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38화. 청룡전
전날 밤의 다짐을 되새기며, 수연은 새벽빛이 채 가시지 않은 들판 한가운데 섰다. 그녀는 검을 뽑아 하늘을 향해 겨눴다.
"…나와."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며, 검끝에 얼음의 기운을 모았다.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 기둥이 땅에서 솟아올라,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들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번엔 얼음 검술 뒤에 숨지 않기로 결심한 채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늘 이 얼음의 힘으로 위기를 넘겨왔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그 얼음 기둥이 단지 도발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진짜 싸움은 그다음에 시작될 것이었다.
하늘이 응답했다.
먼 구름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짙은 먹구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구름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며,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통이 드러났다. 비늘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고, 그 비늘 사이로 푸른 이끼 같은 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용의 수염이 마치 강줄기처럼 구불구불 흘러내리며, 그 끝에서 물방울이 아니라 희미한 안개가 뚝뚝 떨어졌다.
산맥 하나를 통째로 감을 만한 크기의 용이, 구름을 찢으며 천천히 하강했다. 그 거대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 자체가 무겁게 출렁였고, 멀리 있는 수연에게까지 서늘한 습기가 훅 끼쳐왔다.
"…저게 청룡이구나." 수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 크기 앞에서, 잠시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그 어떤 것도 이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쫄지 마. 어제 다짐했잖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며, 자신의 손끝에 남은 그 낯선 감각— 언젠가 세계를 무너뜨렸던 그 힘의 잔향— 을 가만히 느껴봤다. 아직은 쓸 때가 아니었다. 먼저는 이 검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형사와 레테는 이미 마을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늘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모두 집 안으로!" 형사가 소리쳤다. "지붕 밑이 그나마 안전합니다!"
레테는 마을 사람들의 손을 잡아 이끌며, 낮은 헛간 쪽으로 안내했다.
"서두르세요! 저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여러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한 노파가 헛간으로 향하다 말고, 겁에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형사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어르신, 지금은 움직이셔야 합니다."
"…저게, 저게 대체 뭐요?"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일행입니다." 형사가 침착하게 답했다. "저 위에 있는 사람이 저 용을 도와주러 온 겁니다. 걱정 마시고, 지금은 안으로 들어가시죠."
노파는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형사의 단호한 손짓에 결국 걸음을 옮겼다. 레테는 그 뒤에서 남은 아이들 몇을 한꺼번에 품에 안다시피 하며 헛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 됐습니다!" 헛간 문이 닫히자 형사가 외쳤다. "이제 위를 봐도 좋습니다, 수연 씨!"
그의 목소리는 수연에게까지 닿지 않았지만, 그는 습관처럼 그렇게 외쳤다— 마치 그 말이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전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그 순간, 형사는 문득 수첩의 밑줄 친 기록을 떠올렸다. 옛 이름. 세레스티아를 멈춰 세웠던 그 방법.
"레테 씨!"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다급히 물었다. "저 용의 옛 이름을 아십니까? 세레스티아 때처럼— 이름을 부르면 닿을지도 모릅니다!"
레테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수호자의 옛 이름은, 같은 수호자만 알아요. 루체모라라는 이름도, 비아 씨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부를 수 있었던 겁니다. 근데 지금 여기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군요." 형사가 낮게 말을 받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승리 공식은,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곁에 있어야만 성립하는 공식이었다는 것을. 그는 수첩 귀퉁이에 짧게 적어 넣었다. 다음 원정 전에, 비아에게 나머지 이름들을 물어둘 것. 그러나 지금 이 하늘 아래에서는— 결국 수연의 방식뿐이었다.
청룡의 첫 숨결이 들판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불도 얼음도 아닌, 옅은 푸른 안개였다. 그 안개는 닿는 순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스치는 곳마다 이상한 정적을 남겼다— 풀이 자라던 속도가 뚝 멈췄고, 날아가던 새들이 허공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으며, 들판 위를 흘러가던 비구름 한 무리가 통째로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죽고, 구름의 그림자마저 땅에 못 박혔다. 새 몇 마리가 아니라, 날씨 하나가 통째로 숨을 참고 있었다.
