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23화. 첫눈이 아닌 눈
배달을 나선 수연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 도시에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골목마다 늘 조금씩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는 걸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땅에 눈이 쌓여 있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내리는데, 바닥엔 늘 같은 정도의 눈만 덮여 있었다. 더 쌓이지도, 녹아 사라지지도 않는 채로.
"……이거 이상하지 않아?"
수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골목 곳곳을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 봤던 눈 쌓인 지붕이, 지금도 정확히 같은 두께로 쌓여 있었다. 며칠, 몇 주가 지났는데도.
그녀는 시험 삼아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보았다.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다음 골목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와보니, 그 발자국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눈은 원래의 매끈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이거."
그녀는 다시 한번 발자국을 남기고, 이번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눈은 계속 내렸지만, 발자국은 서서히 지워지는 게 아니라 마치 되감기 하듯 순식간에 원래대로 메워졌다.
그녀는 눈송이 하나를 손바닥으로 받아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지만, 그 눈송이 역시 녹아 물이 되는 대신 잠시 후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나가던 볼도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뭐 해?"
"이것 좀 봐. 발자국이 그냥 사라져."
볼도는 그 광경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 그거 원래 그래."
"알고 있었어?"
"순찰 돌 때 매번 보는 걸. 처음엔 나도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냈나 보다 해."
"근데 왜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 안 해?"
"다들 그냥…… 여기 사는 방식이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 같아."
수연은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가게로 돌아온 수연은 그 의문을 라면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여기 눈 이상하지 않아? 계속 내리는데 안 쌓여."
라면사장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그런가."
"모르는 척하지 마.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다."
"근데 왜 말 안 해줬어?"
"물어본 적 없었으니까."
수연은 그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카운터에 걸터앉았다.
"그럼 이제 물어볼게. 왜 이래?"
라면사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답했다.
"이 도시엔 아직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눈이 쌓이려면 어제와 오늘이 달라야 한다. 근데 이 도시는 아직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연은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저녁, 순찰을 마치고 들른 세레나에게 수연이 다시 물었다.
"세레나 씨, 여긴 시간이 안 가요?"
세레나는 그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직은요."
"아직은이라니. 그럼 언젠가는 간다는 거예요?"
"네. 하지만 아직 그때가 아니에요."
"왜 아직 아닌데요?"
세레나는 잠시 고민하다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 도시는……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어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들도 함께 시작돼요. 늙음, 상실, 이별 같은 것들이요."
"그럼 지금은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조금은요. 물론 슬픈 일도, 힘든 일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본격적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 무게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질 거예요."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세레나는 그 질문에 옅게 웃었다.
"시간이 안 흐르면, 아무것도 진짜로 변하지 않아요. 진짜로 자라지도, 진짜로 이별하지도 못해요. 그게 편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진짜로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럼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시간이 안 흐른다는 거."
"어렴풋이는요.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갖고 있어요."
"근데 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아요?"
"문제 삼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다들 편안해해요. 어제의 상처가 오늘 더 깊어지지 않고, 어제의 실수가 오늘 돌이킬 수 없게 굳어지지 않으니까요."
수연은 그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 안도감 아래 깔린 불완전함도 함께 느꼈다.
"근데 그럼 좋은 일도 안 쌓이는 거잖아요. 어제 즐거웠던 게 오늘 더 깊어지지도 않고."
세레나는 그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이 유예의 대가예요. 아픔도 안 깊어지지만, 기쁨도 안 깊어져요."
수연은 그 대답에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콜라비빔면을 만들어 울었던 그날. 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려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얼마나 있었던 거예요?"
"정확히 세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직 하루하루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으니까요."
"이상하네. 근데 나는 분명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경험은 쌓여요. 시간만 안 흐를 뿐이지."
수연은 그 설명이 여전히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이 도시가 아직은 일종의 유예 상태에 있다는 것.
"세레나 씨는 그럼 시간이 흐르길 바라요, 아니면 이대로가 낫다고 생각해요?"
수연이 물었다.
세레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저는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에요. 이 도시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지, 제가 바라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근데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본 거예요."
세레나는 그 물음에 옅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흐르길 바라요.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이 도시에 온 사람들이 진짜로 서로를 알아갈 수 없으니까요. 지금은 다들 그냥 이 순간만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아까는 시간이 안 흐르는 게 편안하다고 했잖아요."
"편안한 것과 좋은 건 달라요. 편안한 채로만 있으면, 아무도 진짜로 자라지 못해요."
