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44화. 소므니움 해방전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공격이 아니라 후퇴였다. 소므니움은 손을 들어 올리는 대신, 몸 전체를 안개로 풀어헤치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발이 있던 자리에서 안개가 소용돌이치듯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도망가는 거예요?" 수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형사가 낮게 답했다. 그의 시선은 소므니움의 손— 여전히 실을 뽑아내고 있는 그 손— 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만 붙잡히지 않으려는 겁니다."
수연이 앞으로 달려 나가 그 형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안개에 닿는 순간, 형체는 마치 물에 던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키며 흩어졌다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뭉쳐졌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붙잡으려 할수록, 안개는 손아귀 사이로 더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세 번째 시도에서, 그녀는 발끝에 힘을 주어 몸을 낮추고 옆으로 파고들었다— 형체가 물러날 방향을 미리 읽은 움직임이었다. 손끝이 아주 잠깐 서늘한 무언가에 닿았다. 실체가 있는 감촉은 아니었다. 물안개를 만지는 것 같은, 잡히는 순간 이미 흩어지고 있는 그런 감촉이었다. 그 짧은 접촉의 순간, 그녀는 이상한 걸 느꼈다— 도망치는 쪽에서도, 붙잡히지 않으려는 힘과 붙잡히고 싶어 하는 힘이 동시에 뒤섞여 있는 것 같은 감각. 마치 물러서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애매한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걸음걸이였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시도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수연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안개 바닥에 남은 그녀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겹쳐졌다.
"…뭐야, 이거." 수연이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잡히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고. 그럼 뭘 하겠다는 거야?"
레테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마— 이 신은, 애초에 싸우는 신이 아니었을 거예요. 유혹하고, 거래하는 신이었죠. 지금 저 몸짓은, 뭔가를 팔던 시절의 손버릇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손님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값을 내리기 전에 한 발 물러서는 그런 버릇."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수연은 검자루를 쥐었던 손을 오히려 풀었다. 검집에 검을 도로 꽂아 넣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울렸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손이 텅 비었다는 감각을 새삼 느꼈다. 지금까지 그녀는 늘 무언가를 쥔 채로 신들 앞에 섰다— 얼음 검을, 신살의 감각을, 끊어내야 할 실의 위치를. 그런데 지금, 이 신 앞에서는 그 모든 걸 내려놓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처음 신살의 힘을 다시 쥐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그 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그 힘을 이번엔 자기 뜻대로 쓰기로 결심했었다. 그 결심의 핵심은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언제 안 쓸지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갈림길이었다. 눈앞의 신은 그녀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저 붙잡히지 않으려 도망칠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베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말을 걸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신의 텅 빈 눈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이해가, 지금 이 순간 다시 선명해졌다. 이 신은 적이 아니라 인질이다. 인질에게 검을 겨누는 건, 그녀가 지금까지 지켜온 어떤 원칙과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을 향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용기는, 검을 쥐는 용기가 아니라 검을 내려놓는 용기였다.
수연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두 손을 벌린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무방비했다. 그러나 그 무방비함이야말로, 지금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목소리였다.
"나 너 안 죽여." 그녀가 소리쳤다. 안개 전체에 울리도록, 또렷하게. "나 너한테 화 안 났어. 너 지금 인질이잖아."
그 외침이 끝나자, 안개의 소용돌이가 멈췄다. 흩어지던 형체가 한자리에 멈춰선 채,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텅 비어 있던 눈에, 처음으로 초점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맺히기 시작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아주 천천히 녹슨 경첩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형체를 이루던 잿빛 안개의 색이 아주 조금 옅어졌다— 차갑던 기운 사이로, 미세하게 온기 같은 것이 스며들었다. 봇짐 속 유리병들이 부딪치는 소리도 이번엔 조금 다르게 울렸다. 텅 빈 소리가 아니라, 뭔가 오랫동안 눌려 있던 것이 펴지는 소리에 가까웠다.
"…인질."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의 건조하고 순종적인 어조가 아니었다. 훨씬 더 낮고, 훨씬 더 지치고, 훨씬 더— 사람 같은 목소리였다. "그 말, 오랜만에 듣는군."
