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37화. 봄이 오지 않는 세계
두 번째 세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그들을 맞이한 것은 냄새였다.
젖은 흙냄새도, 풀 냄새도 없었다. 그저 차갑고 메마른 공기만이 감돌았다. 겨울이었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겨울이 아니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겨울이었다.
들판에는 밀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밀은 싹튼 채로 멈춰 있었다. 초록빛 새싹이 땅 위로 겨우 고개를 내민 채, 더 자라지도 시들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수연이 손끝으로 그 새싹을 살짝 건드려봤다. 살아 있는 감촉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시간이 그 안에서만 멈춰버린 것 같은 이상한 질감이었다.
"…씨앗이 안 자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레테가 그 새싹을 유심히 살폈다.
"성장이 멈췄어요. 죽은 게 아니라— 그냥,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는 겁니다."
길을 따라 걷던 중, 그들은 마당에서 작은 강아지를 씻기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강아지의 몸에 비누 거품을 정성껏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자세히 보니 이상하리만치 작았다. 갓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한 크기였다.
"…얘, 몇 살이야?"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고 밝게 웃었다.
"세 살이요!"
"근데 왜 이렇게 작아?"
"원래 이래요." 아이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얘는 안 커요. 저도 안 커요."
그 말에 수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나이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앳된 얼굴이었다. 세 살짜리 강아지를 씻기는 그 아이 역시, 몇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얼굴이었다.
"저는 매일 얘를 씻겨줘요." 아이가 다시 강아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얘는 안 자라니까, 대신 제가 매일 깨끗하게 해줘야 해요. 그게 제 일이에요."
그 말을 하는 아이의 표정에는 슬픔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복된 일과에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순수한 표정이, 오히려 형사와 레테, 수연 모두를 더 오싹하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는?"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아이가 손가락으로 마당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엔 한 부부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정확히 같은 순서로,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옷을 걸고 있었다.
"엄마 아빠도 나만큼만 컸어요?" 수연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가 되물었다. "엄마 아빠는 어른이잖아요. 어른은 원래 그 모습이에요. 저는 애고요. 저는 원래 이 모습이고요."
그 대답에는 아무 의문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사실을 말하듯, 아이는 담담했다. 수연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어딘가 잘못됐다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이 정지된 세계의 가장 깊은 증상이었다.
마을 광장에 다다르자, 노부부 한 쌍이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나와, 우물가에 앉은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여보, 오늘도 나오셨구려."
"그러게요, 여보. 오늘도 날이 좋네요."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에 앉으며, 정확히 같은 손짓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봤다. 그 모습은 언뜻 다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수연이 다시 그 광장을 지날 때, 두 사람은 정확히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인사의 순간에서 통째로 얼어붙어, 계속 같은 장면만 재생되는 것 같았다.
"…저 두 분, 아까랑 똑같아." 수연이 말했다.
"매일 저러실 겁니다." 형사가 답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인사를. 아마 수십 년째 저렇게 하고 계실 겁니다."
광장 한쪽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이었지만, 반복해서 들으니 그 노래에는 새로운 가사가 없었다. 매번 같은 소절이, 같은 화음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새로운 노래는 없어요?" 레테가 지나가는 한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노래요? 그게 뭔가요?"
"…지금까지 없던 노래요. 새로 만든 노래."
"노래는 원래 이거예요." 여인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희는 이 노래를 아주 오랫동안 불러왔어요. 참 좋은 노래죠. 안전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변하니까."
그 대답이 오히려 세 사람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개념 자체가, 이 마을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빈자리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반복만이 남아 있었다. 같은 노래, 같은 인사, 같은 손짓. 그것들은 저마다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은 완전히 정지된 아름다움이었다.
레테가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들은 불행하지 않아요. 오히려 평온해 보여요. 근데— 뭔가가 결정적으로 비어 있어요."
"뭐가요?" 수연이 물었다.
"다음이요." 레테가 답했다. "이 사람들에게는 다음이 없어요. 오늘의 노래가 내일은 어떻게 달라질지, 오늘의 인사가 내일은 어떤 말로 바뀔지— 그런 게 없어요. 그냥 오늘이 계속되는 거예요."
골목 하나를 꺾어 들자, 어느 집 열린 창 너머로 하얀 것이 얼핏 보였다.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였다. 소맷단의 자수까지 다 놓인, 그러나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티가 나는— 구김 하나, 먼지 한 톨 없이 반듯한 혼례복이었다.
마당에서는 젊은 여자가 그 창을 등지고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화단의 꽃봉오리들은 하나같이 벌어지기 직전의 모양에서 멈춰 있었다. 물을 매일 주는 듯 흙은 촉촉했지만, 봉오리는 어제의 봉오리 그대로일 것이었다. 수연의 시선이 창문에 머무는 걸 알아챈 여자가 손을 멈추고 웃었다.
