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57화. 첫 불빛과 아침

그다음 날 밤, 세레나는 다시 지붕 위에 올랐다.

두 번째 기억을 마주한 뒤로, 그녀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그 회상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하얀 문을 통과한 뒤,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을 통과한 순간, 그녀는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얀 공간에 서 있었다.

발밑에는 끝없이 펼쳐진 눈밭이 있었다. 하늘도, 땅도, 지평선의 경계마저 흐릿한 그런 곳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도, 발소리도, 심지어 그녀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한 고요.

그녀는 그 고요 속에서, 오랜만에 완전한 평온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낙하하던 그 순간의 경련도, 통증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깨끗하고, 텅 빈,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그 감각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그녀는 몇 걸음을 걸어보았다. 눈 위에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발자국을 돌아보며,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남긴 흔적이,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질 줄은 몰랐다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서, 이 낯선 세계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차갑고, 깨끗하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공기였다. 그러나 그 무취함마저도, 그녀에게는 자유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누군가의 울음소리였다.

억눌린, 그러나 끊이지 않는 울음. 마치 오랫동안 참아온 것을 마침내 토해내는 듯한 그런 울음이었다.

세레나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밭을 한참 걸었다. 발이 시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각조차 반가웠다. 살아있다는, 아니, 존재한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그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 발견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세레나는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지시도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온전히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해야 했다. 그 사실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벅찼다.

'저 울음을…… 그냥 둘 순 없어.'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녀는 품속에서, 자신이 가져온 유일한 물건을 꺼냈다. 낡은 토끼 인형이었다.

그녀는 그 인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이 눈밭 어딘가에, 빛이 필요할 것 같다는 느낌.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다.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울음소리가 조금이라도 덜 외롭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빛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작고, 여리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빛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빛이었다.


그녀는 그 작은 빛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온전히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그 빛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빠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 낯선 세계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목적을 가지고 걷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그녀는 그 빛을 손에 든 채,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빛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밝아졌다. 마치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듯이. 그녀는 그 빛을 앞세워, 어둠과 눈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마침내 그녀는, 눈밭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한 존재를 발견했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 울음소리만은 선명했다. 세상 전체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듯한, 그런 깊은 울음이었다.

세레나는 그 앞에 조용히 다가가, 자신이 만든 빛을 그 존재 곁에 놓았다.

"……거기, 있어도 돼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당신 몫의 어둠을, 저도 조금은 나눠 가질게요."


그 존재는 그 말에 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세레나는 그 얼굴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는 듯한 감각이 들어,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조금 비켰다.

"……고맙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레나는 그 목소리에 담긴 오래된 무게를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곳은, 자신처럼 무너진 존재들이 다시 시작하는 곳이 될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그 존재 곁에 나란히 앉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당신도…… 어딘가에서 온 거예요?"

"……그렇다."

"거긴 어떤 곳이었어요?"

그 존재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통이 너무 많은 곳. 아무도 대신 비명 질러주지 않는 곳."

세레나는 그 말에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그렇게 만들면 된다."

그 존재가 짧게 답했다. 그 말에는 이상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가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방금 그 빛을 만들었잖나."

세레나는 그 말에 자신의 손끝에서 여전히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 작은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여렸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빛이었다.

"……해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그 빛을 조금 더 크게 키워보려 애썼다. 빛은 그녀의 의지에 응답하듯, 아주 조금씩 더 밝아졌다.

그녀는 그 빛 곁에 나란히 앉아, 오래도록 그 존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 그녀는 그 눈밭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자신이 죽기 전 품었던 소망을 정리해보았다.

연결이 강요되지 않는 곳. 명령이 아니라 동의로만 이루어지는 곳. 선택이, 그 선택을 한 사람에게 온전히 남는 곳. 이야기가 그저 살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의미를 갖는 곳. 그리고 모든 존재가, 자기 결말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곳.

