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42화. 소므니움의 그림자
능선을 넘어 마을 전체가 눈 아래로 펼쳐졌을 때, 세 사람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지붕과 굴뚝, 골목과 시장통까지 낱낱이 보였지만, 어디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굴뚝에서 연기 한 줄기 피어오르지 않았고, 시장통 좌판 위의 천막들도 바람 한 점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숨은 쉬되 움직이지는 않는 거대한 정물이 되어 있었다. 그 정적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지나온 세계들은 저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소란이라도 있었는데, 이곳은 그 소란조차 없었다.
"…조용하네." 수연이 중얼거렸다. "근데 이 조용함이, 평화로운 거랑은 달라."
"네." 레테가 낮게 답했다. "평화는 소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거예요. 이건— 애초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만든 자리죠."
흙길이 끝나는 자리부터, 세상은 소리를 잃어갔다. 바람도 새소리도 없이, 그저 부드러운 안개만이 낮게 깔려 발목을 휘감았다. 세 사람이 처음 마주친 것은 길가의 작은 빵집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반죽을 주무르던 손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주인은 밀가루가 묻은 손을 반죽 속에 파묻은 채, 눈을 감고 웃고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다— 아주 느리고 고르게. 다만 그 손이 움직일 기미는 전혀 없었다.
"…살아 있는 거죠?" 수연이 조심스럽게 유리에 손을 대며 물었다.
"네." 레테가 답했다. "잠들어 있을 뿐이에요. 아주, 아주 깊이."
광장으로 들어서자 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벤치에 앉은 노부부는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고, 그 발치에서 놀던 아이 둘은 공을 주고받던 자세 그대로— 한 아이는 팔을 뻗은 채, 다른 아이는 두 손을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공은 그 중간 지점, 허공에 멈춰 있어야 할 자리에서 대신 안개 바닥에 살짝 파묻힌 채로 놓여 있었다. 분수대 가장자리에는 젊은 연인이 서로를 안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 남자의 어깨에 묻혀 있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형사가 그 모든 자세를 눈으로 훑으며 낮게 말했다. "전원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가 하나같이— 불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억지로 재운 게 아니라, 원하는 순간에 재워진 것 같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멈춰 세운 거예요." 레테가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옅은 씁쓸함이 묻어났다. "고통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고통이 올 기회 자체를 재워버린 세계네요."
수연은 광장을 걸으며, 잠든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다들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진짜 행복이라기엔, 너무 고르고 너무 한결같았다. 마치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웃음 같았다.
광장을 벗어나는 골목 어귀에서,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더 지나쳤다. 야간 경비를 서던 늙은 문지기였다. 그는 성문 옆 나무 의자에 기대앉은 채, 하품을 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린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허리춤에는 낡은 등불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의 불씨는 꺼진 지 오래였지만 유리 표면에는 아직 옅은 그을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매일 밤 이 자리를 지켜온 흔적이었다. 형사가 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이 사람은 아마,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깨어 있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형사가 말했다. "그런 사람마저 이렇게 잠들었다는 게— 이 안개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레테가 문지기의 등불에 손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열기는 없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 기운, 낯이 익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다루는 망각과 결이 비슷해요. 다만 저는 있었던 걸 지우는 쪽이고, 이건— 앞으로 올 일들을 아예 안 오게 재워버리는 쪽이네요. 사촌뻘 되는 힘이라고 할까요."
"그럼 레테 씨라면, 이 안개를 다룰 수 있습니까?" 형사가 물었다.
"다루는 것과 맞서는 건 달라요." 레테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게 무슨 원리인지는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걸 뿌리는 손이 제 것이 아닌 이상, 이 안개는 저한테도 낯선 남의 것일 뿐이에요."
형사가 수첩을 꺼내 그때까지 본 것들을 짧게 정리했다. "정리하겠습니다. 이 마을은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습니다. 저항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원이, 각자 가장 편안했을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습니다. 이건 습격이 아니라— 배급입니다. 누군가 이 마을 전체에, 원하는 걸 골고루 나눠준 겁니다."
