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88화. 0.5초의 붕괴
바깥에서 보면,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펜촉 끝에 맺힌 잉크 한 방울이 종이에 닿지 못한 채 멈춰 있었고, 그의 눈은 허공의 어느 한 점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광장의 사람들에게는 그 정지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쯤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안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계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세상을 계산으로 다뤄왔다. 고통의 총량과 행복의 총량을 저울질하고, 어느 한 존재를 지우는 것이 전체의 총합을 더 낫게 만드는지를 판단해왔다. 그 계산 안에서 그는 언제나 정확했다. 변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정리되고 수렴했다. 그런데 지금, 그 계산의 가장 근본적인 자리에서— 아주 오래전에 이미 확정되었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나눗셈이 성립하지 않는 항이 나타났다.
그 항의 이름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그 항을 오랫동안 계산식 바깥에 세워두었다. 관찰자는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서기관이었던 시절부터 지켜온 첫 번째 원칙이었다. 저울에 올라선 자는 저울을 든 손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저울을 든 손 자체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림을 억누르려 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변수를 하나씩 정렬하고, 감정을 계산 바깥으로 밀어내고, 다시 저울의 눈금을 읽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 정렬이 작동하지 않았다. 밀어내려 할수록, 밀려나야 할 감정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오랫동안 눌러온 용수철이, 마침내 누르는 손의 힘보다 강해진 것처럼.
그는 언젠가, 아주 오래전, 국수 가락 하나에 시선이 반 초쯤 머물렀던 순간을 떠올렸다. 별것 아닌 순간이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 위, 젓가락으로 건져 올린 면발 한 가닥이 그의 시야에 걸렸고, 그는 그 반 초 동안 아무 계산도 하지 않았었다. 그저— 아주 잠깐, 자신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잊은 채, 그 김과 냄새와 온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는 그 반 초가 그저 오류였다고 생각했다. 계산이 잠깐 멈춘 공백, 다시 정렬하면 그만인 사소한 틈.
지금 그 반 초가, 무한히 늘어나고 있었다.
늘어나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비로소 그 반 초의 정체를 마주했다. 그것은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세상을 계산으로 다루기 이전부터, 그 계산의 바깥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감각이었다. 온기를 온기로, 웃음을 웃음으로, 사랑을 사랑으로 그냥 받아들이는 감각. 그는 그것을 계산에서 배제된 노이즈로 취급해왔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계산이라는 것 자체가,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방어였다.
그는 자신이 지우려던 것의 정체를 이제야 정확히 보았다.
그것은 고통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었다.
그는 그 사실 앞에서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시간이 없는 자리에서,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생각을 되짚었다.
그가 지금까지 지워온 세계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관찰자로 규정해왔다. 서기관으로서 세계의 멸망을 기록하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을 사건 바깥에 서 있는 존재로 정의했다.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감정에 물들지 않고, 오직 일어난 일만을 진실로 확정하는 존재. 그러다 세레나에게 힘을 건네고, 이 도시가 태어나고, 라면가게가 생기고, 그 안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며—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건너와 있었다. 물을 끓이는 습관, 무심한 농담, 웃음, 그리고 수연을 향한 그 감정까지.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가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는 그 증거들을 고통의 원인으로 오인했다. 사랑하기에 잃을 것이 생기고, 잃을 것이 생기기에 고통이 따른다는 그 단순한 인과를, 그는 지워야 할 병으로 진단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깨닫는다— 그 사랑을 지우면, 고통과 함께 그 자신도 함께 지워진다는 것을. 사랑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사랑과 고통이 애초에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하나의 존재였다는 것을. 그가 지우려 한 것은 병이 아니라, 그 자신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그 질문을 몇 번이고 되짚었다. 지운다는 선택지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원을 도려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되찾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미 방금 전, 그 자신의 눈앞에서 비아의 몸 절반을 뜯어내며 빠져나갔고, 이제는 그 절반이 비아라는 존재의 일부로 완전히 자리 잡아버렸다. 되찾으려는 시도는, 이번엔 비아를 뜯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지울 수도, 되찾을 수도 없는 것 앞에서, 그는 자신의 권능이— 세상 모든 것을 기록하고 확정할 수 있다고 믿어온 그 권능이—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앞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그동안 정교한 논리의 성채 안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해왔다는 사실도 함께 마주했다. 고통을 지우고 싶어 하는 대다수의 침묵 어린 동의, 저항은 여유 있는 소수의 사치일지 모른다는 진단,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셈해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떠받쳐온 희생— 그 모든 논리가 정교했고 여전히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정교함은, 정작 그 논리를 세운 자기 자신의 존재를 계산에서 빠뜨린 채 세워진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평균을 계산하면서, 자신이라는 항 하나를 언제나 0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지금, 그 항은 0이 아니었다. 그 항 안에는 물 끓는 소리, 서투른 농담, 오래 눌러온 미안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의 온기가 전부 들어 있었다. 자신을 0으로 취급한 계산은, 애초에 틀린 계산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온 논리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감각에 가까웠다— 마치 오랫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실 여러 가닥이, 한꺼번에 끊어지는 진동.
