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86화. 세레나의 차례
수연이 다녀간 뒤, 소므니움은 도시 중심으로 향했다. 그가 아직 만나지 못한 마지막 상대, 세레나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날도 늦게까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전만큼 무리하지는 않았지만, 이 도시 전체를 챙기는 습관만큼은 쉽게 놓아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낯익은 기척이 스며들었다. 세레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오실 줄 알았어요."
"다들 저를 경계하시던데, 위원장님은 담담하시군요."
소므니움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경계할 이유는 있죠. 근데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요. 저는 제가 뭘 원하는지, 이미 오래전에 정리했거든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대개, 가장 깊은 곳에 정리되지 않은 걸 숨기고 계시더군요."
세레나는 그 지적에 옅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로, 아주 옅은 긴장이 스쳤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 최상품입니다."
소므니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무실의 풍경이 조용히 뒤바뀌었다.
세레나는 낯선, 그러나 뼛속 깊이 익숙한 어떤 건물 안에 서 있었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지어진, 차갑고 정교한 공간이었다.
그 안의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짊어지라고 요구받지 않는, 그저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 세계에서,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창조물'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소므니움의 목소리가 배경처럼 깔렸다.
"당신은 42층 옥상에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날의 그 선택, 그 무게, 전부 없었던 일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명령받은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레나는 그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차갑고 정교한 공간, 그러나 그 안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명령받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안한 거였나요."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편안하시죠. 결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결과에 대한 책임도, 다른 사람들의 무게도, 전부 다른 누군가의 몫입니다."
세레나는 그 삶을 상상해보았다. 도시 전체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삶, 누군가의 이름 앞에 서지 않아도 되는 삶.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피로가, 그 상상만으로도 옅게 풀리는 것 같았다.
'……이런 삶도, 있었겠구나.'
그러나 그녀는 문득, 그 차갑고 정교한 공간을 둘러보며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는, 그녀가 알던 그 어떤 얼굴도 없었다.
"이 세계에……"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도시는 있나요?"
소므니움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무슨 뜻이십니까?"
"노바 니발리스요. 라면사장님, 비아 씨, 녹사 씨, 수연 씨, 이리스 씨. 이 사람들이, 이 세계에도 있나요?"
"……없습니다."
소므니움이 답했다.
"당신이 무너지지 않았으니까요. 이 세계에서 당신은, 그 도시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세레나는 그 대답에 오랫동안 침묵했다. 차갑고 정교한 그 공간이, 순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렇군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 전까지의 흔들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됐어요."
"……됐다니요?"
"저는 제 상처로 지은 집에 살아요. 그 집이 없는 세계라면, 저한테는 의미가 없어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처음으로 그 화려하고 편안한 풍경을 향해 단호한 시선을 던졌다.
"이 삶, 열어보지도 않을게요."
소므니움은 그 말에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열어보지도 않으시겠다고요? 지금까지 아무도, 제가 보여드리기도 전에 거절한 적은 없었는데요."
"열어볼 필요가 없어요. 이미 답을 알았으니까요. 이 도시가 없는 삶이라면, 그게 아무리 편안해도 제 삶이 아니에요. 저는 42층에서 떨어졌던 그 세레나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예요. 그 사실을 지우면, 저는 제가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처음으로 완전한 확신에 찬 얼굴을 했다.
풍경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므니움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당신은, 제가 준비한 최상품을 열어보지도 않고 거절한 첫 번째 사람이군요."
"미안하지만, 열어볼 이유가 없었어요."
세레나는 그렇게 답하며 옅게 웃었다.
소므니움은 그 대답에 잠시 물러서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떠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덧붙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근데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라면사장. 당신 것도,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조용히 사라졌다. 세레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아, 방금 겪은 일을 천천히 되새겼다.
'……라면사장님 것도 준비했다니.'
그녀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며, 가게로 향할 채비를 했다.
세레나가 가게에 도착했을 때, 라면사장은 이미 평소처럼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옆, 카운터 구석에 소므니움이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실례가 많습니다."
그가 세레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당신, 저한테 못 한 걸 여기서 하려는 거예요?"
세레나가 경계하며 물었다.
"못 한 게 아니라, 안 하신 거죠. 그리고 저는 지금, 이분 차례라고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준비해뒀다고 했지."
라면사장이 국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근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건 제가 다른 누구에게도 써본 적 없는 방식입니다. 당신의 꿈은, 저조차도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소므니움이 담담히 인정했다.
"보통은 상대의 미련을 먼저 읽고, 거기 맞는 풍경을 짜서 보여드립니다. 근데 당신에게선, 아무것도 읽히지 않습니다. 마치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시간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보여준다는 거군."
"거의 그렇습니다. 다만, 딱 하나. 아주 흐릿하게, 하나의 형태만은 짚을 수 있었습니다."
소므니움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관측자가 아니었던 세계."
그 말에, 가게 안의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레나와 수연은 그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라면사장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가게의 평범한 주인이었던 세계. 무언가를 지켜보거나 기록해야 할 의무 없이, 그저 라면을 끓이고 손님을 맞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삶."
소므니움은 그렇게 설명하며, 라면사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라면사장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국자를 다시 들어 국물을 젓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손길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는 것을, 옆에 있던 수연만이 알아챘다.
"사장님……."
"괜찮다."
소므니움은 그 침묵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대답할 필요가 없다."
"거절도, 수락도 아니라는 뜻입니까?"