"배급이라는 표현, 정확한 것 같아요." 레테가 답했다. "다만 그 배급을 나누는 손이, 자기 뜻으로 나누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죠."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앞으로 어떻게 다가갈지를 짧게 의논했다. 수연이 앞장서고, 레테가 그 뒤에서 기운을 살피고, 형사가 후방을 맡기로 했다— 지금까지 늘 해왔던 대형이었다. 다만 이번엔 그 익숙한 대형조차, 안개 속에서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안개는 광장을 지나 마을 중심으로 갈수록 짙어졌다. 발밑의 흙이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고, 그저 부드럽고 하얀 것이 발을 받치고 있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무언가였다. 그 안에서 은은한 냄새가 풍겨왔다. 달콤하고 나른한 냄새, 마치 오래 우려낸 차 향기 같기도 하고, 잘 마른 이불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수연은 고개를 세게 흔들어 그 무게를 떨쳐냈다. 발바닥으로는 아주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심장 박동보다 느리고 훨씬 더 규칙적인,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아주 오랫동안 같은 리듬으로 숨 쉬고 있는 진동이었다.
안개 한가운데, 한 형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의 모습이었다. 낡은 행상인의 옷차림에, 등에는 작은 봇짐을 메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봇짐 틈으로 녹슨 저울 한쪽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예전엔 무언가의 값을 정확히 재던 도구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짐짝처럼 매달려 흔들릴 뿐이었다. 봇짐 옆구리로 작은 유리병 몇 개가 함께 매달려 짤랑거렸다. 하나같이 마개가 뜯긴 채 텅 비어 있었고, 병 목에는 빛바랜 가격표가 실로 묶여 있었다— 누군가 한때 정성 들여 값을 매겨 팔았을 물건의 흔적이었다. 지금은 그 병들도, 봇짐도, 그저 늘어진 채 흔들릴 뿐 아무 흥정도 오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두 손에서 옅은 빛의 실이 끊임없이 풀려나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 실이 닿는 곳마다 안개가 짙어지고, 그 안개가 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잠들었다. 손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반복적이었다. 마치 오래 숙달된 노동을 하는 사람의 손 같았다— 다만 그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눈은 뜨여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초점이 아니라 텅 빈 순종이었다.
"소므니움." 레테가 그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경계와 연민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 이름이 불리자, 형체의 고개가 아주 느리게 이쪽을 향했다.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실을 뽑아내며, 여전히 안개를 짙게 만들며.
수연은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신들은— 청룡도, 백호도— 저항하거나 슬퍼하거나, 최소한 자기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눈은 아예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불 꺼진 방 같았다. 누군가 그 방의 스위치를 통째로 뽑아간 것 같은.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스치는 건 분노가 아니라 서늘한 이해였다. 청룡과 백호는 목에 실이 감겨 저항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신은— 저항할 자아 자체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완전한 형태의 지배라는 걸. 목줄을 채우는 게 아니라, 목줄을 채울 필요조차 없도록 안쪽을 비워버리는 방식.