"제 혼례복이에요. 예쁘죠? 매일 아침 먼지를 털어요. 털 것도 없는데, 그래도 털어요. 하루 중에 그 시간이 제일 좋거든요."
"…결혼식이 언젠데?" 수연이 물었다.
"꽃이 피면요." 여자가 물조리개 끝으로 화단을 가리켰다. "그이가 어릴 때부터 이 집 담 너머로 꽃을 훔쳐 가던 사람이라, 청혼도 여기서 했어요. 이 화단에 첫 꽃이 피는 날 식을 올리자고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레테가 물었다.
여자는 그 질문에 처음으로 손끝을 멈췄다. 무언가를 세어보려는 듯 허공을 잠시 짚다가, 이내 세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글쎄요. 근데 괜찮아요. 드레스는 안 낡으니까요. 저도 안 낡고요. 꽃도 도망 안 가고, 그이도 그대로예요. 기다리는 게 하나도 안 무서워요. 이 마을에선 아무것도 늦지 않거든요."
돌아 나오는 길에 수연은 한 번 더 그 창을 돌아봤다. 정성껏 손질된, 그러나 영원히 입혀지지 않을 하얀 드레스. 아무것도 늦지 않는다는 말은 이 마을에서 축복처럼 쓰이고 있었지만, 뒤집으면 그 말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 드레스는 낡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매일 아침 같은 손길에 닦이며 같은 자리에 걸려 있을 것이었다. 백 번의 아침이 지나도, 천 번의 아침이 지나도.
방앗간 앞을 지나던 중, 그들은 한 남자가 밀을 빻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맷돌 안의 밀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빻히다 만 채로 있었다— 가루가 되지도, 낟알로 남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이 밀가루로 빵을 만드시나요?" 레테가 물었다.
"그럼요." 남자가 맷돌을 계속 돌리며 답했다. "매일 이만큼씩 빻아서, 매일 같은 빵을 굽죠. 저는 이 일이 좋아요. 매일 똑같으니까, 실수할 일이 없거든요."
"실수하고 싶으신 적은 없으세요?"
남자가 처음으로 손을 멈추고 레테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 아주 잠깐, 낯선 표정이 스쳤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질문을 다시 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글쎄요." 그가 다시 맷돌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요. 실수라는 게, 정확히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하고요."
그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균열은 이미 닫혀버린 뒤였다.
형사가 수첩을 꺼내 몇 줄을 적었다. 그러다 문득 펜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사이로, 무언가 푸른 기운이 스치는 게 보였다. 아주 잠깐, 거대한 비늘 같은 것이 구름 틈으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저게 뭡니까." 형사가 물었다.
수연이 후드를 매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드의 온기가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해져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어."
형사는 그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수첩을 덮었다.
"성장은 위험의 다른 이름이었군요." 그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지워진 겁니다. 자란다는 건— 변한다는 거고, 변한다는 건 늘 어떤 위험을 동반하니까요. 넘어지고, 아프고, 실패할 위험. 이 마을은 그 위험을 통째로 없애버린 겁니다. 그 대가로— 다음을 잃었고요."
그날 밤, 세 사람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저녁은 마을에서 얻어 온 빵과 말린 고기였다. 빵은 그 방앗간의 밀로 구운 것이라 했다. 맛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씹을수록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어제 먹었어도, 십 년 뒤에 먹어도, 정확히 이 맛일 거라는 확신. 수연은 반쯤 먹다 만 빵을 무릎에 내려놓고, 모닥불 너머의 어두운 하늘만 바라봤다. 낮에 스쳐 간 푸른 비늘의 잔상이 아직 구름 뒤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형사는 그 침묵을 잠시 지켜봤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자기 몫의 말린 고기 한 조각을 그녀의 빵 위에 얹어놓았다. "드셔두시죠. 내일은 오늘보다 긴 하루가 될 겁니다." 그러고는 수첩을 꺼내 오늘 본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캐묻지 않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필요한 말이 있다면, 상대가 스스로 꺼낼 때까지 수첩만 넘기는 것.
레테는 모닥불에 잔가지를 하나씩 얹으며, 불이 그것을 삼켜 재로 만드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네요. 뭔가가 변해서 없어지는 거." 그녀가 타들어가는 가지 끝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적어도 이 불은 아직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돼요." 그 말이 수연에게 건네는 것인지 혼잣말인지는, 어느 쪽으로도 들리도록 놓아둔 말이었다.
수연은 대답 대신 빵 위의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두 사람 다 그녀의 침묵의 정체를 캐묻지 않았고, 그 배려는 고마운 만큼— 조금 무거웠다.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형사와 레테가 먼저 잠자리에 든 뒤, 수연은 홀로 모닥불 앞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숫돌에 검날을 문지르는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손길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낮에 본 그 푸른 기운— 청룡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그녀는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검날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얼음의 결이 완벽하게 서 있었다. 지금까지 이 검으로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다. 그러나 오늘 낮 그 하늘의 기운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확신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걸론 안 될 것 같아.'
