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47화. 문명이 꺼진 세계
후드의 온기가 이끄는 방향으로 며칠을 걸은 끝에, 세 사람은 낮은 언덕을 넘어 다섯 번째 세계로 들어섰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의 감각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공기의 밀도가 한 번 훅 바뀌고, 발밑의 흙빛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그 짧은 어긋남. 그러나 이번엔 그 어긋남 뒤에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수연은 그게 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고 나서야 깨달았다.
"…냄새가 없어."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형사도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을 어귀에는 작은 화덕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화덕 안쪽이 새까맣지 않고 그냥 회색 돌빛 그대로였다. 오래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애초에 한 번도 불을 먹은 적이 없는 돌처럼 깨끗했다.
"탄 냄새가, 정말 하나도 안 나는군요." 형사가 낮게 말하며 화덕 안쪽에 손을 넣어봤다. "재도 없고, 그을음도 없습니다. 이 마을에, 애초에 불이 있었던 흔적 자체가 없습니다."
레테가 옆에서 코트 자락을 여미며 대기를 가만히 들이마셨다.
"장작 냄새도, 기름 냄새도, 심지 타는 냄새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 "이건 단순히 불을 아끼는 세계가 아니에요. 불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세계의 공기에서 완전히 지워진 거예요."
세 사람은 마을 중심가로 걸음을 옮겼다. 낮인데도 거리는 어둑했다— 어둡다기보다는,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저 무채색의 밝음만 채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창문마다 걸린 등롱은 하나같이 속이 비어 있었고, 몇몇 집 앞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 흔한 화롯가 놀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냥 서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수연은 지나가던 좌판에서 파는 빵 하나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갓 구운 빵 특유의, 잡으면 손끝이 살짝 데워지는 그 온기가 전혀 없었다.
"…이거, 원래 이래?" 그녀가 좌판 주인에게 물었다.
"눌러 말린 빵입니다, 손님." 주인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우리 마을엔 굽는 화덕이 없어요. 다들 그냥 이렇게 눌러서 말린 걸 먹지요."
수연은 그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뭔가 결정적으로 빠진 맛이었다— 마치 소금이 빠진 국처럼, 있어야 할 무언가가 통째로 비어 있는 맛.
거리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낮은 대장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화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숫돌과 물레바퀴가 대신 놓여 있었고, 늙은 대장장이가 이미 만들어진 쇳덩이를 갈아 날을 세우는 중이었다. 두드려 벼리는 게 아니라, 그저 갈아내는 작업이었다.
"불 없이도 이런 게 됩니까?" 형사가 신기한 듯 물었다.
"녹이진 못하죠." 대장장이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그래서 우린 원석 그대로를 갈아 쓸 뿐이에요. 우리 집안이 육 대째 대장장이인데, 증조부님 때까진 이 자리에 화로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화로 자리에 이 숫돌을 놓았죠."
그의 손끝은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굳은살은 열기가 아니라 오로지 마찰로만 생긴 것이었다. 그는 손바닥의 굳은살을 엄지로 한번 쓸어보다가, 별다른 미련 없이 다시 숫돌에 쇳덩이를 문질렀다.
"아쉽지 않으세요?" 수연이 물었다.
"아쉬운 게 뭔지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그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본 적 없는 걸 그리워할 순 없으니까요."
밤이 가까워지자 거리 곳곳에 걸린 밧줄이 눈에 들어왔다. 집과 집 사이, 우물과 광장 사이를 잇는 그 밧줄에는 흰 조개껍데기 가루가 발려 있어, 달빛만으로도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등불 대신 손끝으로 더듬어 걷는 법을 이 세계는 통째로 발전시킨 모양이었다.
좌판 주인의 옆 가게는 여관이었다. 세 사람은 밤을 나기 위해 그 여관으로 들어섰고, 여관 주인 노파가 그들을 맞았다. 노파는 한쪽 다리를 절며 걸었는데, 그 걸음걸이엔 아주 오래전 사고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젊었을 때 산사태에 깔려 다리를 다쳤고, 그 뒤로 평생 이 여관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 말했다. 그녀의 손녀는 저 안쪽 방에서 담요를 몇 겹이나 두른 채 잠들어 있었다.
"방은 있는데, 데워드릴 순 없어요." 노파가 담요 몇 장을 내밀며 말했다. "여긴 원래 그런 거 없거든요."
"아, 불이라면 제가 피워드릴게요." 수연이 별생각 없이 방 한구석, 화덕이 있었을 법한 움푹한 돌 자리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무대에서 조명 대신 허공에 불꽃 백 송이를 띄우던, 숨 쉬는 것만큼 흔한 손짓이었다. 손끝에서 마나로 짠 주황빛 불덩이가 태어나 돌 위에 사뿐 얹혔다— 그리고 얹힌 그 자리에서, 한 번 깜빡일 새도 없이 꺼졌다. 다 탄 것도 아니고, 바람에 진 것도 아니었다. 세계가 그 불을 소리 없이 도로 들이마신 쪽에 가까웠다.
