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80화. 뿌리내린 사람들
겨울 축제가 끝난 지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도시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그 일상 속에는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온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수연은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각을 맞춰 접은 이불을 서랍장에 넣는 그녀의 손길에는, 흔들림 없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예전엔 이런 것도 못 했었는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처음 이 가게에 왔을 때, 자신의 잠자리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수연, 준비 다 됐나?"
라면사장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네, 지금 내려가요!"
수연은 서랍장을 마저 닫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가게에는 이미 아침 재료 손질이 한창이었다.
"오늘도 파부터 썰까요?"
"그래, 늘 하던 대로."
수연은 익숙하게 도마 앞에 서서 파를 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손이 서툴러 몇 번이고 다치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리듬감 있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참, 많이 늘었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같은 시각, 극장 거리에서는 이리스가 새로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대 위에는, 겨울 축제 무대 위에서 바라보았던 텅 빈 객석의 풍경을 담은 스케치가 놓여 있었다.
'무대 위에서 본 풍경.'
그녀는 그 스케치 아래에 그렇게 제목을 적어 넣었다. 지금껏 그녀가 그려온 그림들은 대부분 무대 뒤나 객석에서 바라본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스케치만큼은,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바라본 시선을 담고 있었다.
"감독님, 이번 그림도 완성하셨어요?"
솔이 다가와 물었다.
"네, 이번엔 좀 특별한 그림이에요."
"어떻게 특별한데요?"
이리스는 그 질문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무대 위에서 본 풍경이에요. 처음으로요."
솔은 그 스케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그 조명 사고 때 보신 거예요?"
"네, 딱 그 순간이요."
"감독님한테는 이게 특별한 기억이겠네요."
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한 확신도, 완전한 답도 아니었지만, 그 열 초의 기억은 그녀의 그림 속에 이렇게 하나의 이정표로 남아 있었다.
그 무렵, 극장 거리 뒷마당에서는 돈키호테가 새로운 시를 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감정이 벅찰 때마다 창고로 향했을 그였지만, 요즘은 이렇게 사람들이 오가는 마당에 앉아 글을 썼다.
"오늘은 뭘 쓰세요?"
지나가던 코모가 물었다.
"이번엔 '뿌리'에 대한 시다! 이 도시에 뿌리내린 것들에 대해!"
돈키호테는 그렇게 답하며 신나게 펜을 움직였다.
한편, 회전목마 앞에서는 파올라 링이 겨울 대비로 목마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도 잘 버텨야 할 텐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마의 축을 꼼꼼히 확인했다. 예전 같으면 축 하나가 휘어도 모르고 지나쳤을 테지만, 지난 축제의 소동 이후로 그녀는 매일같이 세심하게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사고 이후로, 나도 좀 더 꼼꼼해졌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키에 안데르의 작업실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이제 얼음 원석을 넉넉히 비축해두는 습관을 들였다.
"이번엔 미리 준비해두는 거예요?"
이리스가 지나가다 물었다.
"네, 감독님 덕분에 배웠어요. 미리 준비해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안데르는 그렇게 답하며 원석 더미를 정리했다. 지난번 재료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던 기억이, 이제는 그의 습관을 바꿔놓고 있었다.
한편, 가게 앞에서는 소예가 새로 들어온 배달꾼 견습생에게 가게 규칙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 오는 손님들 중에는, 사연 있는 분들이 많아. 그러니까 함부로 캐묻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해."
"네, 알겠습니다!"
견습생이 씩씩하게 답했다.
소예는 그 대답에 옅게 웃었다.
"나도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똑같은 얘기 들었어. 그때는 이해 못 했는데, 지금은 알 것 같아."
"어떤 걸 아시게 됐는데요?"
"사람들은 각자 자기 속도로 나아간다는 거. 억지로 다그치지 않아도, 결국은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가더라고."
견습생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 적었다. 소예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예전에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이 가게의 원칙을 배웠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이제 내가 이걸 가르쳐주는 입장이 됐구나.'
그 사실이 낯설면서도, 동시에 뿌듯하게 다가왔다.
저녁 무렵, 가게에는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레나, 녹사, 비아, 그리고 극장 거리 사람들까지, 저녁 식사 겸 가벼운 자리를 가지기로 한 날이었다.
"다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세레나가 먼저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기색이 담겨 있었다.
"저는 요즘 매일 낭독 연습해요! 다음 낭독회도 계획 중이다!"
돈키호테가 신이 나서 답했다.
