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2화. 구스 발트의 새벽
수연이 새벽 배달을 나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조리대 자기 자리에서 콜라비빔면을 만들어 먹다가, 그대로 가게 구석 의자에서 잠들어버린 것이다. 눈을 뜨니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그러나 완전한 밤도 아닌 시간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경계에 걸친 색이었다.
라면사장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몇 시야?"
"몰라. 아직 이르다."
"근데 왜 일어나 있어?"
"매일 이런다."
수연은 기지개를 켜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목이 뻐근했다. 의자에서 잔 티가 온몸에 남아 있었다. 창밖에서 낮게 웅웅거리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눈길을 미는 제설차였다.
"저건 뭐야?"
"구스 발트다."
"매일 저 시간에 다녀?"
"매일."
수연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노란 불빛을 켠 작은 제설차가 골목 눈을 밀며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두꺼운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졸린 얼굴이었지만 손은 정확했다. 그 정확함이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저 사람 알바생이야?"
"단골이다."
"단골이 왜 일해?"
"일이 아니다. 저게 저 사람 일상이다."
수연은 그 구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수연이 손을 흔들자 구스 발트가 제설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다.
"어, 알바생.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냥 깼어요. 근데 매일 이 시간에 나오세요?"
"매일. 눈이 오나 안 오나."
"눈 안 오면 뭐 밀어요?"
"어제 온 눈. 이 도시는 매일 조금씩 와서, 하루라도 안 밀면 금방 쌓여."
구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핸들을 잡았다. 수연은 조수석 쪽 문을 두드렸다.
"태워주면 안 돼요?"
"어차피 골목 한 바퀴 도는 거야. 재미없어."
"심심해서 그래요."
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문을 열어줬다.
제설차는 느리게 골목을 돌았다. 눈이 양옆으로 밀려나며 길이 만들어졌다.
"이거 왜 아무도 안 시키는데 매일 해요?"
수연이 물었다.
구스는 잠깐 그 질문을 곱씹었다.
"안 하면 사람들이 못 다니니까."
"그건 알겠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 해요?"
"길이 있어야 다들 오지."
구스가 짧게 대답했다.
"군밤 할머니도, 우체부도, 목욕탕 손님도. 다들 이 골목으로 다녀. 내가 안 밀면, 그 사람들이 눈 속을 헤치고 다녀야 돼."
"그게 왜 구스 씨 책임이에요?"
"책임은 아니야."
그는 핸들을 살짝 꺾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야. 나 말고 딱히 할 사람도 없고."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녀가 아는 세계에서는, 모든 일에 이유가 있었다. 명령이거나, 대가이거나, 최소한 복수라도. 아무 대가 없이 그냥 하는 일이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보수는 받아요?"
"라면가게에서 밥은 먹어. 그게 다야."
"그것만으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요?"
구스는 그 질문에 피식 웃었다.
"알바생도 매일 여기 있잖아. 벽값 갚으려고."
"그건 청구서 때문이잖아요."
"열흘 지나면 안 올 거야?"
수연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나도 그랬어."
구스가 낮게 말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가다 봤어. 눈 쌓인 골목을. 한 번 밀어줬는데, 다음 날도 쌓여 있더라고. 그래서 또 밀었어. 그러다 보니 매일이 됐어."
"구스 씨는 원래 뭐 하던 분이에요?"
수연이 문득 물었다.
구스는 제설차를 잠깐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전기사였어. 원래 세계에서."
"무슨 운전이요?"
"눈 오는 밤마다, 산길을 오가는 버스."
"위험했겠네요."
"위험했지. 근데 그 일을 좋아했어.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거."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마지막 날엔, 그 산길에서 사고가 났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브레이크가 안 들었어."
수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그래서요?"
"승객들은 다 무사했어. 나만 못 살았지."
구스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이미 오래전에 소화된 이야기라는 듯이.
"그때 생각했어. 다시 기회가 생기면, 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
수연은 그 말에 뭔가 뭉클했다.
"그래서 여기서 제설차를 모는 거예요?"
"응. 이번엔 아무도 안 다치게."
골목 끝에 다다르자 군밤 할머니가 화로 앞에 나와 있었다.
"오늘도 수고하네."
"늘 하는 거죠."
구스가 창문을 내리자 할머니가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군밤이었다.
"이건 뭐예요?"
수연이 물었다.
"매일 이래."
구스가 봉투를 받으며 대답했다.
"내가 눈 밀고, 할머니가 밤 주고.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할머니가 웃으며 수연에게도 밤 몇 개를 건넸다.
"새 얼굴이네."
"수연이에요. 알바생이요."
"청구서 얘기 들었어. 열흘이라며."
"소문 진짜 빠르네요."
"이 도시는 좁다니까."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화로 앞으로 돌아갔다. 제설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엔 이런 게 많아요?"
수연이 밤을 까먹으며 물었다.
"뭐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서로 하는 거요."
"많지."
구스가 대답했다.
"우체부는 배달이 없는 편지도 챙겨서 물어봐 주고, 목욕탕 아주머니는 물이 너무 뜨거우면 알아서 식혀주고. 딱히 누가 정한 규칙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하다 보니 굳어진 거지."
"왜 그렇게 됐을까요?"
구스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마, 여기 온 사람들이 다 한 번씩은 아무도 안 챙겨주는 곳에 있어봤기 때문 아닐까."