노파는 놀라지도 않고 담요만 마저 개켰다. "거 봐요, 손님. 여긴 원래 그런 거 없다니까요."
수연은 제 손끝을 잠깐 내려다봤다. 마나가 달린 게 아니었다. 술식이 어긋난 것도 아니었다. 이 세계 안에서는, 마나로 짠 '불'이라는 결과가 앉을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솜씨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무언가의 권한으로.
담요를 건네다 말고, 노파는 창밖 골목 쪽을 잠깐 내다봤다. 집집마다 문 앞의 낮은 돌 받침을 미리 물걸레로 닦아두는 손길들이 보였고, 골목 안쪽 어디선가는 아이를 서둘러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이 그 밤이거든요." 그녀가 지나가듯 흘렸다. "한 달에 한 번, 회수하러 오는 밤. 그래서 다들 낮부터 봉헌 준비를 하는 거예요. 내놓을 걸 미리 닦아두고, 해 지기 전에 애들을 들여보내고. 오늘 밤만 지나면— 또 한 달은 온 마을이 완전히 무사하죠."
그 말투가 너무 태연해서, 세 사람은 그 말이 품은 무게를 그 순간엔 미처 재지 못했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형사가 물었다. "겨울엔 특히 힘드실 텐데요."
노파는 담요를 개키던 손을 멈추고, 잠시 먼 곳을 보는 눈빛을 했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옛날엔 '따뜻하다'는 말이 있었다고. 지금은 그냥 옛날얘기예요. 나도 그게 뭔 느낌인지는 몰라요— 그냥 말로만 들었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근데 그거 아세요? 아무도 안 죽어요, 여기서는. 불에 데는 애도 없고, 불이 나서 집이 타는 일도 없고. 우리 손녀도, 저러다 열이 나도 최소한 불씨 옆에서 자다가 화재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죠."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대신 우리 딸은, 저 애를 낳다가 갔어요. 불로 끓여 소독할 물도, 몸을 덥힐 화로도 없었으니까. 그건 아무도 얘기 안 하려고 하는 쪽이에요. 안전한 세계라는 말 뒤에, 그런 것도 같이 있다는 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오래 받아들인 사람 특유의 담담함이 있을 뿐이었다. 수연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수연이 물었다. 스스로도 그 질문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였다.
노파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손녀가 자는 방 쪽을 한 번 돌아봤다.
"좋다는 말이, 이상하게 여기선 좀 헐거워요, 손님. 안전한 거랑 좋은 거랑, 여기 온 뒤로 계속 같은 말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더 캐묻지 않고 방을 나섰다. 수연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밤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집 밖으로 나와, 저마다 손에 든 작은 것들을 문 앞 낮은 돌 받침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성냥개비, 부싯돌 조각, 손끝만 한 초 토막— 마을에 남아 있던 발화의 흔적들이었다. 그것들을 올려놓는 손길엔 어떤 의식적인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저게 뭡니까?" 형사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봉헌 같아요." 레테가 답했다.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아주 미미한 불씨의 가능성들. 그걸 스스로 내놓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배워서."
수연은 그 광경을 보며 팔뚝을 문질렀다. 밤공기가 차가워서가 아니었다— 여관에서 받은 담요를 두르고 있어도, 그녀의 손끝은 조금도 데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심코 여관 문의 쇠 손잡이를 쥐어봤다. 낮에도, 지금도, 그 손잡이는 똑같은 냉기를 품고 있었다— 사람 손이 수백 번 스쳐 갔을 텐데도, 체온이 전혀 배어들지 않은 것처럼 서늘했다. 마치 이 세계의 모든 표면이, 누군가의 온기를 받아들이는 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화덕도 없고 모닥불도 없는 세계에서, 그녀의 몸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온기마저 이 세계의 공기 앞에서는 힘을 잃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곱은 손끝을 입김으로 데워보았다. 얼음의 힘을 다루는 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 손조차 이 세계의 냉랭함 앞에서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불이 없다는 게, 이렇게 사람 손끝까지 건드리는구나.'
그녀는 그 생각을 하며, 문득 라면가게의 화구 앞에 서 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국물이 끓어오를 때 얼굴에 확 끼치던 열기, 손등에 튄 국물 방울의 뜨거움, 늦은 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화구를 끌 때 남아 있던 잔열. 그 모든 사소한 열기들이,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엔 통째로 없었다.
봉헌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집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거리엔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적 위로, 붉은 달이 떠올랐다.
달은 핏빛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훨씬 낮게, 마치 하늘 자체가 그 무게에 짓눌린 것처럼 지평선 가까이 걸려 있었다. 그 붉은 원반을 등지고, 거대한 실루엣 하나가 서서히 마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날개였다. 활짝 펼치면 마을 하나를 통째로 덮을 것 같은 거대한 새의 형상— 그러나 그 날개는 온전하지 않았다. 오른쪽 날개는 깃털의 절반이 꺼져 있었다. 꺼졌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타서 사라진 게 아니라, 마치 심지가 다한 등불처럼 색을 잃고 잿빛으로 죽어 있었다. 그리고 왼쪽 날개에는, 청룡의 목에 감겨 있던 것과 닮은 금빛 사슬 문장이 뼈대를 따라 촘촘히 얽혀 있었다. 그 사슬은 날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옭아매듯, 날갯짓이 있을 때마다 표면에 희미한 빛의 파문을 일으켰다.