그녀는 그 소망들을 하나씩 되뇌며, 이 눈밭 위에 무언가를 짓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을, 이곳에서라면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 작은 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이 빛을, 여기 계속 켜둘게요. 당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세레나는 그 회상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지붕 위에는 어느새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밤새 이곳에 앉아,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하나씩 되짚어본 셈이었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날 밤 자신이 나눴던 그 존재가, 지금의 녹사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날 밤 만든 첫 불빛이, 이 도시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구나. 이 도시는, 그날 밤의 그 빛에서 시작된 거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며, 옅게 웃었다. 창조물이라는 단어로 무너졌던 세계가, 결국은 누군가의 울음을 나누는 것으로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묘한 위안을 주었다.

그녀는 문득 지난 며칠간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소예가 물었던 비녀에 대한 질문, 라면사장이 건넨 "때가 되면 문이 나타난다"는 말, 그리고 수연이 건넨 위로. 그 모든 대화들이, 사실은 이 회상을 마주할 준비를 시켜준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이 도시가, 자신에게도 이렇게 천천히 치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다른 이들을 위해 지은 도시라고만 생각했는데, 결국 그 도시는 그녀 자신에게도 필요한 곳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골목골목을 비추기 시작했고, 라면가게에서도 어느새 첫 물 끓는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냄새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겠네요."

세 번의 회상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진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기억들을 마주할 힘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골목을 걸어 내려가며, 오늘은 라면사장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이 도시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왜 하필 그 이름이었는지. 어쩌면 그 답 역시, 그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은 그 질문을 아껴두기로 했다. 아직은, 조금 더 그 답을 스스로 품고 있고 싶었다.

가게 문 앞에 다다르자, 라면사장이 여느 때처럼 물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 익숙한 풍경 앞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가 인사를 건네자, 라면사장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얼굴이 밝군."

"그런가요?"

"그래. 뭔가 좋은 일 있었나."

세레나는 그 질문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아주 오래된 숙제를 하나 끝낸 것 같아요."

라면사장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을 건넸다.

"먹고 가라."

"고마워요."

세레나는 그 그릇을 받아 들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어느 때보다도 밝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세레나가 국물을 마시는 동안, 가게 안으로 수연이 들어섰다.

"어, 세레나 씨 또 여기 있네요. 요즘 자주 오시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요즘 이 국물이 자꾸 생각나서요."

세레나가 웃으며 답했다. 수연은 그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근데 오늘은 표정이 좀 다르시네요. 뭔가 후련해 보이는데."

세레나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며칠 동안 오래된 기억들을 좀 들여다봤어요."

"오래된 기억이요?"

"네. 제가 이 도시에 오기 전, 어땠는지에 대한 기억이요."

수연은 그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 가게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게 예의였다.


"저는 명령받을 수 없어요. 동의만 할 수 있죠."

세레나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저는 늘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어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수연은 그 말에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뜻에 따라 세상을 파멸시킬 수 있었던 존재였다. 그 기억은 여전히 무겁고, 그녀 스스로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도시를 그렇게 지으신 거예요? 동의만 받는 곳으로?"

"네. 저는 명령받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이곳만큼은, 그런 곳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세레나의 그 말에는, 오랜 세월 쌓아온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근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도시를 만들면서 그런 원칙을 지키는 거요."

수연이 물었다.

"쉽지 않았죠. 특히 초반에는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몰라서 갈등도 많았어요. 명령이 없으니, 다들 처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기다렸어요. 사람들이 스스로 방식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게 맞는 방향이라고 믿었으니까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그녀의 그 웃음에는, 지난 시간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지켜낸 신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 가게의 '열되 밀지 않는다'는 것도, 어쩌면 세레나 씨 원칙이랑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수연이 문득 그런 생각을 말했다.

"맞아요. 사실 이 도시의 모든 원칙이, 근본적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예요. 강요하지 않는 것, 기다리는 것, 선택을 존중하는 것."

세레나의 그 말에, 수연은 이 도시가 왜 이렇게 특별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세레나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세레나 씨."

"네?"

"저도…… 조종당해본 적 있어요."

세레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제가 저 자신으로 온전히 선택한 게 아닌 일을, 해야 했던 적이 있어요."