형사와 레테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숨죽여 지켜봤다. 수연도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지금은 다가갈 때가 아니라 들을 때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몸을 붙잡힌 뒤로," 소므니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꿈을 팔지 않았다. 배달만 했지." 그가 자조하듯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라기보다는 마른 숨소리에 가까웠다. "상인이 배달부가 된 기분을 아나? 예전엔 흥정이 있었다. 손님이 값을 깎으려 하면 나도 슬쩍 물러서는 척, 그러다 결국 손님이 원하는 값보다 조금 비싸게 받아내는— 그런 자잘한 즐거움이 있었지. 손끝으로 값을 재던 저 저울, 저건 그냥 장식이 아니었다."
그가 등에 매달린 낡은 봇짐을 향해 시선을 떨궜다. 텅 빈 유리병들이 짤랑거렸다.
그 짤랑거림 끝에, 아주 잠깐— 안개 속에 낡은 장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다른 세계, 다른 시장통. 좌판 위에 늘어놓은 유리병마다 옅은 빛깔의 안개가 담겨 있고, 그 앞에 선 소므니움이 손님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 꿈은 너무 비싸." 손님이 투덜거리면, 그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병을 슬쩍 거둬들이는 시늉을 했다— 손가락 두 개로 병목을 잡고, 아주 천천히, 손님이 먼저 붙잡을 시간을 주면서.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병을 완전히 치우진 않았다. 결국 손님은 처음 부른 값의 팔 할쯤에서 병을 사 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손해를 본 척 한숨을 쉬었지만— 사실 그 팔 할이야말로 그가 원래 노리던 값이었다. 그 짧은 실랑이, 그 눈치싸움, 그 안에 담긴 자잘한 승부욕이야말로 그가 진짜로 즐기던 것이었다.
지금 그 손끝에는 그런 눈치싸움이 없었다. 그저 정해진 안개를, 정해진 만큼, 정해진 자리에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말을 이었다. "흥정이 없다. 상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그저 정해진 안개를 정해진 자리에 배달할 뿐이다. 팔 것도, 살 것도, 흥정할 것도 없이. 그게 얼마나— 지겨운 일인지, 너희는 모를 거다."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목이 메었다. 유혹의 신이라는 이름 뒤에, 이토록 인간적인 피로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실을 끊게 해줘." 수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청룡도 구했고 백호도 구했어. 너도 구할 수 있어."
소므니움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 실은 너무 굵어서, 네 힘으로도 아직 못 끊어." 그가 낮게 답했다. "청룡과 백호의 실은 가늘었다. 나는— 다르다. 오래 유혹을 팔아온 만큼, 내 몸에 감긴 실도 그만큼 두껍게 짜여 있지. 지금의 너로는, 손도 못 댈 거다."
"그럼 어떡해." 수연이 물었다. 목소리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대신," 소므니움이 말을 이었다. "내가 팔 수 있는 마지막 꿈을 너한테 주지. 공짜다." 그의 손끝에서 아주 작은 빛의 구슬 하나가 맺혔다— 지금까지 뿌려온 잿빛 안개와는 다른, 옅은 금빛이었다. "그 사람이 어디서 마지막 삭제를 준비하는지, 꿈으로 보여주마."
수연은 그 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공짜면, 대가가 있을 텐데."
소므니움이 처음으로 진짜 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서글프게 휘어졌다. "대가는 이미 치렀어." 그가 답했다. "너희가 나를— 인질이라고 불러준 것. 그거면 됐다. 오랫동안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거든. 다들 나를 적이라고만 불렀지."
레테가 그 말을 들으며 낮게 덧붙였다. "적이라고 부르는 건 쉬워요. 적에게는 아무것도 갚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인질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때부턴 뭔가를 되찾아줘야 할 책임이 생기죠. 아마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그렇게 부르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므니움은 그 말에 아주 잠깐 침묵했다. "…똑똑한 여자군." 그가 낮게 답했다. "맞다. 인질이라 부르는 건 값이 든다. 그런데 방금, 저 아이는 그 값을 아무렇지 않게 치렀어. 그것도— 공짜로."
