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49화. 수연의 열흘

그날 아침, 라면사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육수를 끓이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수연."

카운터를 정리하던 수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네?"

"오늘로 계산 끝났다."

수연은 그 말에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계산이요?"

"벽값. 열흘 일하기로 했잖나."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 까마득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정말로 그날의 약속이 떠올랐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첫날, 라면사장이 내밀었던 그 청구서. 벽 한 면, 놀란 냄비 한 개, 분위기 값. 갚는 방법은 가게 일 열흘.

"그게…… 벌써 열흘이 지난 거예요?"

그녀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그렇다."

"근데 저 여기서 일한 지 훨씬 오래된 것 같은데."

"이 도시엔 시간이 제대로 안 흐른다. 열흘이라는 게, 정확히 며칠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연은 그 설명에 문득 오래전 세레나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도시엔 아직 시간이 본격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던 그 말.

"그럼 진짜 열흘이 지난 건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래 지난 건지도 모르는 거네요."

"그렇다. 근데 오늘, 나는 계산이 끝났다고 느꼈다. 그거면 됐다."

수연은 그 말에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벽값이라는 형식적인 이유로 시작된 이 가게에서의 시간이, 오늘 그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이었다.


"그럼…… 저 이제 여기서 안 일해도 되는 거예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다. 빚은 다 갚았다."

"그럼 저는……."

수연은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자신의 자리가 붕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갚아야 할 것'이 있어서 이곳에 있었는데, 그 이유가 사라지자 이상하게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그만 쉬어라.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된다."

라면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수연은 그날 하루, 이상하게 마음이 어수선했다.

배달을 나가지도, 손님상을 치우지도 않은 채 그녀는 낯선 손님처럼 카운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 하던 일을 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 가게가 낯설게 느껴졌다.

"언니, 왜 그렇게 앉아만 있어요?"

소예가 지나가다 물었다.

"그냥…… 오늘 계산 끝났대. 벽값."

"진짜요? 축하해요!"

소예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지만, 수연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근데 왜 표정이 안 좋아요?"

소예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이상해."

"뭐가요?"

"빚 다 갚았으니까,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진 거잖아."

소예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언니, 여기 그냥 일 때문에 있었던 거예요?"

수연은 그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건 아닌데."

"그럼요?"

수연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마왕도 그 소식을 듣고 흥미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벽값을 다 갚았다고?"

"네."

"그럼 이제 자유의 몸이군. 원한다면 이 도시를 떠날 수도 있는 건가."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요."

"생각해봐라. 진짜 자유로운 선택이 뭔지."

마왕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수연은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어쩌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낯선 가능성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꼈다.


그날 저녁, 수연은 가게 문을 나서며 라면사장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럼…… 저 갈게요."

"그래."

"내일은…… 안 올게요."

라면사장은 그 말에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그 담담함이 이상하게 서운했다.

그녀는 그렇게 가게를 나섰지만, 몇 걸음 못 가 걸음을 멈췄다.


골목 끝에서, 그녀는 우연히 세레나와 마주쳤다. 순찰을 돌던 세레나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냥…… 오늘 벽값 다 갚았대요. 그래서 이제 자유래요."

"축하할 일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근데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요."

세레나는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자유로워지면 오히려 더 복잡한 법이에요. 정해진 이유가 있을 땐 그 이유만 따라가면 되는데, 이유가 사라지면 스스로 선택해야 하니까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저도 답해드릴 수 없어요. 그거야말로 진짜 수연 씨만의 선택이니까요."

수연은 그 대답에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네요. 스스로 정하라고."

"그게 이 도시의 방식이잖아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순찰을 이어가러 걸음을 옮겼다. 수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여기 서 있지?'

그녀는 자신이 향하던 방향이, 사실은 아무 데도 정해진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도시에 온 이후로, 그녀의 하루는 늘 이 가게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배달을 나가고, 손님을 만나고, 저녁이면 다시 이 가게로 돌아오고.

그런데 오늘, 그 중심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골목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여전히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자신이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콜라비빔면을 만들어 울었던 첫날, 벽값 청구서를 받고 황당해했던 순간, 배달을 배우며 서툴게 넘어졌던 날들, 얼음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오후, 녹사와의 대련에서 낯선 감각에 흔들렸던 밤, 그리고 이리스와 코코아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확인했던 늦은 시간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단지 '벽값을 갚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도시와 이 가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럼 그냥 인정하면 되잖아.'

그녀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고민하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해졌다.

