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6화. 위대한 서사와 근로계약서
"생각해봤다."
라면사장이 불쑥 말했다.
소예는 젓가락을 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
"뭘요?"
"저번에 물어봤잖아. 도울 거 없냐고."
소예는 그제야 며칠 전 자기가 지나가듯 던진 말을 떠올렸다.
"아, 그거요."
"내일부터 나와."
"……진짜요?"
"싫으면 말고."
"아니요! 할래요."
소예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걸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비아가 카운터 위에서 그 반응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소예, 알바한다……이다?"
"어, 그런가 봐."
"월급은요."
라면사장이 그 질문에 짧게 답했다.
"밥."
"밥만요?"
"밥이 얼마나 큰 건지 몰라서 그런 소리 하는 거다."
소예는 뭐라 반박하려다가, 이 도시에서 그 말이 생각보다 진심에 가깝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부터요."
"앞치마는 저기."
라면사장이 카운터 아래를 가리켰다. 붉은 앞치마 하나가 반듯하게 개켜져 있었다. 소예는 그걸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 준비해둔 것 같았다.
"저 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이거?"
"여분이다."
"그렇구나."
소예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는 그런 게 자연스러웠다.
그날 밤, 소예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앞치마 생각이 났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실수하면 어떡할지, 손님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정작 어제까지는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막상 할 일이 생기니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가게에 도착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라면사장은 여느 때처럼 냄비를 닦고 있었고, 비아는 카운터 위에서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일찍 왔네."
"긴장돼서 잠을 못 잤어요."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니라고 하기엔 어제 계속 연습했어요, 머릿속으로."
비아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봤다.
"연습했다……이다? 나도 가르쳐줄까?"
"네가 뭘 가르쳐."
"나는 오래 살았다……이다. 노하우가 있다."
"넌 나이도 모르잖아."
"오래 산 건 안다. 나이는 모른다……이다."
소예는 그 논리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럼 뭘 가르쳐줄 건데."
비아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검지를 세웠다.
"첫째, 손님이 화내도 무섭지 않은 척한다."
"어, 그건 맞는 말 같아."
"둘째, 국물은 무조건 뜨겁게 준다. 식은 국물은 아무도 안 좋아한다……이다."
"그것도 맞말."
"셋째, 모르면 사장님한테 물어본다."
"그건 네가 아니라 사장님이 알려준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알려주는 거니까 내 거다……이다."
라면사장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넷째, 첫날은 무조건 실수한다. 그러니까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라."
소예는 그 말에 조금 놀라서 그를 봤다.
"그거 위로예요?"
"사실이다."
"위로 맞네요."
"아니라니까."
소예는 그 티격태격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느꼈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적어도 어젯밤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그녀는 붉은 앞치마를 목에 걸고 허리 끈을 단단히 묶었다.
"좋아요. 해볼게요."
"그래."
"저 잘 못해도 자르지 마세요."
"월급도 안 주는데 뭘 잘라."
"그것도 맞말이네요."
가게 문에 첫 손님의 그림자가 비쳤다. 소예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카운터 앞으로 나섰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다짐한 첫날은 엉망이었다.
첫 손님에게는 계란을 두 개 넣어야 할 그릇에 하나만 넣었고, 두 번째 손님에게는 반대로 두 개를 넣었다. 세 번째 손님이 주문한 곱빼기를 보통으로 착각해 냄비 옆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국물을 손등에 살짝 튀겼다.
"괜찮아요?"
라면사장이 다가와 그녀의 손등을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냥 조금."
"장갑 껴."
"어디 있는데요?"
"저기, 서랍."
"진작 말씀해주시지."
"안 다칠 줄 알았다."
소예는 그 무심한 말에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그냥 장갑을 꼈다.
비아는 카운터 위에 앉아 그 모든 과정을 구경만 했다.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소예, 못한다……이다."
"처음이라 그래."
"나는 처음부터 잘했다."
"넌 문이니까 그런 거잖아."
"문도 처음엔 서툴렀다……이다."
"그래서 첫날에 뭘 잘못했는데?"
비아는 잠깐 고민하더니,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바다로 문을 냈다……이다."
"그거 완전 대참사잖아."
"그래도 재밌었다……이다."