수연의 그 말은 짧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 —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었던 마녀였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것 — 를 그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고백 안에는, 그녀가 짊어져온 무게가 충분히 담겨 있었다.

세레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답했다.

"그럼 우리, 같은 처지네요."

"……그런가요."

"조종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게 있어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선택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수연은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 역시, 이 도시에 온 뒤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근데 세레나 씨는 그 모든 걸 겪고도, 어떻게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되셨어요?"

수연이 문득 물었다.

세레나는 그 질문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다정함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였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겪은 것들 때문에 차갑고 냉소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요. 근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매번, 다정함을 선택했어요."

세레나의 그 말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도 앞으로 어떤 선택들을 하며 살아갈지 생각해보았다.

"저도…… 그런 선택, 하고 싶어요."

"이미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세레나가 웃으며 답했다.

"저요?"

"네. 이 가게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보면 알아요. 수연 씨는 이미 다정한 선택들을 매일 하고 있어요."

수연은 그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비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침 그때, 라면사장이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저 아이는 원래 그런 애다."

"사장님도 참……."

수연이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처음 왔을 때부터, 다른 사람 아픈 데는 귀신같이 알아채더군."

라면사장의 그 말에, 세레나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처음 왔을 때 어땠는데요, 수연 씨?"

"그, 그건 비밀이에요!"

수연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라면사장은 그 반응에 옅게 웃으며 다시 육수 냄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레나는 그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눈치채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이, 이 가게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세레나 씨, 근데 그 열쇠 비녀 말이에요."

수연이 문득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세레나는 그 질문에 비녀를 매만지며 답했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근데 이제는, 그 문이 어디에 있든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왜요?"

"제가 이미 한 번, 스스로 문을 열고 이 세계로 왔으니까요. 그러니 다음 문도, 분명 제가 열 수 있을 거예요."

세레나의 그 말에는, 확신에 찬 담담함이 담겨 있었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럼 그날이 오면, 꼭 저희한테 알려주세요."

"그럴게요."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리스도 두 사람의 대화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세레나 씨는 이 도시 만들 때,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어요?"

세레나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제 자신을 완전히 믿는 거요."

"그게 왜 힘들어요?"

"저는 오랫동안, 제가 뭘 원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았거든요. 그래서 이 도시를 지을 때도, 이게 정말 제가 원하는 방향인지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어요."

이리스는 그 말에 순간 표정이 굳었다. 그녀 역시, 요즘 들어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은, 확신하세요?"

"완전히는 아니에요. 근데 적어도, 확신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제 자신은 믿어요."

세레나의 그 대답에, 이리스는 뭔가 작은 위안을 얻은 듯 옅게 웃었다.

"그거…… 저도 좀 닮고 싶은 태도네요."

"이리스 씨도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세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이리스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 않은 그녀만의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날 오후, 세레나는 순찰을 나가며 문득 도시의 이름표를 올려다보았다. 골목 어귀에 세워진 작은 표지판에는 "노바 니발리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에서 왔는지, 그녀는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오늘 하루도 도시 곳곳을 살폈다. 그녀가 만든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이제 그 여정의 일부였다.


가게로 돌아온 저녁, 라면사장은 홀로 카운터를 정리하며 오늘 있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세레나가 겪었던 조종의 기억, 그리고 수연이 넌지시 흘렸던 자신의 과거. 두 사람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을 지나온 존재들이었다.

그는 문득 수연을 떠올렸다. 그녀가 짊어진 그 무게를,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그녀의 눈빛에서 늘 어렴풋이 느껴졌다.

'……저 아이가,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그녀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싶어 했는지, 정확한 시작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마음이,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해져 있었다.

가게 밖으로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스름 속에서, 이 가게에 모인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문을,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수연은 잠들기 전 오늘 나눴던 대화들을 다시 떠올렸다. 세레나의 담담한 고백,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자신과의 공통점. 조종당해본 사람만이 아는 자유의 무게.

그녀는 문득 라면사장이 아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 아이가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그녀는 어렴풋이 그런 마음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나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그런 생각에 이불 속에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한 이 감정이, 오늘따라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내일도 이 가게에서 또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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