그녀는 검을 손에 쥔 채, 그 확신의 정체를 곱씹었다. 청룡은 세계 하나의 계절을 통째로 얼려버린 존재였다. 산맥을 감을 만큼 거대한 몸집, 세계의 법칙 그 자체를 다루는 힘. 그런 존재를 상대로, 그녀가 지금까지 익혀온 얼음 검술이 얼마나 통할지— 그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확신의 끝에서, 오래 눌러둔 감각 하나가 스쳤다.
손끝이 저릿했다. 아주 오래전, 다른 세계에서— 그녀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된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던 그 감각. 원인도, 과정도 없이, 그저 결과만이 세계를 통째로 무너뜨리던 그 순간. 그녀는 그 기억을 지금까지 애써 마주하지 않으려 해왔다.
그 저릿함 위로, 이 손이 그동안 새로 익힌 감촉들이 겹쳐 떠올랐다. 첫 겨울에 눈을 뭉치던 뽀득거림. 라면사장이 처음 쥐여주던 국자의, 물기 마른 나무 손잡이의 결. 파빌라가 젓가락질을 배우다 미끄러져 그녀의 손등을 짚었을 때의, 작고 뜨거운 손바닥. 그리고 며칠 전,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던 비아의 손— 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하던 그 악력까지.
그보다 훨씬 전의 감촉을, 이 손은 끝내 지우지 못했다. 형태가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유리가 금 가기 직전, 손바닥으로 전해지던 팽팽한 진동 같은 것. 쥐고 있던 것이 어느 순간 쥐어지지 않게 되는, 손가락 사이가 갑자기 텅 비어버리는 감각 같은 것. 그 감각을 기억하는 손으로, 그녀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세게 쥐는 법을 잊고 살았다.
노바 니발리스에서 다시 배운 건 검술만이 아니었다. 그릇을 두 손으로 받치는 힘의 세기. 반죽을 누르되 터뜨리지 않는 손바닥의 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머리칼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만 얹는 손끝. 부수지 않고 쥐는 법을, 이 손은 몇 번의 계절에 걸쳐 처음부터 다시 익혀왔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손으로— 세계 하나를 비워버린 그 힘을 다시 쥐어야 할지도 몰랐다.
"…또, 그거 써야 되나."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모닥불의 불씨가 그녀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섭다고 말하는 순간, 그 두려움이 진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대신, 검을 고쳐 쥐었다. 손끝의 떨림을 검자루의 단단한 감촉으로 대신 눌렀다.
'…무서워해도 돼. 근데 그거 때문에 안 쓸 순 없어.'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검날을 다시 한번 숫돌에 문질렀다.
레테가 그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조용히 다가와 그녀 옆에 앉았다.
"…아직 안 주무세요?"
"어. 좀." 수연이 숫돌질을 멈추지 않은 채 답했다.
레테는 잠시 모닥불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낮에 하늘을 보신 뒤로, 표정이 계속 안 좋으세요."
수연은 그 말에 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 낮게 입을 열었다.
"…나, 원래 다른 힘이 있어. 검술 말고. 근데 그건— 예전에 내가 살던 세계를 통째로 부숴버린 힘이야."
레테는 그 말에 놀라지 않고, 그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청룡이 얼마나 강한지, 나도 감이 안 와. 근데 이 검술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자꾸 들어. 그럼 결국— 그 힘을 다시 써야 하는데. 나는 그게, 무서워."
"무서운 게 당연합니다." 레테가 나직이 말했다. "그 힘으로 뭔가를 잃어보셨다면요."
"…그거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 수연이 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약 내가 그 힘을 다시 써서, 또 뭔가를 부수면 어떡하지. 이번엔 지키려고 쓰는 건데, 그 결과가 또 잘못되면 어떡하지."
레테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그건 아무도 미리 답해드릴 수 없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때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그 힘을 쥐는 이유부터가 다릅니다. 그때는 무너지는 쪽이었고, 지금은 지키려는 쪽이시잖아요. 같은 힘이라도, 쥔 손의 목적이 다르면 다른 결과를 냅니다."
수연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손끝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고마워." 그녀가 낮게 말했다.
레테는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도 걸어야 하니, 조금은 주무세요."
그녀가 다시 잠자리로 돌아간 뒤, 수연은 홀로 남아 검날을 다시 한번 숫돌에 문질렀다. 그 소리가 낯선 밤하늘 아래, 오래도록 낮게 이어졌다.
멀리서, 청룡의 기척이 다시 한번 하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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