수연은 안개를 피해 크게 물러서며, 먼저 땅을 두드렸다. 들판이 통째로 융기하듯, 탑만 한 얼음 첨주 수십 개가 청룡의 하강 경로를 우리처럼 에워싸며 솟구쳤다. 그러나 청룡은 몸통을 한 번 뒤채는 것만으로 그 우리를 서리 털어내듯 부숴버렸고, 첨주의 잔해가 들판 위로 눈보라처럼 쏟아졌다.
'…꼬챙이 가지곤 어림없네.'
이번엔 하늘을 열었다. 구름 위에서 붉게 달아오른 바위 세 덩이가 꼬리를 끌며 낙하했다 — 무대가 아니라 전장에 떨어뜨리는, 진짜 운석이었다.
청룡이 고개를 들고, 울었다.
포효는 소리가 아니라 벽이었다. 충격파가 하늘을 한 겹 벗겨내듯 퍼져나가 운석 세 덩이를 공중에서 모조리 부숴 흩었고, 그 여파만으로 저편의 낮은 능선 하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불티 섞인 잔해가 들판에 우박처럼 박혔다.
"…그럼 이건 어때."
그녀가 두 손을 교차시키자 들판의 습기가 통째로 끌려 올라가, 하늘 절반을 가리는 빙설 폭풍이 청룡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나 청룡은 그 순백의 벽을, 물고기가 안개를 가르듯 유유히 헤엄쳐 지나왔다. 비늘 위에 서리 한 겹 얹히지 않았다.
이어서 얼음 창 백 발을 한 호흡에 퍼부었다. 전부 비늘 한 장에 막혔다 — 종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만 백 번 겹쳐 울렸을 뿐이었다.
빛도 부어봤다. 사방 허공에서 광선 수십 줄기가 일제히 켜져 청룡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일순 들판이 공연장처럼 환해졌다. 그러나 청룡은 그 빛기둥들 사이를, 물속에 비껴든 햇살 사이를 지나듯 느긋하게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이 덩치한테 포격은 소용없네." 그녀가 낮게 내뱉었다. "그럼 직접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가장 무거운 마법이 전부 무위로 돌아간 순간,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 파고드는 것. 수연은 얼음 발판을 연달아 만들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발판이 부서지기 직전에 다음 발판을 밟는 식으로, 그녀는 안개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청룡의 옆구리 쪽으로 접근했다.
"…크네, 진짜."
그녀가 그 거대한 몸집을 눈앞에서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도 압도적인 크기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발판을 밟아 도약했다.
청룡의 발톱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산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법한 그 일격을, 수연은 발판을 연쇄적으로 부수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발톱이 스친 자리의 구름이 통째로 갈라지며, 그 틈으로 아침 햇살이 순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그 빛을 등지고, 다시 다음 발판을 밟았다.
"…한 번만 스쳐도 끝이겠는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압도적인 위협감이, 그녀의 감각을 더 날카롭게 벼려주는 것 같았다.
청룡의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수연은 그 궤적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발판 하나를 더 만들어 몸을 뒤틀었다. 꼬리가 지나간 자리의 구름 둑이 두 쪽으로 쪼개졌고, 그 아래 낮은 언덕 하나가 능선째 갈라져 내렸다. 그 여파만으로도 그녀의 몸이 휘청였다.
"…한 대라도 맞으면 안 되겠다, 이거."
그녀는 다시 자세를 잡고, 이번엔 청룡의 등 쪽을 향해 달렸다. 거대한 비늘들이 계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비늘을 하나씩 딛으며, 점점 청룡의 목덜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청룡도 가만있지 않았다. 등줄기를 따라 날카로운 돌기들이 솟아오르며, 그녀의 발판이 자리 잡을 틈을 없애려 했다. 수연은 그 돌기들 사이를 곡예하듯 뛰어넘으며, 검으로 균형을 잡았다. 한 번은 발판이 미처 다 굳기도 전에 딛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잠시 허공에서 휘청했다— 그녀는 그 찰나에 검을 비늘 틈에 박아 넣어 겨우 몸을 지탱했다.