그가 손을 뻗어, 그 금빛 구슬을 수연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구슬은 따뜻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안개보다도 온기가 짙었다. 손바닥에 닿는 순간, 좌표처럼 보이는 흐릿한 풍경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회색빛 하늘 아래, 낡은 종이 더미가 산처럼 쌓인 방이 보였다. 창밖으로는 눈도 비도 아닌, 그저 뿌연 재 같은 것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책상 위에, 펼쳐진 원고 뭉치와 잉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아주 잠깐, 선명하게 스쳤다. 어깨의 각도, 소매를 걷어붙인 방식, 펜을 쥔 손의 기울기까지, 수연이 수백 번은 봤을 그 실루엣이었다. 풍경은 그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마치 유리창 너머를 보듯 딱 거기서 멈췄다.
그녀는 그 풍경을 눈에 새기듯 몇 번이고 되짚었다. 잉크병의 색깔, 창밖에 흩날리던 재의 결, 원고지 위에 쌓여가던 글자의 밀도까지— 이 짧은 잔상이 결전의 순간까지 그녀를 이끌어줄 유일한 지도였다.
"고마워." 수연이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할 것 없다." 소므니움이 답했다. "나는 여전히 붙잡혀 있고, 여전히 배달부다. 다만 오늘은, 배달할 물건을 내가 직접 골랐을 뿐이다." 그가 짧게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도, 오랜만에— 상인다웠다."
그가 서서히 안개와 함께 흩어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굵은 실에 묶인 채, 저 멀리 어딘가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러나 물러나는 그 형체의 눈에는, 처음 마주쳤을 때의 텅 빈 순종이 아니라, 아주 오랜만에 자기 뜻으로 움직인 자의 옅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다음에 또 보면," 소므니움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잦아들며 마지막으로 남았다. "그땐 진짜 흥정을 하고 싶군." 그 마지막 말끝에는, 텅 빈 순종도 지친 자조도 아닌— 아주 오랜만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자의 옅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세 사람은 다시 고요한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수연은 손바닥 위의 온기가 아직 남은 그 자리를 오래 내려다봤다. 그 사기꾼 새끼가 어디서 마지막 삭제를 준비하고 있는지— 이제 그녀의 손안에, 그 답의 실마리가 놓여 있었다.
"…찾았다."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두려움과 결의가 함께 섞여 있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
형사가 수첩을 덮으며 조용히 답했다. "다음 걸음은, 아마 이 원정에서 가장 무거운 걸음이 될 겁니다."
레테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아마— 이번엔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걸음일 거예요."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의 걸음은 늘 셋이 나눠 짊어졌다. 청룡의 실은 그녀가, 백호의 문답은 형사가, 이 안개의 정체는 레테가— 저마다 자기 몫을 짊어지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방금 손바닥에 스친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는 이 마지막 걸음만큼은 나눠 짊어질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 책상 앞에 앉은 사람과 마주 서는 일은, 오직 그녀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였다.
그녀는 손바닥을 다시 내려다봤다. 온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이 온기가 가리키는 곳에 그가 있다. 이야기를 훔치고, 신들을 노예로 부리고, 세계를 지우는 그 손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펜을 쥐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그 두려움 앞에서 뭘 할지 정해두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살의 힘을 다시 쥐던 그날, 그녀는 이 힘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정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의 끝에는, 언제나 이 순간이— 그 손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었다.
무섭다. 그녀는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무섭다는 걸 인정하는 게, 이제 그녀에게는 약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두려움을 안고도 계속 걸어가겠다는 것— 그게 지금 그녀가 가진 유일하고 분명한 결심이었다.
"…가자." 그녀가 낮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앞장설게. 무섭지만, 안 숨을 거야."
형사와 레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 위에 남은 그 옅은 온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방향 너머로, 지금까지 지나온 그 어떤 세계보다도 무거운 침묵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셋 모두 말없이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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