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23화. 빈 껍질의 상인
수연이 소므니움을 다시 마주친 건, 눈꽃시장 골목에서였다.
그날 아침, 가게는 여느 때처럼 분주하게 하루를 열었다. 형사가 재고를 확인하다가, 대파와 계란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발견했다.
"수연 씨, 죄송한데 시장 좀 다녀오시겠습니까."
"내가요?"
"제가 지금 국물을 올려야 해서요. 대파, 계란, 그리고 식초 한 병만 부탁드립니다."
"식초는 왜요?"
"반숙 계란 삶을 때 넣으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그분한테 배운 겁니다."
수연은 그 대답에 피식 웃었다. 형사는 여전히,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그분"에게 배운 것으로 설명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버릇을, 수연은 이상하게 싫어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갔다 올게요."
그렇게 나선, 평범한 심부름 길이었다.
골목은 평소처럼 시끌벅적했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 눈을 터는 손님들의 발소리, 어디선가 풍기는 군밤 냄새. 그 익숙한 소음 사이로,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유독 고요하게 서 있었다.
정중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 뒤로 넘긴 머리칼, 어깨에 쌓인 눈. 예전에 이 도시를 떠돌며 사람들에게 "선택하지 않은 미래"를 팔던 그 상인이었다.
그녀 곁에는 작은 좌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예전에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좌판 위에는 아무 상품도 없었다 — 그저 빈 나무 판자 하나가, 눈을 맞으며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마치 팔 것이 없어진 상인이, 그래도 습관처럼 좌판만 펴놓은 것처럼.
수연은 걸음을 멈췄다.
"…소므니움?"
그녀가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소므니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수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눈이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색도, 모양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던 것 — 호기심, 장난기, 때로는 슬픔이 섞인 그 복잡한 눈빛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지금 그 눈에 담긴 건, 인형의 유리알 같은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소므니움이 말했다. 목소리의 억양은 예전과 똑같았다. 정중하고, 나긋하고, 약간의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톤. 그런데 그 톤 안에 담긴 내용물이 없었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이 녹음된 목소리를 재생하는 것 같았다.
"뭘 보여드릴까요."
수연은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너 지금, 나한테 꿈 팔려는 거야?"
"당신이 원하시는 걸, 제가 알고 있습니다."
소므니움이 말했다. 그 말은 예전에도 그가 즐겨 쓰던 표현이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 말 뒤에 미소가, 눈빛이, 계산이 있었다. 지금은 그 말이 그냥 — 텅 빈 채로 허공에 떨어졌다.
"네가 원한 거 아니었어?"
소므니움이 반복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마치 어딘가에 저장된 문장을 무작위로 재생하는 것처럼.
수연은 그 반복에 뒷걸음질쳤다.
"…뭐야, 너."
소므니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네가 원한 거 아니었어?"
같은 억양. 같은 속도. 완벽하게 동일한 반복. 수연은 그 완벽한 반복 속에서, 소름 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유혹의 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같은 방법으로 두 번 유혹하지 않았다 — 그것이 그의 자존심이자 본질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존재는, 같은 문장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건 유혹이 아니었다. 유혹의 형식만 남은 빈 껍질이었다.
수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예전의 그라면 절대 그냥 넘기지 못할 종류의 말. 그녀는 일부러 텅 빈 좌판을 턱짓하며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야, 장사꾼. 빈 판때기 놓고 장사가 돼? 오늘 매출 얼마나 했는데."
예전의 소므니움이라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받아쳤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잘 팔리는 건 원래 눈에 안 보이는 물건이라느니, 오늘의 첫 손님에게는 특별히 꿈 반 그릇을 덤으로 얹어주겠다느니 — 능청과 과장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오히려 수연 쪽이 말문이 막힐 때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런 입씨름이 그의 장사였고, 그의 숨쉬기였다.
침묵이 삼 초쯤 흘렀다. 소므니움의 눈은 수연을 향해 있었지만, 그 눈이 그녀를 따라오고 있지는 않았다.
"뭘 보여드릴까요."
수연은 그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는 걸 느꼈다. 무서운 건 대답이 아니라, 그 앞의 삼 초였다. 무언가가 서랍을 뒤지는 시간. 뒤졌는데 서랍이 비어 있어서 — 제일 위에 놓인 아무 문장이나 꺼내 오는 데 걸린 시간.