청룡의 거대한 눈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 눈동자는 짐승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맑고 슬퍼 보였다— 마치 자신이 하는 짓을 스스로도 원치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이 그녀를 인식하자마자, 청룡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이번엔 몸통 전체를 뒤틀어 그녀를 떨어뜨리려는 몸짓이었다.
수연은 비늘을 붙잡고 버텼다. 손끝이 미끄러질 뻔했지만, 얼음의 힘으로 손바닥에 서리를 만들어 마찰력을 높였다. 그렇게 몇 번의 요동을 버텨내며,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목덜미 쪽으로 기어올랐다.
청룡이 그녀의 접근을 눈치챈 듯, 다시 한번 안개 숨결을 내뿜었다. 이번엔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수연은 발판을 밟을 틈도 없이, 그대로 몸을 굴려 비늘 틈새로 몸을 숨겼다. 안개가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스친 부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스치기만 해도 이 정도구나.'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비늘을 딛고 다시 목덜미 쪽으로 달렸다.
지상에서는, 형사가 헛간 지붕 위로 튄 안개 자락을 발견하고 다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안개가 스친 지붕의 짚단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레테 씨! 지붕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레테가 즉시 달려와, 자신의 병 하나를 꺼내 짚단 위에 흩뿌렸다. 오랫동안 그녀가 지녀온 기록의 힘이 옅게 빛나며, 얼어붙은 부분의 시간을 살짝 되돌렸다— 완전히 원상복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붕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는 버텨줬다.
"…이 정도면 될 겁니다." 그녀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헛간 안에서 아까 그 노파가 갈라진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 괜찮은 거요?"
형사는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연의 작은 실루엣이 거대한 용의 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
"괜찮으실 겁니다. 지금까지 늘 그러셨으니까요."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린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청룡의 목덜미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것을 발견했다.
금빛으로 빛나는 사슬이, 청룡의 목을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사슬의 표면에는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촘촘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그 무늬 사이사이로 희미한 문자들이 흐릿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글자들은 너무 빨리 움직여서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사슬 전체가 마치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통째로 압축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찾았다, 목줄."
그녀가 그 사슬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사슬에 손이 닿는 순간, 서늘한 냉기와 함께 낯선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아주 오래된 나무의 껍질을 만지는 것 같은, 거칠고도 단단한 질감이었다.
청룡이 그 손길을 느낀 듯, 갑자기 몸을 크게 뒤틀었다. 수연은 그 반동에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비늘 사이에 검을 깊이 박아 몸을 고정했다.
"…쉽게는 안 되겠네."
그녀가 이를 악물며 다시 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청룡의 거대한 몸이 하늘을 뒤흔들며 저항했고, 그 여파로 주변의 구름이 소용돌이치듯 휘말렸다.
그녀는 사슬을 움켜쥔 채, 잠시 그 무늬를 눈앞에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나이테 같은 무늬 하나하나가, 마치 이 존재가 살아온 아주 긴 시간을 압축해놓은 것 같았다. 그 무늬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적개심보다 다른 감정이 앞섰다.
'…얘도, 뭔가를 오래 쌓아온 존재구나.'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지금은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이 사슬을 끊어야, 이 거대한 존재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슬은 손끝의 힘만으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그냥 검으로는 안 되겠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 정말로, 어제 다짐했던 그 힘을 꺼내야 할 순간이었다.
청룡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며, 그녀를 떨어뜨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 요동 속에서, 수연은 문득 어젯밤 레테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이 힘을 쥐는 이유부터가 다르다고.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손끝을 조금 덜 떨리게 만들어줬다.
