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81화. 꿈이 없던 도시

노바 니발리스에는 오래된 소문이 하나 있었다. 이 도시 사람들은 꿈을 잘 꾸지 않는다는 것. 깊고 편안한 잠을 자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대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 평온이 깨진 건, 아주 작은 균열에서부터였다.


소예는 그날 아침, 오랜만에 또렷한 꿈 하나를 꾸고 눈을 떴다. 가게에 처음 왔던 날부터 지금까지가 짧게 압축되어 이어지는,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은 따뜻한 꿈이었다.

"사장님, 저 오늘 꿈 꿨어요."

그녀가 가게에 도착해 말하자, 라면사장은 국물을 젓던 손을 멈췄다.

"어떤 꿈이었나."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가, 쭉 이어지는 꿈이었어요."

"……드문 일이군."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미묘한 긴장을, 소예는 눈치채지 못했다.


같은 날, 수연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고, 극장 거리에서는 코모와 솔이 저마다 무대 위에서 성공하는 꿈을 꿨다며 들떠 있었다. 이리스 역시 어젯밤 무대 위에서 열 초가 아니라 훨씬 더 오래 서 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의 끝자락에서, 낯선 목소리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마음에 드나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어딘가 서늘한 여운을 남기는 목소리였다.


저녁, 가게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꾼 꿈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라면사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걸 눈치챈 수연이 물었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다들 갑자기 꿈을 꾸는 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때, 가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녹사가 들어섰다. 평소라면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았을 그녀가, 오늘은 미간을 좁힌 채 곧장 라면사장 앞으로 걸어왔다.

"이 도시, 언제부터 꿈을 꿨지."

그녀의 짧은 물음에는 억양이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경계심만은 누구보다 선명했다.


"자네도 느꼈나."

"오늘 아침부터, 냄새가 이상했다. 다들 좋은 꿈만 꿨다고 하고, 그런데 아무도 왜 이상한지는 모른다."

"이 도시에 원래 꿈이 없었다는 걸, 자네는 알고 있었나."

녹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걸어둔 거잖아. 옅은 보호."


그 말에 수연과 이리스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라면사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처음으로 그 사정을 입에 담았다.

"이 도시는, 사람들이 각자의 과거에서 도망쳐 온 곳이다. 꿈은 대개 과거의 잔상이거나 이루지 못한 갈망이다. 문을 연 날, 그 갈망들이 사람들을 다시 붙잡지 않도록 이 땅에 아주 옅은 보호를 걸어두었다."

"완전히 막는 건 아니고?"

"막는 게 아니라 누르는 거다. 너무 깊이, 너무 생생하게 빠지지 않도록."

"근데 지금 그게 뚫렸다는 거네요."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뚫렸거나, 그보다 강한 무언가가 그 위에 덧씌워졌겠지."

라면사장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녹사는 그 말을 들으며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덧씌운 거다. 뚫을 정도의 힘이면, 이 정도로 다들 좋은 꿈만 꾸지는 않는다. 좋은 꿈만 골라 보여주는 건, 뚫는 게 아니라 손님처럼 들어와 앉는 거다."


그 무렵, 시장 골목에서는 이든 홀트라는 노인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시간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그가, 벌써 두 시간째 늦어 있었다.

"홀트 씨, 오늘도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미안하네. 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어. 아내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꿈이었거든. 계속 거기 있고 싶었어."

이웃 상인은 그 홀린 듯한 표정에 옅은 불안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흘째, 홀트는 결국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간 수연과 라면사장이 발견했을 때, 그는 낡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깊이 잠들어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은 쉬고 있다. 근데 꿈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다."

"어떻게 깨워요?"

"본인이 나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근데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라면사장이 그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녹사가 먼저 다가와 홀트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그 손을 오래도록 힘주어 감쌌다.

"홀트."

짧은 부름이었다. 두 번, 세 번, 같은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게 지금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나직이 덧붙였다. 손의 온기, 그리고 그 무뚝뚝한 확인. 몇 분이 지나자, 홀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내 가게인가?"

홀트가 힘겹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홀트 씨!"

수연이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홀트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눈물 자국이 마른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제 아내가, 계속 있으라고 했어요. 근데 누가 손을 잡고, 계속 이름을 부르더군요."

"그게 나였다."

녹사가 답했다.

"고맙습니다. 근데 동시에, 좀 원망스럽기도 하네요."

"그리운 걸 그리워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근데 그 그리움에 완전히 잠기면, 여기 있는 진짜 삶을 잃는다."

녹사의 그 말에 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사장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이 도시에는 이미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그날 저녁, 도시 전체에 홀트의 일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세레나는 급히 공지를 내렸다.