"…너, 소므니움 맞아?"
수연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엔 반응이 조금 달랐다.
소므니움의 손끝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떨렸다. 눈꺼풀이 한 번, 평소보다 느리게 깜빡였다. 마치 텅 빈 그릇 바닥에서 무언가가 아주 잠깐 흔들린 것처럼.
수연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너, 누구한테 잡혔어?"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한 걸음 거리에서 마주 서자, 그에게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예전의 소므니움에게는 냄새가 있었다. 맡는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그 사람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간의 냄새 — 수연에게 그것은 늦잠을 자도 되는 휴일 아침의 이불 냄새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의 곁에 고인 공기는, 눈 쌓인 빈 유리병 속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다.
숨소리도 이상했다. 사람처럼 쉬고는 있는데,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초침처럼 균일했다. 놀라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 호흡. 그리고 어깨 위의 눈 — 아까부터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조금도 녹지 않은 채 그대로 쌓여 있었다. 체온이 지나가지 않는 몸 위에, 길가의 이정표에 쌓이듯 눈이 앉아 있었다.
소므니움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억양이 바뀌었다. 정중함이 사라지고, 차갑고 건조한 어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질문은 비효율적이다."
수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목소리를 알았다. 예전의 그 다정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계산만 남은 목소리.
"…너."
그녀는 저도 모르게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너 지금, 그 새끼 목소리 낸 거야?"
소므니움은 다시 원래의 정중한 어조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의 이질감이, 이미 수연의 확신을 굳혀놓았다.
"…네가 붙잡혔구나."
그녀가 낮게 말했다.
"Writer한테."
소므니움은 그 이름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정중한 미소를 유지한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수연은 검을 뽑으려 손을 움직였다.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눈앞의 존재가 위협이라면, 그녀의 몸은 언제나 먼저 반응했다.
그러나 검자루를 반쯤 뽑아낸 순간, 그녀는 손을 멈췄다.
이건 적이 아니었다.
인질이었다.
그녀가 지금 벨 수 있는 건, 소므니움을 감싼 실이 아니라 소므니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실 안쪽에는, 아직 저항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 방금 떨렸던 손끝처럼.
수연은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오래도록 소므니움을 바라봤다.
"…씨발."
그녀가 낮게 내뱉었다.
"진짜 나쁜 새끼네."
그 욕은 소므니움을 향한 게 아니었다. 소므니움을 이렇게 만든 존재를 향한 것이었다.
죽일 수 없는 적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 되는 존재를, 그럼에도 눈앞에 위협처럼 세워둔 상대를 마주하는 건 —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수연에게는 직접 공격받는 것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너, 내 말 알아들어?"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를 낮추고, 최대한 부드럽게.
소므니움은 그 물음에도 정중한 미소만 유지했다.
"뭘 보여드릴까요."
같은 대답이 반복됐다.
수연은 그 반복 앞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검으로 벨 수도 없고, 말로 설득할 수도 없는 상대. 그저 눈앞에서 텅 빈 껍질이 된 존재를 지켜보는 것 말고는,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결국 뒷걸음질 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돌아서는 순간, 지나가던 아이 하나가 빈 좌판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아저씨, 오늘은 뭐 팔아요?"
소므니움이 그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중한 미소 그대로.
"…뭘 보여드릴까요."
아이는 그 대답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고 다른 좌판으로 뛰어갔다. 소므니움은 다시 원래의 정지한 자세로 돌아가, 텅 빈 좌판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수연은 그 광경을 뒤돌아보다가,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한때 도시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던 존재가, 이제는 팔 것도 없는 좌판 앞에 붙박여, 아무나 붙잡고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인형이 되어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온 뒤에도, 그녀의 심장은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심부름을 마쳤다. 대파를 고르고, 계란 한 줄을 받고, 식초 한 병의 값을 치르고. 채소 가게 아주머니가 거스름돈을 쥐여주며 손이 왜 이렇게 차냐고 한마디 건넸을 때, 수연은 그 손바닥의 온기가 낯설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온기가 지나가지 않는 몸 옆에 서 있다 온 참이었다.
잡힌다는 게 어떤 건지, 오늘 처음 봤다.
