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41화. 이리스와 소예
마감을 마친 늦은 밤, 소예는 뒷정리를 하다가 문득 코코아 두 잔을 탔다.
"이리스 언니, 이거 마실래요?"
이리스는 앞치마를 정리하다 말고 그 제안에 눈을 반짝였다.
"코코아? 완전 좋죠!"
두 사람은 마감 후 텅 빈 카운터에 나란히 앉았다. 따뜻한 코코아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소예가 먼저 말을 건넸다.
"소예도요. 오늘 계산 실수 세 번이나 했잖아요."
"그건 언니가 말 걸어서 그런 거거든요!"
이리스는 그 반박에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오늘 있었던 손님들 이야기, 라면사장의 무뚝뚝한 반응들, 비아의 엉뚱한 행동들.
그러다 문득, 소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는 여기 오기 전에, 사람들이 언니를 어떻게 봤어요?"
이리스는 그 질문에 잠시 손을 멈췄다.
"음…… 다들 제가 만든 걸 좋아했어요. 근데 저 자체를 궁금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 별을 좋아하고, 제 공연을 좋아하고. 근데 그 뒤에 있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들 별로 안 궁금해했어요."
소예는 그 말에 마음이 이상하게 아렸다.
이리스는 코코아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일 큰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았거든요. 근데 제 매니저는 제 상태보다 오늘 관객 수를 더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했죠, 뭐. 그날 무대에서 완벽하게 웃었어요. 근데 그 웃음 뒤에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어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요."
소예는 그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런 취급, 진짜 서럽죠."
"서러운 것도 몰랐어요, 그땐. 그냥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야 그게 이상한 거였다는 걸 알았어요."
"저도 비슷했어요."
소예가 나직이 말했다.
"소예도요?"
"네. 저도…… 사람들 눈엔 그냥 예쁘게 웃는 애였어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는 아무도 안 물어봤어요. 그냥 제가 웃어주면, 그걸로 충분한 것처럼."
이리스는 그 고백에 놀란 눈으로 소예를 바라보았다.
"그거…… 저랑 되게 비슷하네요."
"그쵸?"
두 사람은 그 순간, 서로에게서 낯익은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둘 다 그것을 굳이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근데 소예는 그때 어떻게 했어요? 다들 웃어주길 바랄 때."
이리스가 물었다.
"그냥 웃었어요. 웃는 게 제일 쉬웠거든요. 안 웃으면 다들 무슨 일 있냐고 캐물었는데, 그게 더 귀찮았어요."
"그럼 진짜 힘들 땐 어떻게 했어요?"
"혼자 방에서 울었어요.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다음 날엔 또 웃었죠."
이리스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진짜 비슷하네요. 저도 항상 그랬어요. 무대 뒤에서 울고, 무대 위에선 웃고."
"근데 그거 아세요? 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안 웃어도 되는 날을 겪었어요."
"언제요?"
"수연 언니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제가 아직 서툴 때요. 실수해서 완전 당황했는데, 아무도 저한테 웃으라고 안 했어요. 그냥 실수해도 된다고만 했어요."
이리스는 그 이야기에 부러운 눈빛을 했다.
"저도 그런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있을 거예요. 여긴 그런 곳이니까."
"근데 여긴 좀 다른 것 같아요."
이리스가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뭐가요?"
"여기 사람들은, 제가 뭘 보여주지 않아도 그냥 저를 봐줘요. 실수해도, 아무것도 안 꾸며도."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처음 왔을 때는 되게 낯설었는데."
"소예는 언제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소예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수연 언니가 처음 제 이름을 불러줬을 때요. 그냥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게 되게 크게 다가왔어요."
이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 가게에서 처음 "너의 능력이 아니라. 너."라는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마침 뒷정리를 마치고 나가려던 수연이 그 대화를 우연히 듣고 걸음을 멈췄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카운터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도 좀 껴도 돼요?"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언니! 언제부터 계셨어요?"
소예가 놀라 물었다.
"방금. 근데 둘이 얘기하는 거 되게 좋아 보여서 방해하기 싫었어."
"들으셨어요?"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근데 걱정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코코아 잔을 하나 더 준비해 왔다.
"나도 하나 마셔도 될까?"
"당연하죠!"
세 사람은 그렇게 카운터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시간을 나눴다.
"근데 나도 비슷한 경험 있어."
수연이 문득 말했다.
"언니도요?"
"응. 원래 세계에서, 다들 내 검술만 보고 감탄했지, 내가 힘든지 아닌지는 안 궁금해했어. 강한 것도 피곤할 때가 있는데."
"진짜 우리 다 비슷하네요."
이리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 도시에 이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모였을까."
수연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다들 비슷한 이유로 이야기가 끝났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소예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결과만 소비되고, 진짜 자기 자신은 아무도 안 봐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시작되는 거죠."
세 사람은 그 말에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결국 비슷한 결핍을 안고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둘 다, 결과로만 평가받던 사람들이었네요."
이리스가 문득 그렇게 정리했다.