소예는 그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자기가 오늘 저지른 실수들은 가게를 물바다로 만들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도가 카운터에 앉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낮게 웃었다.
"첫날부터 고생하네요."
"……보고 계셨어요?"
"눈에 다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요."
"창피하네요."
"저도 처음 여기서 뭐 도와줬을 때 그릇 세 개 깼어요. 사장님이 그날 한마디도 안 하시더라고요."
"그게 더 무서운데요."
"그러니까요."
볼도는 순한 맛 대신 오늘은 매운 라면을 시켰다. 눈이 예전만큼 붓지는 않았다.
"오늘은 창고 안 가셨어요?"
소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좀 쉬려고요."
"잘됐네요."
"매일 가는 건 저도 별로예요. 근데 안 가면 왠지 불안하기도 하고."
"그런 것도 이상하네요."
"이상한 거 맞아요. 근데 여긴 그런 이상함을 딱히 안 고쳐줘요. 그냥 두고 봐요."
소예는 국물을 뜨며 그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이 가게, 이 도시는 무언가를 억지로 고치려 들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낯선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걸음걸이부터 뭔가 위엄이 넘쳤다. 검은 망토 비슷한 걸 걸치고 있었는데, 가장자리가 낡아서 해져 있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라면가게인가."
그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예는 순간 긴장했다. 뭔가 대단한 사람 같았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인간계의 음식을 먹어보겠다."
그는 카운터 가장 안쪽 자리에 거만하게 앉았다. 망토를 휘날리듯 걸치며.
"천 년을 군림하던 자에게 어울리는 요리를 내오라."
소예는 잠깐 얼어붙었다.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러나 라면사장은 아무렇지 않게 국자를 들었다.
"라면 하나."
"……라면?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나?"
"들었다. 라면 하나."
남자는 잠깐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곧 한숨을 쉬며 수긍했다.
"뭐, 좋다. 어차피 여기서는 그런 게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소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실례지만…… 원래 뭐 하셨던 분이세요?"
남자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마왕이었다."
"아, 마왕님이셨구나."
"세 개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대륙을 잿더미로 만든 존재다."
"대단하시네요."
"지금은 옆 골목 세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소예는 순간 멍해졌다.
"……네?"
"시급이 나쁘지 않다. 손님도 친절하고."
라면사장이 옆에서 태연하게 말을 얹었다.
"거기 사장이 예전에 용사였다."
"자, 잠깐만요. 마왕이 세탁소에서 일하는데, 사장이 용사예요?"
"응."
"싸우거나 안 해요?"
"이제 와서 뭘."
마왕이라는 남자가 낮게 웃었다.
"처음엔 어색했지. 근데 세탁물 개는 데는 딱히 원한이 필요 없더군."
"……그렇긴 하겠네요."
"오히려 그쪽이 다림질을 잘해. 예전에 검을 다루던 손이라 그런지."
소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과, 동시에 이상하게 납득이 가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비아가 옆에서 심드렁하게 끼어들었다.
"인류의 위대한 서사가 근로계약서 앞에 무릎 꿇는다……이다."
"……그거 어디서 배운 거야?"
"세레나가 말했다."
"세레나 씨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거예요."
라면사장은 대답 없이 완성된 라면을 마왕 앞에 내려놓았다.
"먹어."
"고맙다."
마왕은 젓가락을 들고 국물부터 한 모금 마셨다. 그 거창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좋군."
"당연하지."
"세탁소 라면집 야식보다 낫다."
"거긴 라면집이 아니라 세탁소잖아."
"거기서도 컵라면은 판다."
소예는 그 대화를 들으며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위대했던 존재가 컵라면 맛을 비교하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이 도시와 정확히 어울렸다.
마왕이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문이 다시 열리며 한 여자가 뛰어들듯 들어왔다.
숨이 찬 얼굴이었다. 화려한 갑옷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는데, 어깨 쪽 장식이 하나 떨어져 덜렁거렸다.
"늦었다! 늦었어!"
그녀는 마왕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소리쳤다.
"교대 시간 늦으면 사장님한테 혼나는데!"
마왕이 라면 국물을 마시다 말고 옆을 흘끔 봤다.
"또 지각이냐."
"당신이야말로 여기서 뭐 해요! 세탁소는요?"