죽는 게 아니었다. 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끝이라도 있지. 잡힌다는 건 — 쓸모만 남기고 나머지를 전부 꺼두는 거였다. 목소리는 남기고 말은 끄고, 눈은 남기고 시선은 끄고, 장사꾼의 자세는 남기고 장사꾼을 끄는 것. 그 망할 놈은 아마 그걸 계산이라고 부를 것이다.
식초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 안에서 미지근해질 때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놓지 못했다. 만약 저 실이 다음에 감기는 게 비아라면. 형사라면. 나라면 — 나도 저 좌판 앞의 그처럼, 매일 아침 국물을 올리는 자세만 남은 채로 서 있게 되는 건가.
가게의 등불이 보일 때쯤에야, 그녀는 겨우 제 속도로 숨 쉬는 법을 되찾았다.
가게로 돌아온 수연은, 방금 있었던 일을 형사와 비아에게 그대로 전했다.
형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수첩에 조용히 기록했다. 예전 직업에서 그는 인질 사건을 몇 번 다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배운 것 중 하나는, 범인의 말이 아니라 인질의 눈을 보라는 것이었다 — 눈이 아직 무언가를 따라 움직이면,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실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군요. 손끝이 떨렸다는 건, 저항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 예전 일에서도 그랬습니다. 인질이 스스로 신호를 보낼 힘이 남아 있는 동안은, 구출도 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돼?"
수연이 물었다.
"조종당하는 존재라도, 완전히 죽은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그 실을 끊으면, 안에 남은 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이죠."
비아가 카운터 위에서 그 대화를 듣다가,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소므니움을 굳이 잡아둔 이유가 있다……이다. 죽이지 않고, 지우지 않고, 부린다……이다."
"왜 그렇게 하는데?"
"효율이다……이다."
비아가 씁쓸하게 답했다.
"신을 지우면 흔적이 남는다……이다. 근데 신을 부리면, 흔적 없이 원하는 걸 얻는다……이다. 그 사람은 이제 그런 계산만 한다……이다."
수연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손목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그런 식으로 계산당할 뻔했잖아."
그녀가 혼잣말처럼 흘렸다.
"내 사랑을 지울지 말지, 그 자식이 계산했었지. 근데 이번엔 아예 신을 통째로 부려서, 사람들 기억을 편집하고 있어.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거."
형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나쁜 일을 없앴습니다. 그다음엔 좋은 걸로 위장한 편집을 했습니다. 이제는 — 신을 노예로 부리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다음엔 뭘 부릴지, 저는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수연은 문득, 오래전 소므니움이 이 도시를 떠나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혹에 실패하고, 존재 이유를 잃어가며 서서히 옅어지던 그 신. 그때 그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 존재 가치가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방식으로.
"…그러고 보니."
수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걔, 어차피 사라지고 있었잖아. 유혹할 사람이 없어져서."
형사가 말없이 동의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소멸 직전의 존재를 붙잡은 겁니다. 사라지기 직전의 신은, 저항할 힘도 얼마 안 남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일 만만한 걸 골라서 잡은 거네."
수연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죽어가는 신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부려먹은 거야."
비아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이다."
"뭐가 아니야."
"만만해서가 아니다……이다. 효율이다……이다. 사라지기 직전의 존재는, 저항할 힘은 적어도 — 이미 완성된 권능은 그대로다……이다. 제일 적은 힘으로, 제일 큰 걸 얻는 방법이다……이다."
수연은 그 설명에 더 화가 났다.
"…그니까 계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네, 진짜."
가게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평화로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평화가, 이제는 아무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종류의 평화였다.
형사는 말없이 수연이 사 온 것들을 정리하다가, 그녀의 손이 아직도 잘 펴지지 않는 걸 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뜨거운 국물 한 그릇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수연은 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으로 스며드는 온기가, 오늘따라 지나치게 고마웠다.
그 침묵을 깬 건,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였다. 이리스가 들어섰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드론을 한 대도 띄우지 않은 채, 뭔가 골몰한 얼굴로 카운터에 앉았다.
"…저 요즘, 뭔가 좀 이상해요."
그녀가 말했다.
수연이 그녀를 봤다. 방금 겪은 일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뭐가."
이리스는 대답하는 대신, 자기 손을 오래 내려다봤다. 그 대답은 다음 날에야 도시 전체를 뒤흔들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무도 그 무게를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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