"저도 위원장님 밑에서 배운 거, 조금씩 나눠주고 있어요."
세레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녹사와 나눈 대화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일을 나누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비아 씨는 요즘 어떠세요?"
수연이 물었다.
"나는 항상 똑같다……이다. 근데."
"근데요?"
"요즘 라면 맛이 좀 더 좋아졌다……이다. 수연이 파 써는 솜씨 늘어서 그런가……이다."
수연은 그 뜻밖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졌다.
"비아 씨도 참, 그런 칭찬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직설적인 게 뭐가 나쁜가……이다. 사실이다……이다."
사람들은 그 대화에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 식사 자리는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갔다.
"근데 녹사 씨는 요즘 어떠세요?"
이리스가 물었다.
"저는 여전해요. 다만 요즘은 세레나 씨한테 일을 좀 더 나눠주는 중이에요."
"저도 이제 조금씩 나눠받고 있어요."
세레나가 웃으며 답했다.
"덕분에 요즘은 잠도 잘 자고 있어요. 녹사 씨 잔소리 덕분이죠."
"잔소리라니, 세레나 씨. 저는 조언이라고 부르는데요."
녹사가 짐짓 억울한 얼굴로 답하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정말 다행이에요. 위원장님 얼굴이 요즘 훨씬 편안해 보이셔서."
수연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혼자 다 짊어지려던 제 착각을, 다들 깨우쳐주셨잖아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에는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저희야말로 위원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리스가 답했다.
라면사장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국물을 끓이며, 이따금 오가는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라면사장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국물을 끓이며, 이따금 오가는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들, 저마다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처음 이 도시가 세워졌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저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의 방식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리스와 수연은 마지막까지 남아 가게 정리를 도왔다.
"오늘 정말 좋은 자리였어요."
이리스가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거,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
수연도 동의했다.
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가게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는 이미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곳곳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까. 처음 왔을 때랑 지금이랑, 완전 다른 사람 같아."
"나도 그래. 캐스팅 목록에 빈칸만 남겨두던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좀 다른 것 같아."
"어떻게 다른데?"
"그때는 뭘 하든 확신부터 찾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확신 없이도 일단 해보는 게 조금은 편해졌어."
수연은 그 대답에 흐뭇하게 웃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순서가 반대라고."
"그러게. 신입 말이 맞았어."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 축제 이후로 쌓인 여러 기억들이, 그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신입, 요즘 행복해?"
이리스가 문득 물었다.
수연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응. 예전엔 이런 질문 자체가 낯설었는데, 요즘은 자연스럽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어."
"나도 그래.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지금은 당연하게 하고 있어."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시각, 라면사장은 가게 안에서 홀로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 고요함 너머 아득히 먼 곳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이 도시가, 이렇게까지 자리를 잡을 줄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이 도시를 만들었던 그 오래된 이유와, 지금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이 풍경 사이에는,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거리는, 나쁜 종류의 거리가 아니었다.
그날 밤, 도시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 하늘 위로 아주 짧은 순간 별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너무나 짧고 희미해서,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누군가 꾸는 꿈의 한 조각처럼, 하늘 저편에서 잠깐 일렁이다 이내 사라졌다.
그 미세한 빛의 떨림을, 오직 라면사장만이 창밖 너머로 흘긋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이건.'
그는 그렇게 짧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창밖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러나 하늘은 이미 다시 고요해져 있었고, 별빛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착각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방금 본 그 짧은 떨림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가게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도시는 평온한 겨울밤을 보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함 너머, 아주 먼 곳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아주 작은 시작이었다.
라면사장은 창가에 한참을 더 서 있다가, 결국 자리로 돌아가 마지막 정리를 마쳤다.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불을 껐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가 지녀온 감각은, 그 짧은 떨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가게 문을 잠그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고요했다. 별들은 제자리에서 평온하게 빛나고 있었고, 방금 전의 그 이상한 떨림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문을 잠갔다. 그러나 그 밤, 그는 오랜만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 도시가 세워진 이래, 겨울 축제라는 첫 공식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가던 이 평화로운 시기는, 어쩌면 다가올 폭풍 전의 가장 고요한 순간이었는지도 몰랐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가고, 눈은 소리 없이 계속 내렸다. 그리고 그 눈발 사이, 아주 가끔, 하늘 저편에서 짧고 희미한 빛의 떨림이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아주 먼 곳에서, 이 도시를 향해 무언가를 속삭이듯이.
노바 니발리스의 평온한 제2부는,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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