"최근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꿈을 꾸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기 힘들거나 주변 사람이 그런 상태라면, 즉시 가게로 알려주세요."

그 공지는 도시 전체에 조용한 긴장감을 드리웠다.


가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라면사장은 오늘 알게 된 것들을 정리했다.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이 각자 가장 그리워하던 걸 꿈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저희가 안 꾼 이유는요?"

"나와 녹사, 비아는 이 도시의 다른 존재들이다. 사람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겪는다. 그래서 노려지지 않았다."

"그럼 이 도시의 '사람들'만 노려졌다는 거네요."

이리스가 정리했다. 라면사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나."

"저요. 그리고 저도요."

이리스와 수연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나."

"네. 뭔가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요."

라면사장의 표정이 굳었다.

"위험한 신호다. 꿈은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공간이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상대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녹사가 그 말을 받았다.

"이름이 있을 거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사람을 다루는 존재라면."

"소므니움."

라면사장이 나직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가게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름만 들어봤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 그는 정말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대로면 두 번째, 세 번째 홀트가 나올 게 뻔했다. 그날 오전, 가게에 모인 사람들은 먼저 대책부터 세우기로 했다.

"셋 정도가 있다."

라면사장이 정리했다.

"첫째, 진짜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거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니까. 둘째, 익숙한 감각을 이용하는 거다. 냄새, 손의 온기, 익숙한 소리. 꿈은 시각과 감정에 집중돼 있어서, 다른 감각을 자극하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셋째, 손을 잡아주는 거다. 체온은 꿈이 완전히 가릴 수 없는 감각이다."

"홀트 씨한테 녹사가 한 게 그거였네요."

이리스가 말했다.

"그래.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았다. 초기 단계라면 그걸로 충분히 효과가 있다. 근데 이미 깊이 빠진 경우엔 시간이 더 걸린다."


"예방하는 방법은요?"

수연이 물었다.

"잠들기 전에 스스로 되뇌는 거다. 지금 여기가 진짜라는 걸. 그 마음가짐 자체가 작은 방패가 된다. 그리고 혼자 자지 않는 게 좋다."

세레나는 그 정보를 곧바로 도시 전체에 공지로 돌렸다. 사람들은 서로 짝을 지어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낯선 위협 앞에서, 도시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더 가까이 기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수연이 인사를 건네다가, 문 앞에 선 손님을 보고 말을 잃었다.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표정은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사람을 흉내 내는 아름다운 그림자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 가게가, 소문으로 듣던 그 라면 가게로군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며칠 전 꿈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라면사장이 국물을 젓던 손을 멈추고 그 존재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소므니움."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영광입니다. 이 도시에서 제 이름을 아는 분을 만나기는 처음이라서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저 인사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사람들 꿈에 손을 댄 게 저라는 걸, 이미 짐작하셨을 텐데요."


"손을 댔다는 표현은 좀 억울하네요. 저는 그저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걸 보여드렸을 뿐입니다. 홀트라는 분, 아내분을 정말 그리워하시더군요."

"본인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붙잡아두는 건 잘못이다."

"붙잡아둔 적 없습니다. 그분이 스스로 나오지 않으려 했을 뿐이죠. 저는 선택지를 드렸을 뿐이고, 선택은 온전히 그분의 몫이었습니다."

이리스는 그 논리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틈이 없다는 걸 느꼈다. 소므니움의 말은 교묘하게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 선택이라는 거, 애초에 공정하지 않잖아요."

이리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공정하지 않다니요?"

"그리워하던 걸 보여주면서,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숨겼잖아요. 그럼 당연히 거기 머물고 싶어지죠."

"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보여드린 건 분명 그분이 기억하는 진짜 모습 그대로였어요. 다만 그게 지금 여기 없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게 거짓말이잖아요! 숨기는 것도 거짓말이에요!"


마침 가게에 들어서던 녹사가 그 대화를 듣고 곧장 끼어들었다.

"진실만 보여주는 척, 대가는 숨긴다."

그녀가 짧게 정리했다. 소므니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시네요."

"경고 담당이라서."

녹사는 그렇게만 답하고 팔짱을 꼈다. 소므니움은 그 무뚝뚝함에 옅은 흥미를 보였다.


"근데 왜 여기, 이 도시에 온 거지."

라면사장이 다시 물었다.

"이 도시가 특별하다고 들었거든요. 꿈이 거의 없는 도시라니, 흥미롭잖아요. 그리고…… 이 도시에 아주 흥미로운 분이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그 말에 가게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를 말하는 거라면, 헛수고다. 나는 네 꿈에 걸릴 존재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흥미롭죠. 당신 같은 분이 지키는 도시라면, 사람들이 대체 어떤 꿈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소므니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리스를 돌아보았다.