그녀는 사슬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무섭지 않다고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이번엔 그 무서움에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간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자신의 손끝에 그 오래 눌러둔 감각을 다시 불러왔다. 그 순간, 청룡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그 몸부림에 세계 전체가 반응했다. 들판의 밀이 순식간에 이삭을 맺더니, 다음 순간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엔 잎이 붉게 물들며 우수수 떨어졌고, 이내 온 들판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 눈 밑에서 다시 푸른 새싹이 돋아났다.
나무들도 그 흐름을 따라 미친 듯이 변해갔다— 앙상한 가지에서 꽃봉오리가 터지듯 피어나고, 그 꽃이 지기도 전에 무성한 초록 잎으로 뒤덮이더니, 다음 순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가 통째로 떨어져 썩어갔다. 그 나무의 나이테가 마치 압축된 세월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늘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하늘의 색조차 그 흐름에 맞춰 널뛰었다— 봄의 연한 하늘빛에서 여름의 짙은 푸른빛으로, 가을의 붉은 노을빛으로, 겨울의 창백한 잿빛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초 사이에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형사와 레테는 헛간 처마 밑에서 그 광경을 아연한 얼굴로 지켜봤다. 헛간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 빗물처럼 흘러내리다가, 다음 순간 다시 서리로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계절이, 통째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형사가 중얼거렸다.
"청룡이 저항하고 있는 거예요." 레테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기 안의 계절을 붙잡은 실이 흔들리니까, 그 힘이 통제 없이 새어 나오는 겁니다."
헛간 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파가 낮게 탄식했다.
"…내 평생 이런 건 처음 보네."
"곧 끝날 겁니다." 형사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그 압도적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수연은 그 계절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사슬을 붙잡은 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청룡의 거대한 몸이 사방으로 뒤틀리며 그녀를 떨쳐내려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놔줄 생각 없어."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며, 마침내 오래 눌러둔 그 감각을 완전히 풀어놓았다.
원인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이끄는 힘.
그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그 힘은, 지금까지 그녀가 써온 어떤 얼음의 기술과도 달랐다. 얼음은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었다— 냉기를 모으고, 형태를 잡고, 단단하게 굳히는 절차. 그러나 지금 그녀가 부르는 힘에는 그런 절차가 없었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결과가—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에 성립됐다.
그 힘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오래전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스쳤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던 그 순간에도, 이렇게 아무 절차 없이 결과만 존재했었다. 원인도 없이, 경고도 없이, 그저 무너진 세계라는 결과만 남았던 그 밤. 그녀는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는 걸 느끼며, 잠시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억에 붙잡히지 않기로 했다. 그때와 지금은, 이 힘을 쥐는 손의 목적이 달랐다. 그때는 무너지는 쪽이었고, 지금은 지키려는 쪽이었다. 그녀는 그 차이를 붙잡고, 다시 앞을 향했다.
**실이 끊어진 상태.**
그녀는 그 결과를 강제로 세계에 새겨 넣었다.
그 순간, 그녀의 귓속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손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마비됐고, 시야 한쪽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치 세계의 법칙을 억지로 비틀어 연 대가를, 그녀의 몸이 대신 치르는 것 같았다. 팔 전체가 저릿하게 마비되며, 무릎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래." 그녀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나 이거 쓸 줄 알아. 그때 그렇게 부쉈으니까— 이번엔 내가 원하는 걸 부순다."
금빛 사슬이, 나이테 무늬를 따라 쩍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서 오래 눌려 있던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사슬 전체가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청룡의 몸이 순간적으로 축 늘어졌다. 붙잡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거대한 몸이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수연은 재빨리 검을 휘둘러, 청룡의 추락 경로를 따라 연달아 거대한 얼음 슬로프를 만들어냈다. 청룡의 무게가 그 슬로프 위로 미끄러지며,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다. 슬로프가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수연은 다음 슬로프를 이어 붙였고, 마침내 청룡의 거대한 몸이 들판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먼지와 눈보라가 자욱하게 일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형사와 레테는 그 모든 광경을— 수연의 손끝에서 일어난 그 이상한 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형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가 알아온 수연의 힘은 얼음이었다. 그러나 방금 본 것은, 그 얼음과는 전혀 다른 결의 것이었다— 절차도 논리도 없이, 그저 결과가 그 자리에 있었다.
