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24화. 외상장부의 이름들

가게 카운터 서랍 깊숙한 곳에는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겉표지에 손글씨로 "외상"이라고만 적힌 그 공책은, 라면사장이 유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는 물건이었다.

수연이 그 존재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청소를 하다가 서랍 밑에서 떨어진 그 공책을 주웠던 것이다.

"이거 뭐야?"

그녀가 무심코 펼쳐 보려는 순간, 라면사장이 재빨리 다가와 낚아챘다.

"함부로 보는 거 아니다."

"아니, 그냥 청소하다가 떨어져서……. 뭔데 이렇게 예민해?"

"외상장부다."

"외상장부? 그럼 돈 안 낸 사람들 명단이야?"

라면사장은 공책을 소중히 다시 서랍에 넣으며 답했다.

"돈이 아니다."

"그럼 뭔데?"

"때가 되면 보여준다."

수연은 그 대답에 궁금증이 폭발했지만, 더 캐물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뒤, 라면사장이 마을 회의에 참석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수연은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 공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딱 한 번만…… 사장님도 없는데 뭐 어때."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공책을 펼쳤다.

안에는 여러 이름들과 함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항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구스 발트 — 국물 한 번 더 웃어주기 (완료)』

『헤라 몬츠 — 다음에 올 때 산 이야기 하나 (완료)』

『하로 벤딕 — 등 하나 고쳐주기 (진행 중)』

『두반 카로 — 눈사람 이야기 들어주기 (완료)』

수연은 그 항목들을 보며 어리둥절해졌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약속들이었다.


『세레나 — 첫 명령을 내리지 않은 날 (완료)』

『마왕 — 왕좌 없이 웃는 법 (진행 중)』

『볼도 — 잊지 않고 기억하는 법 (진행 중)』

『소예 — 스스로 이름 말하기 (완료)』

수연은 그 항목들을 하나씩 읽으며, 이 도시 사람들 각자가 이 가게와 맺은 인연의 깊이를 새삼 실감했다. 돈으로는 절대 환산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빚들이었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던 그녀는, 문득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수연 — 벽.』

단 두 글자였다. 그녀는 그 항목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그녀가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 부순 벽. 청구서를 받고 열흘 일해서 갚았던 그 벽값. 그런데 이 외상장부에도 똑같이 적혀 있었다.

'완료'라는 표시가 없었다.

수연은 그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신은 열흘간 일해서 그 값을 다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장부에는 아직 미완료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페이지들도 몇 장 더 넘겨보았다. 그중엔 이미 이 도시를 떠난 것으로 보이는 낯선 이름들도 있었다. 완료 표시가 되어 있는 이름 옆에는, 작은 글씨로 짧은 메모가 덧붙여져 있기도 했다. "웃으며 떠났다", "다시 온다고 했다" 같은 문구들이었다.

그 메모들을 보며 수연은 이 공책이 단순한 장부가 아니라, 라면사장이 오랫동안 조용히 지켜봐 온 사람들의 발자취라는 걸 느꼈다. 이 도시에 왔다가 다시 떠난 이들조차, 그의 손끝에서 이렇게 짧은 몇 마디로나마 기억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라면사장이 돌아온 것이다.

수연은 화들짝 놀라 공책을 덮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봤나."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미안. 그냥 궁금해서……."

"괜찮다. 언젠간 보여줄 생각이었다."

라면사장은 그녀 옆에 앉아 공책을 다시 펼쳤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였다.

"이거…… '벽'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완료 표시가 없어. 나 분명 다 갚았잖아."

"갚은 건 벽값이다. 청구서에 적힌 거."

"그럼 이건 뭔데?"

라면사장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이 장부는 돈으로 안 갚아지는 것들을 적는 곳이다."

"그럼 나는 뭘 갚아야 하는데?"

"모른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장부의 항목들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드러난다. 구스 발트도 처음엔 그냥 '길'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나중에서야 '국물 한 번 더 웃어주기'로 구체화됐다."

수연은 그 설명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내 항목도 나중에 구체화된다는 거야?"

"그렇다."

"언제?"

"나도 모른다. 그건 너와 이 가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거다."


수연은 그 공책을 다시 넘기며 다른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이 도시에서 만난 여러 얼굴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장부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거 다 사장님이 정한 거야?"

"아니다. 나는 그냥 기록할 뿐이다."

"그럼 누가 정해?"

"본인들 스스로다. 자기가 이 가게에 진 빚을, 자기 방식대로 갚는다. 나는 그걸 지켜보고 적을 뿐이다."

수연은 그 말에 문득 깨달았다. 이 장부는 사실 빚 목록이 아니라, 이 가게를 거쳐 간 사람들이 남긴 마음의 기록이었다.

"근데 완료라고 적힌 것들 보면, 진짜 다양하네. 국물 한 번 웃어주기부터, 명령 안 내린 날까지."

"다들 자기가 진 빚의 무게가 다르니까."

"근데 이상하게 다 되게…… 사소해 보이는데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네."