"주작이다." 레테가 숨을 낮춰 말했다. "문명과 빛의 수호자."
수연은 그 거대한 새가 가까워지는 걸 보며 숨을 죽였다. 붉은 달빛 아래, 주작의 몸통 곳곳에 남은 흔적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깃털이 통째로 뽑혀나간 자리, 날개뼈가 어긋난 각도로 굳어 있는 자리, 부리 끝에 남은 오래된 균열. 저항의 흔적이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생긴 상처가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붙잡히고 되풀이해서 저항한 끝에 남은 상처들.
"…쟤도, 청룡처럼 붙잡힌 거야?" 수연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레테가 답했다. "근데 저 새는 청룡보다 더 오래, 더 세게 저항한 것 같아요. 상처의 결이 달라요."
주작이 마을 위로 낮게 날아들었다. 그 거대한 날개가 한 번 크게 펄럭이자, 마을 어귀에 놓여 있던 봉헌물들— 성냥개비, 부싯돌, 초 토막— 이 일제히 빛을 잃고 스러졌다. 남아 있던 가능성의 불씨들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회수됐다.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수거였다— 정확하고, 사무적이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손길.
창문 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두려움보다 익숙함이 먼저 떠올라 있었다. 여관에서 노파가 담요를 건네며 지나가듯 흘린 말이 수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매달 한 번씩 반복되는 일이라고, 저 밤이 지나고 나면 마을은 또 한 달 동안 완전히 무사할 거라고 했었다. 수연은 그 익숙함이 두려움보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때, 골목 안쪽 작은 집에서 옅은 빛 하나가 새어 나왔다. 초 한 자루였다. 방 안에서 열이 오른 아이를 눕혀놓고, 젊은 어머니가 몰래 켜 둔 것이었다. 봉헌하지 않고 숨겨둔, 이 세계에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불씨.
주작의 고개가 그 빛 쪽으로 홱 꺾였다. 조종당하는 몸이 그 미약한 빛의 방향으로 정확하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문 앞에서 아이를 등 뒤로 감싸며 물러섰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골목 저편에서 지켜보던 몇몇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나서면 안 된다는 걸, 이 세계에 사는 이들은 오래전부터 몸으로 배워온 것 같았다.
"…멈춰!" 수연이 튀어 나가며 소리쳤다.
그녀가 앞을 막아서자, 주작의 거대한 눈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 눈은 짐승의 눈이라기엔 지나치게 맑았다— 청룡의 눈이 그랬듯, 이 눈에도 자신이 하는 짓을 원치 않는 자의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과는 별개로, 몸은 이미 회수의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부리 사이로 서늘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우기 위한 열이 아니라, 꺼뜨리기 위한 빛.
수연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후드 깊숙이 손을 넣었다. 그 안에는 오래전부터 품고 다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빛이 들어온 적 없는, 작은 드론 하나. 손바닥만 한 크기에, 겉면은 이미 색이 바래 무슨 도료였는지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떠나던 날, 이리스는 그걸 그녀의 손에 꾹 쥐여주며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었다— "이거 실패작인데, 그냥 가져가. 왠지 버리기 싫더라고." 그때는 그냥 낡은 부적 하나 받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말의 무게가 손바닥 위에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한 번도 켜진 적 없는, 실패한 별.
그녀는 그 꺼진 드론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작을 향해 똑바로 들어 보였다.
"빛 담당한테 빛을 보여주라던데."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엔 도발과 확신이 함께 섞여 있었다. "너, 문명이랑 빛의 수호자라며. 그럼 이것도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주작의 부리 사이에 모여 있던 서늘한 빛이, 한순간 멈칫했다. 조종의 명령과, 그 명령 밑에 눌려 있던 무언가가— 아주 잠깐, 서로 부딪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멈칫함은 길게 가지 않았다. 부리 사이의 빛이 다시 응축되기 시작했고, 이번엔 그 크기가 훨씬 커졌다.
"…형사, 레테." 수연이 낮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주작에게 고정한 채였다. "사람들부터 대피시켜."
"알겠습니다." 형사가 즉시 몸을 돌려 골목 안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다들 지하나 안쪽 방으로! 서두르세요!"
레테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팔을 잡아 이끌며,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이쪽으로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벽에 붙어 계세요."
수연은 꺼진 드론을 다시 후드 깊숙이 갈무리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부리 사이에서 모여드는 그 서늘한 빛이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밝음은 조금도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볼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종류의 빛이었다.
'…저건, 뭔가 잘못됐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낮췄다. 붉은 달 아래, 반쯤 꺼진 날개를 늘어뜨린 채, 문명과 빛의 수호자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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