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58화. 얼음 정원과 밤샘
성 한쪽에 자리한 온실은, 이 도시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 중 하나였다.
그 온실을 돌보는 이는 프림 하울이라는 정원사였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고, 늘 조용히 식물들 사이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온실에는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다. 얼음 속에서만 피어나는 꽃이었다.
그날, 배달을 나갔던 수연이 우연히 그 온실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췄다.
"이거…… 꽃이 얼음 안에 있는 거예요?"
그녀가 신기한 듯 유리 온실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프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꽃은, 얼어 있을 때만 살아있어요."
"녹으면요?"
"녹으면 죽어요."
프림의 그 담담한 대답에, 수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럼 이 꽃은…… 계속 얼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네. 그게 이 꽃의 방식이에요."
"안타깝지 않아요? 계속 얼어 있어야만 산다는 게."
프림은 그 질문에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죽은 게 아니라, 멈춘 거예요."
그 말은 짧았지만, 수연에게는 묘한 여운을 남겼다.
"멈춘 거랑 죽은 거랑, 뭐가 다른데요?"
"멈춘 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조건이 맞으면요."
프림은 그렇게 말하며 얼음 속 꽃잎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에는, 오랜 세월 이 꽃을 돌봐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 꽃은 어디서 가져오신 거예요?"
수연이 물었다.
"저도 정확힌 몰라요. 제가 이 도시에 왔을 때, 이미 이 온실에 있었거든요."
"그럼 프림 씨가 심으신 게 아니에요?"
"네. 저는 그냥, 이 꽃이 얼어 있을 수 있게 온도를 맞춰주는 역할이에요."
프림의 그 말에는 겸손함과 동시에,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것도 중요한 일이잖아요. 온도를 맞춰주는 거."
"맞아요. 근데 가끔은, 이 꽃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궁금해요. 계속 얼어 있고 싶은 건지, 아니면 녹아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건지."
프림의 그 말에, 수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질문은 단순히 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질문일지도 몰랐다.
수연은 그 말을 듣고, 문득 이 도시 전체를 떠올렸다.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이 도시. 이야기가 끝난 뒤에 도착하는 사람들. 어쩌면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얼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다시 움직일 조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
"이 꽃은 언제 녹여요? 아니, 녹일 수는 있어요?"
"녹일 수는 있죠. 근데 아직 그때가 아니에요."
"그때가 언제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프림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건, 꽃이 알려줄 거예요."
그날 저녁, 수연은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뒤 라면사장에게 그 온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음 속에서만 사는 꽃이 있대요. 녹으면 죽는데, 죽은 게 아니라 멈춘 거래요."
라면사장은 그 이야기를 듣고 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
"……그렇군."
"사장님, 왜 그렇게 진지해지세요?"
"그냥, 그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장님도 뭔가 멈춰 있는 게 있어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선반 위의 붉은 테두리 그릇 쪽으로 시선을 잠시 옮겼다.
"……있을지도."
수연은 그 시선의 끝을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 가게에서 배운 대로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뒤, 라면사장은 드물게 시간을 내어 직접 프림 하울의 온실을 찾았다.
"오, 라면사장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프림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얼음 꽃, 좀 보러 왔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얼음 속 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프림은 그 모습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다른 화분들을 돌보며 곁을 지켰다.
한참이 지난 후, 라면사장이 나직이 물었다.
"이 꽃, 녹여본 적 있나?"
"딱 한 번이요."
"어떻게 됐지?"
"금방 시들었어요. 아직 준비가 안 됐던 거죠."
"……그렇군."
라면사장은 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침묵 속에서 꽃을 바라보았다.
"라면사장님도, 뭔가 얼려두신 게 있으세요?"
프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
"……있다."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직은, 말 못 한다."
"그럼 그것도 언젠가 녹을까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그 대답은 프림에게도,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온실 안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상하게 따뜻한 공감이 흐르고 있었다.
프림은 그런 라면사장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이 꽃 옆에 다른 꽃 하나 더 심어드릴까요?"
"……왜 갑자기?"
"그냥, 사장님도 이 온실에 자주 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얼려두신 게 있으시다면, 가끔 와서 들여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라면사장은 그 제안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지도. 나중에 다시 오지."
"언제든 환영이에요. 이 온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곳이니까요."
프림의 그 말에는, 자신의 온실이 단순히 꽃을 기르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의 멈춘 것들을 지켜보는 공간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가게로 돌아온 라면사장은 홀로 카운터에 앉아 오늘 본 그 얼음 꽃을 떠올렸다.