"그게 진짜 중요한 것들의 특징이다. 겉으로는 별거 아닌데, 안 하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로 벤딕이 등을 고치는 이야기를 하며 했던 말과 비슷한 결이었다. 겉보기엔 사소해도,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

"근데 왜 볼도 거는 아직도 진행 중이야? 걔 되게 오래 일했잖아."

"기억하는 법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다. 계속 연습해야 하는 거다."

"뭘 기억하는데?"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그건 볼도 본인 이야기다. 내가 대신 말할 건 아니다."

수연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캐묻지 않았다.

"근데 왜 나는 아직도 미완료야? 나도 분명 뭔가 했을 텐데."

"근데 완료된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사람들이랑 관계가 끝났다는 뜻이야?"

"아니다."

"그럼?"

"완료는 그 빚 하나가 끝났다는 뜻이지, 관계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완료되고 나면 그 사람들은 이 가게에 더 편하게 드나든다. 더는 갚아야 할 게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럼 나도 빨리 완료되고 싶은데."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왜?"

"억지로 갚으려는 빚은 진짜로 갚아지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흘러야 진짜다."

수연은 그 말에 조금 답답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라면사장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아직 진행 중이니까."

"뭐가?"

"네가 이 가게에 진 빚, 그리고 이 가게가 너한테 진 빚. 둘 다 아직 안 끝났다."

"가게가 나한테 진 빚도 있어?"

"당연하다. 여기서 얻은 게 벽 하나뿐이 아니잖나."

수연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럼 이 장부, 언젠가 다 완료되는 날이 와?"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오래도록 침묵했다.

"모든 게 완료되는 날은…… 아마 이 가게의 마지막 날일 거다."

"그게 무슨 뜻이야?"

"모른다.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안 가봤으니까."

수연은 그 대답에서 뭔가 무거운 예감을 느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마지막 날이 온다는 게, 그럼 이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뜻이야?"

"모른다. 그냥…… 모든 빚이 다 갚아지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때는 이 가게가 더는 지금 같은 모습일 필요가 없어질 거다."

"그게 슬픈 얘기로 들려."

"슬플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든 빚이 갚아진다는 건, 결국 아무도 여기 더는 미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가게가 사라지는 날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날이 안 왔으면 좋겠는데."

"왜?"

"그냥…… 여기가 없어지는 거 상상이 안 가."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그럼 너도 이 장부에 뭔가를 계속 쌓아가면 된다. 다 갚아지지 않게."

"그거 좀 이기적인 방법 아니야?"

"이기적인 게 아니다. 관계라는 건 원래 다 갚아지지 않는 채로 계속되는 거다. 완전히 청산되는 순간, 그건 이미 관계가 아니게 된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수연 — 벽.』

그 짧은 두 글자가, 이제는 다르게 읽혔다. 부순 벽이 아니라, 그녀가 이 가게와 함께 허물고 지어가고 있는 어떤 경계처럼.

그녀는 문득 그 벽이 처음 부서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벽을 부수고 들어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콜라비빔면을 만들어 울던 그날. 그날 부서진 건 단순한 벽돌이 아니라, 그녀와 이 낯선 세계 사이의 경계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경계는 지금도, 아주 천천히, 다른 방식으로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다.


라면사장은 공책을 조심스럽게 서랍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이제 봤으니, 너도 언젠가 저기에 뭐가 적힐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다."

"부담스러운데."

"부담 가질 거 없다. 그냥 살면 된다. 살다 보면 자연히 적힐 거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아가 카운터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내 페이지도 있냐……이다?"

"당연히 있지."

"뭐라고 적혀 있냐……이다?"

라면사장이 서랍을 슬쩍 가리키며 웃었다.

"그건 너도 아직 볼 자격 없다."

"불공평하다……이다! 나도 알고 싶다……이다!"

"네 것도 아직 진행 중이니까 그렇다."

비아는 입을 삐죽였지만, 이내 그 말에 담긴 온기를 느꼈는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럼 사장님 것도 있냐……이다?"

비아가 문득 물었다.

라면사장의 손이 순간 멈췄다.

"내 거?"

"응……이다. 사장님도 이 가게한테 빚진 거 있냐……이다?"

수연도 그 질문에 흥미가 동해 귀를 기울였다.

라면사장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랍 속 공책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있다."

"뭔데……이다?"

"그건 아직 나도 다 못 읽었다."

"자기 것을 자기가 왜 못 읽어……이다?"

"어떤 페이지는, 쓴 사람도 아직 마주할 준비가 안 됐을 때가 있다."

그 대답에 가게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수연은 그 말속에 담긴 무게를 정확히는 몰랐지만, 오래도록 미뤄온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꼈다.

"언젠가는 읽을 거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옅게 웃으며 서랍을 닫았다.

"때가 되면."

또 그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수연도 더는 답답해하지 않았다. 이 가게에서 '때가 되면'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지,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이 가게의 낡은 공책 한 권 안에는,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이들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라면사장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그 페이지가 펼쳐지는 날, 이 가게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무게를 나눠 들게 될 것이었다. 수연은 그날이 아주 먼 미래이길,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오길 조용히 바랐다. 그때가 오면, 자신도 그 옆에서 함께 그 페이지를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페이지에, 좋은 문장 하나를 더 쌓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조용히 다짐하며 서랍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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