수연은 그 말에 문득 자기 세계를 떠올렸다. 아무도 그녀에게 선택지를 챙겨준 적 없었다. 명령과 결과만 있었을 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여기선, 챙겨주는 게 이상한 게 아니야. 오히려 안 챙겨주는 게 이상한 거지."
제설차는 마지막 골목을 돌아 다시 라면가게 앞으로 돌아왔다. 해가 어렴풋이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태워줘서."
수연이 내리며 말했다.
"고맙긴. 심심하다며. 덕분에 나도 덜 심심했어."
구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얼굴로 덧붙였다.
"저기, 알바생."
"네?"
"청구서 다 갚으면, 그다음엔 뭐 할 거야?"
수연은 그 질문에 잠깐 멈칫했다.
"……모르겠어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생각해봐. 갚는 게 끝이 아니라, 그다음이 진짜 중요하니까."
수연은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스는 다시 다음 골목으로 향했다. 그의 제설차 뒤로, 어제와 같은 자리에 오늘도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라면사장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구스 아저씨 따라 새벽 순찰."
"제설차를?"
"응. 재밌던데. 그리고 얘기도 들었어."
"무슨 얘기?"
수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 아저씨, 원래 세계에서 버스 기사였대. 사고로 자기만 못 살았대."
라면사장은 그 말에 손을 잠깐 멈췄다.
"안다."
"알고 있었어?"
"이 가게 손님들 이야기는, 대부분 안다."
"근데 왜 아무 말 안 해?"
"본인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이 가게의 방식이었다. 알아도 먼저 말하지 않는 것. 상대가 스스로 꺼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녀는 군밤 봉투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청구서에 추가할 거야?"
"뭘."
"이거 먹은 시간."
"그건 청구 안 한다. 그건 그냥 사는 거다."
수연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청구되고 계산되는 세계에서 온 그녀에게, "그냥 사는 것"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좋았다.
그녀는 군밤 하나를 라면사장에게 내밀었다.
"먹어."
"안 좋아한다."
"그래도 먹어. 나눠주는 거야, 그냥."
라면사장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밤을 하나 받아 들었다. 별말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게 밖, 골목은 이제 눈이 말끔히 밀려 있었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조용히 해낸 뒤였다. 그리고 그 일 뒤에는, 다시는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오래된 다짐이 숨어 있었다.
오전에 세레나가 가게에 들렀다.
"오늘 아침 순찰, 재밌으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 도시는 좁으니까요."
수연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이 도시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구스 아저씨 얘기 들었어요. 원래 버스 기사였다고."
세레나는 그 말에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세레나 씨도 알고 있었어요?"
"이 도시에 오는 모든 분들의 사정을, 저는 대부분 알아요."
"근데 왜 아무 티도 안 내요?"
세레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안다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수연은 그 구분이 낯설지 않았다. 이 가게, 이 도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말로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구스 씨는 왜 하필 제설차를 골랐을까요?"
수연이 물었다.
"본인이 정한 거예요. 제가 정해준 게 아니라."
"근데 뭔가 어울려요. 그 일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세레나는 창밖,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눈길을 바라보았다.
"이 도시에서, 자기가 겪은 일을 완전히 반대로 되갚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스 씨처럼요. 사고로 잃은 걸, 이제는 다른 사람이 잃지 않도록 만드는 일로 바꾸는 거죠."
"멋있네요."
"멋있죠. 근데 쉬운 일은 아니에요."
수연은 그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왜요?"
"매일 아침 그 일을 한다는 건, 매일 아침 그날을 떠올린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구스가 아무렇지 않게 그 이야기를 했던 것도, 어쩌면 매일 반복하며 스스로 다스려온 결과일지도 몰랐다.
"저도 그런 걸 찾을 수 있을까요?"
수연이 문득 물었다.
"뭘요?"
"제가 겪은 걸, 다르게 쓰는 거요."
세레나는 그 질문에 오래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찾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제가요?"
"콜라비빔면이요."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건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
"틀린 선택을 스스로 고르는 것. 그게 당신한테 왜 중요한지, 저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수연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세레나는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그녀가 나간 뒤, 수연은 한참 동안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세레나의 말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라면사장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아니야."
"세레나가 뭐라고 했는데?"
"……구스 아저씨 얘기 하다가, 내 얘기로 넘어갔어."
"그래서?"
"내가 콜라비빔면 만드는 것도, 구스 아저씨 제설차 미는 거랑 비슷한 거래."
라면사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다."
"어떻게 비슷해?"
"둘 다, 자기가 겪은 걸 자기 방식으로 다시 쓰는 거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자기 세계에서 강요당한 선택들을 겪었고, 이제 여기서는 스스로 틀린 선택을 고르는 것으로 그 기억을 다시 쓰고 있었다. 구스는 사고로 잃은 것을, 다른 이들의 안전한 길로 갚고 있었다.
방식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이 도시 사람들, 다 그런 식으로 사는 거야?"
"많이들."
"그럼 너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냄비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수연은 그 침묵을 이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닌 질문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콜라 캔을 손에 쥐었다.
오늘 밤엔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냥, 이 도시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들을 조용히 곱씹고 싶은 밤이었다.
창밖으로, 구스의 제설차가 다음 골목을 향해 멀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는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만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그는 조금씩 자기 자신을 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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