"이리스 씨, 였죠. 지난번 꿈에서 잠깐 뵀었는데. 그 열 초,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다음번엔 더 오래 서 계실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

"필요 없어요."

"그런가요. 아쉽네요."

소므니움은 그렇게 말하며 가게 문을 열고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가게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라면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므니움은 '선택되지 않은 미래'를 보여주는 힘을 가진 존재다. 그 사람이 다른 길을 택했다면 벌어졌을, 혹은 벌어질 수 있었던 순간들. 홀트에게는 과거를 보여줬지만, 본질은 그보다 넓다.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

"근데 그게 왜 위험한 거예요? 그냥 보여주는 것뿐이잖아요."

수연이 물었다.

"진실이라는 게 문제다. 저놈이 보여주는 건 전부 진짜 가능성이다. 거짓이 아니다. 근데 그 대가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저놈은 오직 달콤한 결과만 보여준다."


"그럼 저놈이 할 수 있는 건 정확히 뭐예요?"

"꿈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 안에 오래 머물게 유도할 수 있다. 다만 강제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다. 반드시 상대가 스스로 원해야 한다. 그게 저놈이 지키는 규칙이다."

"그럼 원하지 않으면 안전한 거네요."

"이론적으로는. 근데 문제는,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작은 미련이 있다는 거다. 저놈은 그 미련을 정확히 찾아낸다. 스스로의 현재에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덜 흔들린다."

"그럼 사장님은요? 사장님도 흔들릴 수 있어요?"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다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룰 수 있었던 것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답을 정했다."

그 대답에서 뭔가 깊은 사연을 느꼈지만, 수연은 더 캐묻지 않았다.


녹사가 다시 물었다.

"그냥 쫓아내면 안 되나."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오랫동안 침묵했다.

"할 수는 있다."

"근데?"

"쫓아내면, 다음엔 내가 쫓아낼 것을 정하게 된다. 오늘 쫓아내면, 다음에 비슷한 존재가 나타났을 때도 내가 판단해서 쫓아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이 도시에 무엇이 들어오고 무엇이 못 들어오는지, 전부 내가 정하는 도시가 된다."


"그게 왜 나쁜 거예요? 위험한 걸 막아주시는 거잖아요."

"위험하다고 내가 판단한 것만 막는 거다. 그 판단이 항상 옳을까. 이 도시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곳이어야 한다. 내가 대신 모든 위험을 걸러주기 시작하면, 이 도시는 더 이상 사람들의 도시가 아니라 내 도시가 된다."

이리스가 물었다.

"근데 사장님, 그러다가 누가 정말 크게 다치면 어떡해요?"

"그럴 땐 개입한다. 홀트 때처럼. 근데 그건 위험을 없애는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손을 내미는 거다. 근본적으로 이겨내는 건, 그 사람 자신이어야 한다. 내가 대신 이겨내 주면, 그 사람은 다음에 또 나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근데 스스로 이겨내면, 다음엔 혼자서도 버틸 수 있게 된다."

수연은 그 말에 문득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거, 저한테 해주신 것도 그거였네요. 처음 여기 왔을 때, 사장님이 저 대신 뭔가를 해결해주신 적 별로 없었잖아요."

"맞다. 나는 그저 네가 있을 곳을 내줬을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네가 해낸 거다."


녹사가 그 대화 끝에 짧게 덧붙였다.

"오래전에,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있지."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아는군."

"자세히는 모른다. 근데 안다. 그럴 때마다 먼 곳을 보는 거."

가게 안 사람들은 그 짧은 주고받음 속에서, 라면사장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래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러나 아무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각자 자신의 미련이 뭔지 먼저 알아야겠네요."

이리스가 정리했다.

"그래. 그 미련을 인정하되, 지금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도시 사람들은 이미 한 번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해낸 이들이다. 각자의 과거를 등지고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그 증거다."


그날 밤, 녹사는 홀트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아와 마주쳤다.

"뭔가 온다……이다."

비아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익숙한 종류는 아니다……이다. 근데 나쁜 것도 아니다……이다. 그냥…… 달콤하고 위험하다……이다."

"정확하네."

녹사가 짧게 답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관찰을 확인하고는,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이리스는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곧바로 확신에 찬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의 그 열 초, 그 이상을 향한 갈망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미련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더 서고 싶어. 근데 그게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아.'

가게 안, 라면사장은 홀로 남아 창밖 저 먼 곳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도시는 하나씩 이 낯선 시험에 맞설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지만, 그는 이것이 결코 짧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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