수연은 그 구분에 고개를 끄덕였다. 편안함과 성장은 종종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는 걸, 그녀는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었다.
라면사장이 그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낮게 끼어들었다.
"이 도시가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데?"
"사람들이 늙기 시작한다.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지금처럼 매일이 비슷한 게 아니라, 매일이 쌓여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게 된다."
"그게 무섭게 들려."
"무서울 수 있다. 근데 그게 진짜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되지 않는 눈사람이 오히려 더 사랑받는다던 두반 카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 도시도 비슷한 걸지도 몰랐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한 걸지도.
"근데 언젠가는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거지?"
"그렇다."
"그날이 오면 어떻게 돼?"
라면사장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답했다.
"그날이 오면…… 이 가게도,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거다."
비아가 카운터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조용히 창가로 다가와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눈 쌓이는 거 무섭다……이다."
"왜?"
수연이 물었다.
"쌓이기 시작하면…… 언젠가 녹는다……이다. 녹으면 없어진다……이다."
"그래도 다시 내리잖아."
"그래도 그때 그 눈은 아니다……이다."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아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도 이 도시가 맞이할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찮아. 눈이 쌓이고 녹아도, 우리가 겪은 건 안 없어져."
"진짜냐……이다?"
"응. 기억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눈은 녹아도, 그 눈 보면서 나눈 이야기는 안 녹아."
비아는 그 말에 한참을 생각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 쌓여도 괜찮을 수도 있겠다……이다."
"응.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그래도 조금 무섭다……이다. 처음 겪는 거니까……이다."
"나도 그래. 근데 처음 겪는 거니까 오히려 같이 겪을 수 있잖아. 나도 처음, 너도 처음."
비아는 그 말에 조금씩 표정이 밝아졌다.
"같이 겪으면…… 덜 무섭다……이다."
"맞아. 그러니까 그날이 오면, 우리 같이 창가에 앉아서 첫눈 구경하자. 진짜 첫눈."
"약속이다……이다! 꼭이다……이다! 손가락 걸었다……이다!"
비아는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청했고, 수연은 웃으며 그 작은 손가락에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마왕도 그날 저녁 가게에 들렀다가 그 대화의 끄트머리를 듣고는 코웃음을 쳤다.
"시간이 안 흐르는 게 뭐가 문제냐. 내가 다스리던 시절엔 그런 게 있었으면 참 편했을 텐데."
"왜요?"
"실수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그 실수 이전으로 돌아가니까. 백성들이 날 원망할 일도 없었겠지."
"근데 그럼 진짜로 반성할 기회도 없는 거잖아요."
마왕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렇겠군."
"왕국이 무너진 것도, 어쩌면 그런 반복 속에서 아무것도 진짜로 안 바뀌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마왕은 그 지적에 한참을 침묵하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날카롭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생긴다는 거겠지. 그것도 각오해야 할 거다."
"각오하고 있어요, 조금씩."
수연이 답했다. 마왕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를 나섰다.
그날 밤, 수연은 가게 문을 나서며 다시 한번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바닥엔 같은 두께의 눈만 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광경이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이것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의 준비 단계였다.
"아직은요."
세레나의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은 이지만,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오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이 지금과는 다른 무게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수연은 그 사실이 두렵기보다는, 묘하게 설렜다. 언젠가 이 눈이 진짜로 쌓이기 시작하는 날, 자신이 이 도시에서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할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그 답을 아직 몰랐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확신만은 있었다.
가게로 들어서자 라면사장이 마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안 자?"
"눈 좀 더 보고 싶어서."
"뭐 볼 게 있다고."
"그냥…… 언젠가 이게 진짜로 쌓이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이 순간이 좀 다르게 보여서."
라면사장은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이 오면 두렵겠나?"
"조금은. 근데 기대도 돼."
"왜."
"진짜가 되는 거잖아. 지금은 다 좀…… 유예된 느낌이었거든. 근데 진짜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겪는 것들도 진짜가 되는 거잖아."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군."
"사장님은 안 두려워?"
그는 잠시 대답을 고르다 낮게 말했다.
"두렵다. 근데…… 그날이 와야 끝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수연은 그 말의 무게를 다 헤아리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뭔가 중요한 것을 스친 기분이었다. 끝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이 가게도 지금과는 다른 얼굴을 하게 될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 변화가 두렵기보다는, 함께 맞이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놓였다. 비아와 나눈 손가락 약속처럼, 이 도시의 진짜 첫눈을 함께 맞이할 이들이 이미 곁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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