그날 밤, 수연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곱씹었다. 빚을 다 갚았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할까.

'나 설마…… 그냥 있고 싶어서 있었던 건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까지는 벽값이라는 이유가 있어서 그곳에 머무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유가 없어도 그냥 그곳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수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뜨자마자 가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라면사장이 그녀를 보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

"……안 온다고 하지 않았나."

수연은 그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그냥…… 왔어요."

"빚은 다 갚았는데."

"알아요."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며, 천천히 그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있고 싶어서 있는 거예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수연은 뭔가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이 가게에 머무르는 이유를 '빚'이라는 형식으로 정당화해왔다는 걸, 그제야 완전히 인정한 것이었다.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게 제일 좋은 이유다."

"진짜요?"

"빚 때문에 있는 것보다, 있고 싶어서 있는 게 훨씬 오래간다."


소예가 그 대화를 듣고 신이 나서 다가왔다.

"언니, 진짜 안 갈 거예요?"

"응, 안 가. 그냥 계속 여기 있을래."

"잘됐다! 저 언니 없으면 심심할 뻔했어요."

이리스도 그 소식을 듣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선배, 계속 있는 거죠?"

"응, 계속 있을 거야."

이리스는 그 대답에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럼 오늘부터 다시 잘 부탁드려요!"


비아도 그 소식에 신이 나서 소리쳤다.

"수연 안 간다……이다! 계속 있는다……이다!"

"그렇게 될 것 같더라고."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내가 알고 있었다……이다! 수연은 절대 안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어?"

"그냥 안다……이다! 수연 얼굴 보면 안다……이다!"

수연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작은 존재의 눈치가, 그녀 자신보다 더 정확했다.


그날 오후, 라면사장은 외상장부를 꺼내 수연의 페이지를 펼쳤다.

『수연 — 벽.』

그는 그 옆에, 마침내 완료 표시를 적었다.

『(완료 — 빚이 아니라 선택으로)』

수연은 그 페이지를 곁눈질로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제 완전히 끝난 거네요."

"끝난 게 아니라 시작된 거다."

"그게 무슨 차이예요?"

"빚은 끝나는 거지만, 선택은 매일 새로 시작하는 거다. 오늘도 네가 여기 있기로 선택했으니까, 오늘의 페이지가 또 시작된 거다."


라면사장은 그 페이지를 잠시 더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근데 아까 마왕이 무슨 얘기를 했나."

수연은 그 질문에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표정이 그랬다. 뭔가 크게 흔들린 얼굴."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답했다.

"이 도시를 떠날 수도 있다는 얘기였어요. 자유의 몸이 됐으니까."

라면사장의 손이 순간 멈췄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근데 그 순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걸 확실히 느꼈어요."

라면사장은 그 대답에 옅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거면 됐다."

"근데 사장님, 만약 제가 떠나고 싶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셨을 거예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오래도록 생각하다 답했다.

"보내줬을 거다."

"진짜요?"

"당연하다. 이 가게의 원칙이다. 열어두되 밀지 않는다. 떠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붙잡지 않는다."

수연은 그 대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늘 낮에 세레나와 나눴던 무거운 대화를 알 리 없었지만, 그녀는 이 원칙이 여전히 이 가게를 지탱하는 단단한 기둥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래도…… 붙잡고 싶으셨을 거잖아요."

라면사장은 그 지적에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그랬을 거다."

그 솔직한 고백에, 수연은 옅게 웃었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벽을 부수고 들어왔던 그날의 우연이, 오늘 마침내 그녀 자신의 확고한 선택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럼 저 앞으로도 계속 매일 선택하는 거네요."

"그렇다. 우리 모두 그렇다.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매일 다시 여기 있기로 선택하고 있다."

수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도 변함없는 골목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 문을 정리하며, 그녀는 조용히 다짐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 이곳을 선택하겠다고. 빚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비아가 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수연, 오늘부터 진짜 우리 식구다……이다?"

"어, 나 이미 식구 아니었어?"

"빚 때문에 있는 거랑, 있고 싶어서 있는 거랑 다르다……이다! 오늘부터 진짜다……이다!"

수연은 그 구분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오늘부터 진짜야."

"약속이다……이다!"

비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수연은 그 작은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웃었다.

"약속할게. 계속 여기 있을게."

그날 밤, 가게 불을 끄기 전 수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처음 앉았던 그 자리가, 이제는 완전히 그녀만의 자리로 굳어져 있었다. 빚으로 시작된 인연이, 오늘부로 완전한 선택이 되어 이 가게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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