멈춘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이, 계속 그의 마음에 맴돌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오랫동안 얼려온 감정들을 떠올렸다. 선반 위의 그릇, 그리고 그 그릇이 상징하는 오래된 기다림.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얼음 어딘가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걸 그는 느끼고 있었다. 수연을 향한 이 낯선 감정이, 마치 봄바람처럼 그 오래된 얼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도, 녹을 때가 된 걸까.'
그는 그 질문에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침 그때, 수연이 마감 정리를 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오늘 온실 다녀오셨다면서요? 프림 씨가 그러던데."
"……그래."
"어땠어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괜찮았다. 좋은 걸 봤다."
"뭘요?"
"……멈춰 있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그녀에게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녀 역시, 자신 안의 무언가가 오랫동안 얼어 있다고 느껴왔으니까.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럴 거다. 언젠가는."
라면사장의 그 짧은 대답에, 수연은 옅게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각자의 얼음이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는 걸 서로 어렴풋이 느끼는 그런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게 밖으로는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바람은, 예전만큼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뒤, 수연도 혼자 그 온실을 다시 찾았다. 프림은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얼음 꽃 옆에 새로 심어진 작은 화분을 보여주었다.
"이건 뭐예요?"
"라면사장님이 부탁하신 거예요. 아직 씨앗 상태긴 한데."
"사장님이요? 무슨 씨앗인데요?"
"그건 저도 몰라요. 사장님이 직접 가져오신 거라."
수연은 그 작은 화분을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흙 속에 묻힌 씨앗은 아직 아무런 싹도 틔우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도 얼려야 하는 거예요?"
"아니요, 이건 그냥 평범하게 키우는 거예요.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건 얼려두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자라게 두고 싶다고."
수연은 그 말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얼려둔 것과, 자연스럽게 자라게 두는 것. 그 두 가지를 나란히 심어둔 라면사장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씨앗, 뭐가 될지 저도 궁금하네요."
"저도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 알게 되겠죠."
프림이 웃으며 답했다. 수연은 그 작은 화분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조용히 온실을 나섰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정체 모를 무언가가 천천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우연히도 가게에 수연과 이리스 단둘만 남게 되었다.
라면사장은 재료를 구하러 잠시 이웃 도시까지 다녀와야 했고, 소예와 비아는 세레나와 함께 밤 산책을 나간 참이었다. 두 사람은 마감을 겸해 가게를 지키며, 오랜만에 여유로운 밤을 맞이했다.
"오늘따라 조용하네요."
이리스가 카운터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런 날도 있어야지."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남은 재료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리스 옆에 나란히 앉았다.
"신입, 심심하면 뭐 얘기라도 할까?"
"무슨 얘기요?"
"그냥, 아무거나."
두 사람은 그렇게 별다른 목적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 손님들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소한 질문들.
그러다 이리스가 문득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는…… 여기 오기 전엔 어떤 사람이었어요?"
수연은 그 질문에 순간 말을 멈췄다. 평소라면 얼버무리고 넘어갔을 질문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나."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나, 세계를 파멸시킬 수 있는 마녀였어."
이리스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했지."
그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리스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상상했던 어떤 대답보다도, 훨씬 더 무거운 고백이었다.
"……그거, 진짜예요?"
"응. 나도 아직,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했어."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으로 무엇을 했는지, 그녀는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만을 담담하게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럼…… 그 세계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
"몰라. 아마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대로 멈춰 있거나."
"돌아가고 싶어요?"
수연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니. 이제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 것 같아."
이리스는 그 대답을 듣고, 자신도 뭔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도…… 얘기해도 될까요?"
"응, 편하게 얘기해."
"저는…… 별을 팔았어요."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별을 팔았다고?"
"네. 빛을 모으고, 꿈을 빚어서, 사람들이 걸어둘 수 있는 별을 만들었어요. 다들 좋아했고, 저는 유명해졌어요."
"그럼 그게 뭐가 문제인데?"
이리스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별을 만들었다고 인정받은 날, 저는 제 인생의 목표를 이뤘다고 믿었어요. 근데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마주한 건, 별빛이 아니라 어두운 방이었어요."
수연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이리스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때 깨달았어요. 저는 별을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라, 별이 되고 싶었던 거라구요."