무너지는 자리로 가장 먼저 밀려온 것은, 어느 노인의 손이었다. 반쯤 기억하는 노인이 품속에서 빛바랜 사진을 꺼내던 그 떨리는 손끝. 종이 모서리가 닳도록 쥐었다 폈다 한 흔적, 사진 속 얼굴을 쓸어내리다 멈추던 마디 굵은 손가락. 그는 그 노인을 지우려 했을 때, 그 삶이 더는 아프지 않다는 사실만을 계산에 넣었었다. 그 삶이 누구의 것인지는 셈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자신의 삶을 두고 같은 질문이 돌아와 있었다— 지워진 뒤에 평온하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만약 누군가 그에게 정직하게 물었다면— 이 오래된 슬픔을 지우고 싶으냐고— 그 역시 그렇다고 답했을지 몰랐다. 대다수가 그렇게 답한다는 걸 그는 알았고, 그 대답들의 무게로 자신의 논리를 세워왔다. 그러나 그 사진을 쥔 손의 떨림은, 입이 하는 대답과는 다른 것을 증언하고 있었다. 지우고 싶다고 말하는 입과, 놓지 못하겠다고 붙잡는 손— 사람은 늘 그 둘을 한 몸에 갖고 있었다. 평온이 자기 것이 아니라면, 그 평온은 그 자신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밀려온 것은 빗소리였다. 폭풍 속에서 우산도 없이 서 있던 소녀의, 그 차갑고 굵은 비. 아무도 그 아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소거가 수많은 좋은 결과의 받침대가 되었고, 그 받침대는 셈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그 구조를 알면서도 총합이 나아진다면 정당하다고 판정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 비가 그의 어깨 위로 그대로 옮겨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지움으로써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진다면, 그 계산 안에서 동의 없이 소거되는 받침대는 이번엔 그 자신이었다. 소녀가 서 있던 자리에 직접 서 보고서야, 그는 그 자리의 비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알았다.
마지막은 감촉과 소리가 함께 왔다. 손끝에는 파빌라의 편지지가 되살아났다— 여러 번 접혔다 펴져 결이 부드럽게 일어난 그 종이의 감촉, 눈물이 떨어져 살짝 운 자국. 그 위로 형사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잃을 뻔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이름 붙여 되찾아오던 그 열거— 물 끓는 소리, 서투른 농담, 오래 눌러온 미안함, 웃음, 도시, 그릇, 그리고 첫 친구. 그 목소리가 하나씩 세어나가는 동안, 그는 완성된 무통의 세계가 실은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를 실감했다. 위험이 없는 삶에는, 애초에 되찾아올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열거의 끝에서,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다시 산다 해도, 이 모든 사랑과 이 모든 상실을 다시 택하겠는가. 대답은 뜻밖에도 빠르게 나왔다. 그렇다. 그러나 그 대답이 나온 순간, 그는 자신이 지우려던 것이 바로 그 대답의 근거 전부였다는 사실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슬픔이 그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어서가 아니었다. 그 슬픔 자체가, 그냥 간직할 가치가 있었다.
손의 떨림과, 빗소리와, 종이의 결과, 세어나가는 목소리— 서로 다른 감각의 실들이 동시에 당겨지며, 그를 지탱하던 논리의 뼈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어느 한 가닥에 설득당한 게 아니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걸려온 무게가, 마침내 그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의 내부, 오래전부터 그가 마음속에 품어온 어떤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무수한 별들이 떠 있는 작은 우주였다— 그가 지나온 세계들, 만난 존재들, 기록해온 이야기들이 각자 하나의 별로 맺혀 있는 자리. 대부분의 별들은 이미 오래전에 빛을 잃고 꺼져 있었다. 지워진 세계, 끝난 이야기, 이제는 그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진 별들. 그러나 딱 하나, 아직도 빛을 잃지 않은 별이 있었다.