'…저게, 어제 말씀하시던 그 힘이구나.'
그는 그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레테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수연을 향해 달려갔다.
수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청룡의 거대한 머리 앞에 내려섰다. 손끝이 아직도 저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청룡의 감긴 눈이, 서서히 뜨였다.
"…고맙다, 신살의 아이야."
그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같았다.
"그러나 서둘러라." 청룡이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홉 중 가장 어린 축이다. 위로 갈수록, 실은 굵어진다."
"…괜찮아?" 수연이 물었다.
"괜찮다." 청룡이 나직이 답했다. "오랜만에, 내 계절을 내가 정할 수 있게 됐으니까."
청룡은 그렇게 말하며, 거대한 몸을 서서히 하늘로 띄웠다. 그 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얼어붙어 있던 세계의 계절이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성급하게 휘몰아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엔 자연스러운 속도로, 봄이 천천히 이 세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세계에 봄을 돌려주고 있어." 레테가 그 광경을 보며 낮게 말했다.
청룡은 마지막으로 수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살의 아이야. 네가 가는 길에, 아직 많은 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은, 내 것이 아니게 됐구나."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서서히 눈을 감으며 긴 잠에 빠져들었다. 산맥처럼 거대한 몸이 들판 한쪽에 고요히 잠들었고, 그 위로 새로 돋아난 봄풀이 조용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형사와 레테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형사가 물었다.
수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근데 이거, 쓸 때마다 이럴 것 같아."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레테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줬다.
"처음이니까 더 그럴 겁니다. 몸이 아직 이 힘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익숙해지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 수연이 나직이 말했다.
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데?"
"방금 그 힘을 쓰시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수연은 잠시 침묵하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옛날 생각. 내가 이거 처음 썼을 때 생각."
형사와 레테는 그 말에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형사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 그 힘으로, 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줬다.
"…응. 근데— 오늘은, 해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청룡을 돌아봤다. 그 거대한 몸 위로, 새로 돋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원정대의 첫 해방 전과였다.
"…다음은 어디로 가?" 그녀가 물었다.
"후드를 봐야죠." 형사가 답했다.
수연은 후드를 매만졌다. 온기가 다시 한번, 낯선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자."
세 사람은 잠든 청룡을 뒤로하고, 다시 낯선 지평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야영지에 불을 피운 뒤에도 수연의 손끝은 완전히 감각을 되찾지 못했다. 그녀는 모닥불 앞에 앉아, 저릿한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형사가 그 옆에 조용히 담요를 건넸다.
"오늘은 일찍 쉬시죠."
"…응, 그럴게." 그녀가 담요를 받으며 답했다.
레테가 모닥불 건너편에서 조용히 말했다.
"오늘 그 힘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건 파괴의 힘이 아니라, 그냥 결과를 만드는 힘이에요. 그 결과가 파괴였던 적이 있었을 뿐이지."
"…그게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수연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레테가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모닥불에서 드린 말, 기억하시죠. 오늘 당신은 그 말을 몸으로 증명하신 거예요. 실을 끊는 것도 분명 파괴였지만— 그 파괴가, 한 존재를 자유롭게 했으니까요."
수연은 그 말을 담요 속에서 오래 곱씹었다. 모닥불의 불씨가 낮게 타닥거렸다. 저 멀리 잠든 청룡의 실루엣이, 어스름한 능선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내일도 또 만나겠지, 다른 신을."
"그럴 겁니다." 형사가 답했다.
"그럼 또 써야겠네, 이거."
"그러시겠죠."
수연은 자신의 손을 한 번 더 내려다보다가, 담요를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오늘은 잘한 것 같아."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낯선 하늘 아래에서 첫 번째 승리의 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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