이리스의 그 고백에는, 오랫동안 참아온 갈증이 담겨 있었다.
"근데 왜 별이 되고 싶은지, 그 이유는 말 안 할 거야?"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리스는 그 질문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저도 다 모르겠어요."
"그럼 천천히 알아가면 되지."
수연의 그 담백한 대답에, 이리스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눴지만, 그 이상은 서로 캐묻지 않았다.
수연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더 구체적인 것들 — 어떤 세계였는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 을 말하지 않았고, 이리스 역시 자신이 왜 별이 되고 싶어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다 털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 정도의 고백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이해했다고 느꼈다. 모든 걸 다 말해야만 진짜 친구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고마워요, 선배. 얘기해줘서."
이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나야말로. 너도 얘기해줘서 고마워."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나란히 앉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무게를 나눠 가진 뒤에 찾아오는, 편안한 종류의 침묵이었다.
"근데 신기해요."
이리스가 문득 말했다.
"뭐가?"
"우리 둘 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이유로 왔는데, 결국 같은 곳에서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잖아요."
"그러게. 신기하네."
"이것도 이 도시가 하는 일인 걸까요?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이렇게 모아놓는 거."
수연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럴지도. 근데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적어도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내 얘기를 조금이라도 꺼낼 수 있었으니까."
"저도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 옅게 웃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해도, 그 정도의 이해만으로 충분히 든든한 그런 밤이었다.
"근데 선배."
이리스가 문득 화제를 돌렸다.
"응?"
"사장님 얘기도 좀 해봐요."
수연은 그 말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가, 갑자기 사장님 얘기는 왜?"
"그냥, 요즘 둘이 좀 이상하잖아요. 뭔가 자꾸 서로 의식하는 것 같고."
"그, 그런 거 아니야!"
수연이 서둘러 부인했지만, 이리스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에이, 저 다 봤어요. 그릇 조각 주울 때 손 닿았을 때 두 분 다 얼음 되신 거."
"보, 봤어?!"
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때부터 뭔가 달라진 것 같더라고요. 선배도, 사장님도."
이리스가 계속 놀리듯 말했다.
"몰라, 나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어."
수연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냥 자꾸 신경 쓰이고, 눈에 밟히고, 심장이 이상하게 뛰어."
"그거 완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모, 몰라! 아직 확신 없어!"
수연이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감쌌다. 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진짜 귀여우세요."
"놀리지 마!"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문득 창밖으로 라면사장이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 사장님 오셨다."
이리스가 낮게 속삭였다.
"쉿, 방금 얘기한 거 절대 말하지 마."
"안 해요, 안 해. 근데 선배, 얼굴 아직도 빨개요."
"그, 그건 좀 진정시키고."
수연이 서둘러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는 사이, 라면사장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연이 서둘러 대답했다. 라면사장은 그 반응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캐묻지 않고 재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몰래 웃음을 참았다. 이 가게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는 마음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그녀는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라면사장이 재료 정리를 마치고 카운터 뒤로 들어서자, 수연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괜히 그릇을 정돈하는 척했다. 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오늘 다녀오신 데는 어땠어요?"
이리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괜찮았다. 좋은 재료들 좀 구해왔지."
"뭐 구해오셨는데요?"
"새로운 고명거리. 나중에 메뉴에 올릴 거다."
라면사장이 짧게 답하며 짐을 풀었다. 수연은 그 옆에서 슬쩍 짐 정리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그와 가까워지는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이리스는 그 은근한 흐름을 지켜보며, 두 사람이 서로 의식하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수연은 잠들기 전 이리스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과거를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꺼내본 것, 그리고 이리스의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그 모든 것이, 오늘 밤 그녀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고 라면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느꼈던 그 부끄러움조차,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정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이 마음, 언젠가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잠에 들었다. 가게 밖으로는 별들이 여전히 차갑게, 그러나 다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이리스도 자신의 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수연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꺼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진짜 마음을 숨겨왔던 그녀에게, 이런 종류의 솔직함은 낯설고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무대 스케치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관객석에서 본 시점으로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그녀는 문득, 언젠가 저 그림들 중 하나에 무대 위에서 본 관객석을 그려 넣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선배는 자기 세계를 파멸시켰다고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 있잖아. 그럼 나도, 언젠가는……'
그녀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은 그 답을 찾을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오늘 밤의 대화가 그 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리모컨을 매만지며, 열 번째 버튼을 살짝 눌러보았다.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 어둠이 예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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