"내 타임 끝났다. 네 타임이잖아."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뛰어왔죠!"
소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여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같은 세탁소에서 일해요. 교대로."
"아까 말씀하신 그 세탁소요?"
"네. 이분이 오전, 제가 오후."
마왕이 낮게 덧붙였다.
"얘는 예전에 나를 쓰러뜨리려던 용사 파티의 부관이었다."
소예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지금 같은 데서 일해요?"
"세탁소 사장이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었어요. 시급도 괜찮고, 이 동네에서 아는 사람이 저 사람밖에 없어서."
"원한 같은 건……"
"있죠. 근데 세탁물 앞에서는 딱히 쓸모가 없더라고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라면사장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저도 라면 하나 주세요! 빨리요! 저 5분 뒤에 다시 가야 돼요!"
라면사장은 이미 냄비에 새 면을 넣고 있었다.
"알아서 하고 있다."
"역시 최고!"
여자는 그렇게 외치고는 마왕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저 좀 늦게 갈 테니까, 손님 오면 대충 응대 좀 해주세요."
"내가 왜."
"방금까지 여기서 라면 드셨잖아요, 여유 있으시면서."
"여유랑 그건 다른 문제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했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오래된 동료 같은 편안함이 묻어났다. 소예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마왕이 처음 이 자리에 앉았을 때의 위엄과, 지금 라면 국물을 앞에 두고 투덜거리는 모습 사이의 간극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비아가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언니도 근로계약서 있냐……이다?"
"당연히 있죠. 4대 보험도 돼요."
"그거 좋은 거냐."
"엄청 좋은 거예요."
"나도 하고 싶다……이다."
"넌 뭘 하게, 꼬맹아."
"문 여는 거. 시급 받고 싶다……이다."
여자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좀 스케일이 다른데."
라면사장이 완성된 그릇을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먹고 가."
"고맙습니다, 사장님!"
여자는 순식간에 국물까지 그릇을 비우고, 동전 몇 개를 카운터에 올려놓은 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진짜 가야 돼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녀는 그렇게 외치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왕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 쉬듯 웃었다.
"매번 저런다."
"친해 보이세요."
소예가 말했다.
마왕은 잠깐 대답하지 않다가, 낮게 말했다.
"예전엔 서로 죽이려고 했던 사이다. 지금은 교대 시간 늦는 걸로 싸운다."
"그게…… 나쁜 변화는 아닌 것 같아요."
"나쁘지 않지."
마왕은 그 말을 끝으로 남은 국물을 마저 마셨다.
저녁이 되자 손님이 줄었다.
소예는 앞치마를 두른 채 카운터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렸다.
"오늘 완전 정신없었어요."
"첫날은 다 그렇다."
"내일은 좀 나을까요?"
"몰라."
"또 몰라예요."
"진짜 모르니까."
소예는 그 대답에 웃으며 앞치마 끈을 풀었다.
"그래도 재밌었어요."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저 잘했어요?"
라면사장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침묵 끝에 답했다.
"나쁘지 않았다."
소예는 그 짧은 칭찬에 이상하게 마음이 부풀었다. 대단한 말도 아니었는데.
비아가 옆에서 하품을 하며 끼어들었다.
"나도 칭찬해달라……이다."
"넌 오늘 아무것도 안 했잖아."
"구경했다. 구경도 노동이다……이다."
"그건 아니야."
"치사하다……이다."
소예는 그 실랑이를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마왕이었던 사람이 라면을 먹으러 왔고, 자기는 계란을 두 번이나 잘못 넣었고, 비아는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다.
특별한 하루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소예는 앞치마를 곱게 개어 카운터 아래 제자리에 두었다. 내일도 이 자리에 이 옷이 놓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그녀는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가게 안을 한 번 돌아봤다.
라면사장은 여전히 냄비 앞에 서 있었고, 비아는 어느새 카운터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창밖의 눈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오늘 그녀는 저 안의 붉은 앞치마 한 장만큼, 어제보다 이 가게에 조금 더 속해 있었다.
"내일 봐요."
"어."
라면사장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소예는 이제 그 무심함이 인사의 다른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섰다. 눈 냄새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어제와 같은 냄새였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 도시에서, 그녀는 이제 손님이 아니라 앞치마를 두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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