소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금은 그냥…… 존재만으로 괜찮은 것 같아요."
"맞아요.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과거를 온전히 다 말하지 않고도, 어렴풋이 서로를 이해했다. 코코아 잔이 비어갈 때까지, 두 사람은 그저 그 따뜻한 공기 속에 조용히 머물렀다.
"저기, 근데 언니 노래하는 거 들어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소예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리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건 아직."
"아, 미안해요. 캐물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그냥……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근데 언젠가는요."
소예는 그 대답에 옅게 웃었다.
"기다릴게요. 급할 거 없으니까."
이리스는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가게에서는 다들 그런 식으로,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주는 법을 알고 있었다.
"소예는 예전에 뭐 하고 싶었어요? 원래."
이리스가 화제를 돌렸다.
소예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음……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냥 늘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살았거든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지금은요?"
"지금은…… 그냥 이 가게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특별한 목표는 없지만,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아요."
이리스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직 목표가 있어요. 근데 그게 뭔지는 아직 정확히 몰라요."
"찾으면 저도 알려주세요.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근데 라면사장님은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걸까요?"
이리스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처음 봤을 때부터 다 아는 것 같더라."
수연이 맞장구쳤다.
"저는 처음에 좀 무서웠어요. 뭔가 다 꿰뚫어 보시는 것 같아서."
소예가 말했다.
"근데 지금은요?"
"지금은 오히려 편해요. 뭘 숨겨도 어차피 다 아실 것 같으니까, 그냥 숨길 필요가 없어졌어요."
이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처음엔 그 무뚝뚝함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게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져요."
"안전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뭘 보여줘도, 뭘 숨겨도 다 똑같이 대해주시니까요.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세 사람은 그 말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의 무뚝뚝함이, 사실은 가장 안전한 종류의 배려였다는 걸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저기, 근데 진지하게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이리스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뭔데요?"
"우리, 진짜 이야기가 끝나서 여기 온 거 맞을까요? 아니면 그냥…… 도망친 걸까요?"
가게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수연도, 소예도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수연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근데 도망쳤다고 해도,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난 거니까."
"그런가요."
"응. 그리고 여기서 새로 시작하고 있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소예도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끝난 거든 도망친 거든, 지금 여기서 이렇게 코코아 마시고 있는 게 진짜니까요."
이리스는 그 말들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네요. 지금이 진짜죠."
세 사람은 그렇게 늦은 밤까지 코코아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결론도, 극적인 고백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비슷한 상처를 지녔다는 걸 어렴풋이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음에 또 이렇게 마셔요."
소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요. 다음엔 제가 탈게요."
이리스도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잔을 정리하고 가게 불을 껐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엔 작은 온기가 하나 더 자리 잡은 밤이었다.
라면사장은 다음 날 아침, 개수대에 나란히 놓인 코코아 잔 세 개를 발견하고 옅게 웃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있었나."
"어떻게 아셨어요?"
수연이 물었다.
"잔이 세 개나 되니까. 셋이 뭘 그렇게 오래 얘기했나."
"그냥…… 이런저런 얘기요."
수연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어젯밤 나눈 이야기가 워낙 조심스러운 것들이라, 굳이 세세히 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라면사장은 그 얼버무림에도 별다른 표정 없이 그릇을 정리했다.
"좋은 얘기였으면 됐다."
"어떻게 좋은 얘기인 줄 아세요?"
"잔이 세 개였는데, 다 깨끗이 비어 있었으니까. 억지로 마신 코코아는 절반쯤 남기 마련이다."
수연은 그 관찰력에 새삼 감탄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사소한 흔적 하나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라면사장은 그렇게만 답하고 다시 아침 준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이 가게에 또 하나의 조용한 우정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에 대한 옅은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
비아가 카운터 뒤에서 그 잔들을 보며 물었다.
"소예랑 이리스, 친해졌냐……이다?"
"그런 것 같은데."
"잘됐다……이다! 둘 다 좋은 사람이니까 서로 알아봤을 거다……이다."
수연은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서는,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 알아봄이, 결국은 서로를 조금씩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며칠 뒤, 소예는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이리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다.
소예는 그 소리에 놀라 손을 멈췄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설거지를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을 눈치챈 티를 내면, 이리스가 다시 그 소리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리스는 그렇게 손님상을 정리하며 무의식중에 몇 소절을 흥얼거리다가, 문득 자신이 소리 내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화들짝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저 뭐 했어요?"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요."
소예가 태연하게 답했다.
이리스는 그 대답에 안도한 듯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 못 들은 척해줘서."
소예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저 설거지를 계속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저 콧노래가 진짜 노래가 되어 흘러나올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라면사장은 외상장부를 꺼내 두 개의 이름 옆에 짧은 메모를 나란히 적었다.
『소예 — 서로를 알아본 눈 (완료).』
『이리스 루멘 — 서로를 알아본 눈 (완료). 그리고 아주 작은 콧노래 하나.』
그는 그 페이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이 가게에서 시작된 작은 우정 하나가, 앞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어떤 힘이 되어줄지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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