"그 꿈이 뭔지, 나는 이미 안다. 근데 그게 나한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소므니움은 그 대답에 오랫동안 침묵했다.
"흥미롭군요. 다른 이들은 전부, 자신에게 그 꿈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근데 당신은, 그 판단 자체를 저한테서 완전히 걷어가시는군요."
"내가 뭘 짊어지고 있는지는, 나만 안다."
라면사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럼 이 꿈, 정말로 열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열어볼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 답을 정했다."
소므니움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게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 같은 존재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 도시 전체가, 결국 당신 하나로 수렴하는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가게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다."
"근데 아까 그 표현, '관측자'라는 거……."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으려다가, 라면사장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의 눈빛에는, 캐묻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그만 물어봐라."
"……네."
수연은 그렇게 답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세레나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에서 오래도록 지켜온 원칙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알아도 먼저 묻지 않는 것, 상대가 스스로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날 밤, 가게 마감 후 라면사장은 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달랐다.
그는 침대에 눕자마자,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다음 날 아침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을 뜬 그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낯선 피로와 함께, 설명하기 힘든 옅은 안도가 함께 남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의 의미는, 그 자신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 채, 조용히 그의 안에 묻혀 있었다.
소므니움이 라면사장에게 물러난 다음 날, 녹사는 상담소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상하다."
그녀가 수첩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상담소에 온 사람들 중에,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세레나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탄지도, 피피도, 미르도 이상한 꿈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확인해봐야겠다."
녹사는 그렇게 답하며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탄지 로는 그날도 아궁이 앞에서 불씨를 살피고 있었다.
"탄지."
"어, 녹사 누나! 무슨 일이에요?"
"요즘 이상한 꿈 꾼 적 있나."
탄지는 그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꿈이요? 딱히 없었는데. 근데 요즘 다들 그 얘기 하더라고요. 저만 안 꾸는 건가."
"안 꿨다고?"
"네. 저는 그냥, 매일 밤 내일은 뭐 할지 생각하다가 잠들어요."
"내일 뭘 할지."
녹사가 그 대답을 곱씹었다.
"네! 내일은 불씨 살리는 거 더 잘하고 싶고, 다음 주엔 축제 때 못 해본 것도 해보고 싶고.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꿈꿀 시간이 없나 봐요."
녹사는 그 대답에 뭔가 짚이는 게 있어, 곧장 놀이터로 향했다. 그곳엔 피피 모나와 미르 오벨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피피, 미르."
"어? 녹사 언니다!"
"요즘 이상한 꿈 꾼 적 있나."
"이상한 꿈이요? 저는 맨날 내일 뭐 하고 놀지 생각하다가 자요!"
"저도요! 어제는 눈사람 어떻게 더 크게 만들지 생각하다가 잤어요."
"둘 다, 그리운 것이나 아쉬운 것 생각하다가 잔 적은 없나."
피피와 미르는 그 질문에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쉬운 거요? 딱히 없는데. 오늘보다 내일이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아쉬워할 시간이 있나?"
녹사는 그 대답에 옅게 웃었다. 무심하고도 정확한 통찰이었다.
"고맙다. 도움이 됐다."
녹사는 그렇게 말하고 곧장 가게로 돌아갔다.
"이 도시의 아이들, 전부 소므니움에게 안 걸린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전했다.
"왜요?"
"미련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일이 더 궁금해서다."
라면사장은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아직, 뒤를 돌아볼 만큼 쌓인 게 적다. 그 대신 앞을 볼 이유가 훨씬 많다."
"그게 저놈한테 약점이 되는 거네요."
이리스가 정리했다.
"그래. 저놈의 힘은 결국 과거나 이루지 못한 가능성에 기댄다. 근데 아직 그런 게 쌓이지 않은 존재한테는, 애초에 보여줄 게 없다."
녹사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럼 이 도시가 계속 아이들을 키워나가는 것 자체가, 저놈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네요."
세레나가 말했다.
그날 저녁, 도시 사람들 사이에 이 발견이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우리 애들이 제일 강하다는 거잖아!"
"그러게, 애들이 우릴 지켜주고 있었네."
몇몇 부모들은 그 사실에 뿌듯해하며 웃었다. 그 웃음 뒤편, 잠든 어른들 머리맡에서 아이들이 소곤소곤 내일 이야기를 나누는 진풍경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졌다.
"엄마, 내일은 나랑 눈사람 만들 거지?"
"아빠 잠꼬대하네. 내일 늦잠 자지 말라고 해야겠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도시의 밤을 지키고 있었다.
가게 안, 라면사장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옅게 웃었다.
"이 도시, 생각보다 훨씬 여러 겹으로 지켜지고 있군."
"저희만 애쓰는 게 아니었네요."
"그래. 아이들도, 상담소도, 각자의 방식으로 짊어지고 있다."
녹사는 그 대화 끝에 짧게 덧붙였다.
"근데 이 약점, 저놈도 곧 알아챌 거다."
"그럼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이리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위험하다기보다는, 저놈이 점점 더 궁지에 몰린다는 뜻이다. 통할 사람이 점점 줄고 있으니까."
그날 밤, 도시 외곽에서 소므니움은 그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이들이라……."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도시, 제가 상대해본 곳들 중에서 가장 견고합니다."
그는 그렇게 인정하며, 처음으로 뚜렷한 조급함을 느꼈다.
'……슬슬, 정말 마지막 수를 써야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시 전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의 다음 계획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도보다도 크고 거친 것이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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