녀가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웃을 때 귀부터 빨개져."

그 말을 뱉는 순간, 카운터 안의 형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리처럼 금이 가고, 김처럼 흩어지고, 국물 냄새가 순식간에 옅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얼굴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여전히 어긋난 각도로.


같은 시각, 형사는 눈 내리는 골목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낯익은 골목이었다. 다만 그 골목 끝, 어느 집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문을 열자, 예전에 알던 얼굴들이— 사건 현장에서 잃었던, 지키지 못했던 이들이— 모두 그 자리에 살아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세계였다.

식탁 위에는 김이 오르는 찌개와, 오래전 봤던 것과 똑같은 낡은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한 노인이 그에게 술잔을 건네며 웃었다. "자네, 오랜만이군. 여전히 그 일 하나." 형사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손이 떨렸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원래 세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름만 남은 사람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물었다. "요즘도 밤에 순찰 도세요?" 그 말투에 담긴 무심한 다정함이, 형사의 가슴을 서늘하게 찔렀다. 이 여자 역시, 그가 지키지 못했던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저 평범한 이웃일 뿐이었지만.

"…예, 뭐." 그가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흔들렸다. 그는 그 흔들림을 감추려 술잔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이 세계의 그는 순찰을 도는 사람이었다.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할 일이 없어서 도는 순찰이었다. 아무도 위협받지 않는 골목을 도는 데는, 결심도 각오도 필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이 메었다. 이 세계에서라면,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짊어져온 죄책감 자체가 애초에 필요 없었다. 그는 잔을 받아 들고, 오랫동안 연습해온 적 없는 웃음을 지어보려 했다.

그러다 그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문을 부수고, 사람을 끌어내고, 붕대를 감던 손. 그런데 이 손에는— 굳은살이 없었다. 매끈했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힘주어 붙잡아본 적 없는 손 같았다.

그는 그 손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 손은, 아무도 못 지켰겠군요." 그 한마디에 담긴 건 슬픔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세계는, 동시에 그가 아무도 구하려 애쓴 적 없는 세계이기도 했다. 굳은살 없는 손으로 그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짊어진 적 없는 사람은— 지금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식탁을 둘러싼 얼굴들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움과 별개로, 그는 이 얼굴들을 향해 자신이 아무 빚도 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빚이 없다는 건 홀가분한 일이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 홀가분함이 낯설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은, 결국 누군가에게 빚을 졌기 때문에 생겨난 길이었다. 그 빚을 갚으려는 걸음들이 쌓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빚 없는 세계의 그는— 편안해 보였지만, 그가 아는 자기 자신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노인이 왜 벌써 가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그는 그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향해 걸었다. 창밖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눈 내리는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완전히 문을 넘어서는 순간, 등 뒤에서 온기가 스르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레테는 애초에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안개가 그녀를 감쌌을 때, 그녀 앞에 펼쳐진 건 텅 빈 백지 같은 공간이었다. 소므니움의 안개는 "선택하지 않은 미래"를 보여주는 힘이었는데, 이야기가 이미 완결된 그녀에게는— 보여줄 다음 페이지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그 백지 위에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공백은, 그녀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녀가 평생 다뤄온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빈자리였으니까.

그녀는 그 백지 위에서 침착하게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다뤄온 유품들 사이에서, 낯익은 물건 하나를 찾아내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망각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습관이 있다— 사라진 것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의 경계를 손끝으로 구분하는 감각. 그녀는 그 감각을 따라,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두 사람의 온기를 백지 위에서 하나씩 짚어냈다.

그녀는 먼저 수연의 흔적이 흩어지고 있는 자리에 도착해, 유리처럼 금 가는 그 잔상을 향해 조용히 손을 뻗었다. "돌아오세요." 그녀가 말했다. 큰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지 위에서는 그 낮은 목소리조차 또렷하게 울렸다. 뒤이어 형사가 서 있던 골목의 잔상을 향해서도 같은 손짓을 건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여전히 같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다만 이번엔 그 안개가 더 이상 그들을 삼키려 들지 않았다. 방금까지의 온기 대신, 익숙한 냉기가 다시 뺨을 스쳤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반가웠다. 진짜라는 증거였으니까. 레테가 두 사람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

"…깼어?" 수연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물었다. 눈가가 아직 축축했다.

"네." 레테가 답했다. "두 분 다, 오래 걸리지 않으셨어요."

형사도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한번 펴 보며 숨을 골랐다. 거기엔 다시 익숙한 굳은살이 돌아와 있었다.

"…뭘 보셨습니까." 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연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우리 가게." 그녀가 짧게 답했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 웃음의 각도만,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형사는?"

"아무도 안 죽은 세계였습니다." 형사가 답했다. "다만 제 손에, 굳은살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수연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형사의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돌아와줘서 다행이야."

"레테 씨는요?" 형사가 물었다.

"저는 볼 게 없었어요." 레테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제 다음 페이지는, 이미 오래전에 다 쓰였거든요. 그래서 두 분을 찾아다닐 수 있었고요."

"…그게 외롭지 않아요?" 수연이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다 읽은 책을 덮어둔 사람에게, 다른 이들의 아직 안 읽은 페이지를 매번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어떤 기분일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가끔은요." 레테가 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행이었어요. 볼 꿈이 없어서, 대신 두 분을 데리러 갈 수 있었으니까요. 텅 빈 것도, 가끔은 쓸모가 있네요."

세 사람이 자리를 정리하고 고개를 든 순간, 안개 저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므니움이었다. 텅 빈 눈은 여전했지만, 그 눈 아래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하게, 지켜보고 있던 자의 흔적이 스치고 지나갔다.

수연은 그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방금 자신들이 겪은 세 개의 꿈을, 그 텅 빈 눈이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검자루에 손을 올리는 대신, 천천히 그 눈을 마주 봤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형사와 레테도 각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 거대한 그림자를 나란히 올려다봤다. 셋 다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게 검이 아니라는 걸, 셋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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