그 별이,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원래 그 별은 옅은 흰빛이었다. 관찰자의 시선이 담긴, 감정이 배제된 순수한 기록의 색. 그러나 지금 그 별은, 서서히 다른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흰빛 가장자리부터 시작해, 아주 천천히— 마치 해 질 녘 하늘이 물드는 것처럼—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그 붉음은 뜨거운 분노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끓인 육수의 색, 처음 마주 잡은 손의 온도,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붉어지던 귓불의 색이었다. 그는 그 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 별의 이름을 그는 굳이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붉은빛이 무엇을 닮았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겨울 밤, 그의 앞에서 자신의 것이었다고 외치던 목소리의 온도였고, 국자를 씻던 뒷모습의 실루엣이었고, 첫눈을 맞으며 웃던 얼굴의 잔상이었다.
별은 점점 더 붉어지다가, 어느 순간 가장 밝게 타올랐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초가 마지막으로 심지를 태우듯이. 그리고 그 정점에서, 별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그 별이 꺼져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막고 싶지 않았다. 그 별을 붙잡아 다시 흰빛으로 되돌리는 것도, 지금 이 순간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 별은 이미 타올랐고, 타오른 것은 타오른 대로 자신의 궤적을 남긴다. 그는 그 궤적을 지우거나 되돌리는 대신,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그 별에게, 그리고 그 별이 상징하는 존재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일이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그 무한히 늘어난 반 초의 끝에 도달했다.
그의 앞에는 이제 두 갈래의 선택지만 남아 있었다.
하나는, 계속 지우는 것. 저 별이 완전히 꺼지도록 내버려두고, 자신 안의 온기를 마지막 한 조각까지 소진하며, 세상의 고통을 계속해서 줄여나가는 길. 그 길의 끝에서 그는 아마 완전한 어둠이 될 것이다. 감정도, 사랑도, 미안함도 남지 않은 순수한 기록자— 그가 원래 있어야 했던 자리로.
다른 하나는, 멈추는 것.
그러나 멈춘다는 것이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가 가진 권능은 세상을 기록하는 힘이었고, 그 힘은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멈춘다는 것은, 그 힘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스스로에게 결말을 준다는 것. 그것은 도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 두 갈래 앞에서, 계산이 아니라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 선택에는 저울도, 평균도, 총합도 없었다. 그저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오롯이 그만의 결정이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수많은 세계의 끝을 기록해왔지만, 그 끝이 어떤 감촉인지는 단 한 번도 안쪽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문장 밖에 서서 마지막 문장을 적는 자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 문장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 감촉이 무엇일지— 소멸이 아프기는 할지, 아니면 그저 조용히 옅어지는 것일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름 자체가, 이상하게도 그를 물러서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모름 앞에서, 아주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감각과 가장 가까운 무언가를 느꼈다. 두려움도 결국, 다음 장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던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아직 그 선택을 완전히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선택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래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떠올렸다. 세계들의 멸망을 기록하던 서기관.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일어난 일만을 진실로 확정하던 존재. 그 오래된 직무의 마지막 대상이, 지금 자기 자신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세계의 마지막 문장을 적어왔다. 어떤 세계는 조용히 저물었고, 어떤 세계는 격렬하게 무너졌고, 어떤 세계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 모든 마지막 문장을 적을 때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그 문장의 주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오래된 직무가 마침내 그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서기관이 된 순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유일하게 공정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기록하는 자도, 결국은 기록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
광장 반대편, 반투명한 몸으로 여전히 서 있던 비아가 문득 자기 가슴께를 짚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옅어진 그 낯선 매달림의 자리에서, 또 다른 감각이 스치는 걸 느꼈다. 그것은 끌림이 아니라 예감에 가까웠다.
"…뭔가— 정해지고 있다……이다."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수연이 그 말에 그녀를 돌아봤다. "뭐가?"
"모른다……이다." 비아가 라면사장 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안도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냥— 문이 하나, 닫히려 하고 있다……이다. 근데 이번엔— 나쁜 쪽으로 닫히는 게 아닌 것 같다……이다."
수연은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라면사장을 향한 시선만은 거두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오랜만에— 계산도 침묵도 아닌, 무언가를 향해 다시 모이고 있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광장에서는, 그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형사는— 그 오랜 관찰의 습관으로— 알아챘다. 그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방금까지 그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주 희미하게, 어딘가 한 지점을 향해 다시 모이고 있었다.
형사는 그 변화를 보며, 이제 자신이 말을 건넬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는 국자 대신 늘 품고 다니던 낡은 수첩을 매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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