그리고 그 비워냄의 끝에 누가 있는지, 그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라면가게에서 국물을 끓이던 그 손,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던 그 손이, 신 하나를 이렇게까지 속을 비워 부려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무섭게 했다. 무서운 동시에, 그 나쁜 놈에 대한 미움이 다시 한번 뜨겁게 치밀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태연하게 도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러나 그 미움 밑에는 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연민이었다. 이 신도 한때는— 유혹에 실패하고 저물어 떠났던 그 신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거래하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존재를 이렇게까지 속을 파내어 도구로 쓴다는 건, 승리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수연은 검자루 위에 얹은 손끝을 가만히 오므리며 생각했다. 이 신을 되찾는 일이, 단순히 실 하나를 끊는 문제가 아닐 것 같다고. 어쩌면 이 신에게는, 끊어야 할 게 아니라— 되돌려줘야 할 게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처음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모든 신이 그저 넘어야 할 산이라고만 생각했다. 청룡도, 백호도, 결국 실을 끊으면 끝나는 장애물. 그런데 이 눈이 텅 빈 신 앞에 서니, 그녀는 처음으로 이 전쟁의 진짜 얼굴을 보는 기분이었다. 적은 신들이 아니었다. 신들조차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그녀 안의 결심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이번에도, 벨 것이 아니라 되찾을 것을 찾으러 왔다는 결심이었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마라." 소므니움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러나 그 어조는— 수연이 익히 아는 그 어조였다. 라면가게에서, 등불 여관 골목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침착하고 나른한 그 말투. Writer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낸, 아니 정확히는 그 목소리로 덧씌워진 경고였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이 안개는 자비롭다. 원하는 걸 보여줄 뿐이니까."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거, 네 말이 아니잖아."
레테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어조, 라면가게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거네요. 경고할 때마다 늘 같은 온도였죠— 화도 안 내고, 다급하지도 않고."
소므니움의 손이 아주 잠깐, 실을 뽑아내다 말고 멈췄다. 그 짧은 정지가 마치 고장 난 기계의 한순간 같았다. 입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같은 어조로 다른 문장을 이으려던 참이었다. "이 세계에서 너희가 얻을 건—"
그 문장의 중간에서, 아주 잠깐 목소리의 결이 바뀌었다. 낮고 건조한 어조 사이로, 아주 짧게 다른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 갈라지고, 다급하고, 분명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도망쳐."
그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소므니움의 얼굴은 다시 텅 빈 순종으로 돌아갔다. 마치 방금 그 균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스스로도 모르는 것처럼, 그는 다시 처음의 어조로 문장을 완성했다.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잃을 것도 없을 것이다."
레테가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거— 들으셨죠."
"들었어." 수연이 답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저 안에 진짜, 아직 남아 있는 거야."
형사가 수첩을 꺼내려다, 손이 이미 짙어진 안개에 잠겨가는 걸 보고 멈췄다.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개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속도로 밀려오는 것 같았다.
수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신살의 감각을 불렀다— 백호의 실을 끊어냈던 그 감각, "끊어져 있다"는 결과를 조용히 불러오는 그 손짓을. 그러나 이번엔 손끝에 아무 저릿함도 잡히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서 실을 더듬는 것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각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갔다. "…안 잡혀." 그녀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저항이었다— 청룡과 백호의 실은 가늘고 팽팽했다면, 이 실은 아예 굵기 자체가 다른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손을 대는 게 아니라, 손 자체가 그 굵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감각.
그녀는 대신 손을 뻗어 형사와 레테를 붙잡으려 했지만, 안개는 이미 세 사람의 발밑에서부터 부드럽게 차올라 무릎, 가슴, 어깨를 지나 순식간에 시야 전체를 삼켰다. 안개가 스치는 자리마다 피부에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마치 막 덮은 이불 속 같은 온도였다. 그 다정한 온도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 달콤하고 나른한 그 냄새가 코끝을 가득 채웠고, 눈꺼풀이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다.
수연은 손끝으로 형사의 소매 자락을 겨우 붙잡았다. 그러나 안개는 마치 세 사람 각자에게 배정된 자리가 따로 있다는 듯,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그 접촉을 지워버렸다. 형사의 소매가 손끝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각을, 수연은 마지막까지 또렷하게 느꼈다— 놓친 게 아니라, 원래부터 각자 다른 곳으로 가도록 정해진 것처럼.
마지막 순간, 수연의 귀에 아주 희미하게 그 목소리가 다시 스쳤다. 이번엔 경고가 아니라, 훨씬 더 낮고 지친 혼잣말에 가까웠다.
"…미안하다."
그 두 글자가 안개 속으로 완전히 흩어지기 전, 수연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느꼈다— 이 목소리는 자신들을 해치려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해치는 손을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세계가 하얗게 지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