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59화. 대본 밖의 말과 장부 속의 마음
도시 초입에는 작은 여관 하나가 있었다.
그 여관을 지키는 이는 넬 브래스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 서서, 늘 같은 말로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
넬은 원래 이 도시가 생기기 전, 어느 끝난 이야기 속의 조연이었다. 정해진 몇 마디의 대사만을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존재.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대본은 그녀 안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정확히 같은 억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외의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수연은 배달을 나갈 때마다 그 여관 앞을 지나며 넬과 인사를 나누곤 했다.
"안녕하세요, 넬 씨."
"어서 오세요."
"저 손님 아닌데……."
"어서 오세요."
수연은 그 반복되는 인사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그저 웃으며 넘겼다.
"오늘도 손님 많아요?"
"어서 오세요."
넬은 그 질문에도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마치 그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연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안타까웠다. 넬에게도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그 대본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넬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입은 늘 같은 말만 반복했지만, 그 눈빛만은 매번 조금씩 다른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반가움, 혹은 아주 옅은 피로함, 때로는 알 수 없는 그리움까지.
"넬 씨, 눈으로는 되게 많은 말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수연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넬은 여전히 같은 대답을 했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는 걸 수연은 분명히 보았다.
라면사장은 그런 넬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 원래 저런 건가요?"
수연이 물은 적이 있었다.
"오래된 대본이 몸에 새겨진 거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그 역할이 남아 있는 거지."
"그럼 다른 말은 아예 못 하는 거예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해본 거겠지. 오랫동안."
라면사장의 그 말에는, 넬에 대한 담담한 이해가 담겨 있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억지로 밀 수는 없다. 근데……."
그가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주 찾아가서, 다른 말을 들려주는 것 정도는 도움이 될지도."
그날 이후, 수연은 배달을 나갈 때마다 넬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 좋네요."
"어서 오세요."
"저 라면가게에서 왔어요."
"어서 오세요."
"넬 씨는 라면 좋아해요?"
"어서 오세요."
매번 같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수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건넸다. 그녀는 넬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 무표정 속에서도,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는 걸 그녀는 눈치챘다.
이리스도 그 이야기를 듣고 동참했다.
"제가 조명 좀 비춰드려도 될까요? 여관 입구가 좀 어두운 것 같아서."
이리스가 드론 하나를 띄워 여관 입구를 은은하게 비췄다. 넬은 그 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미세한 감사의 빛이 스치는 걸 이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넬 씨, 이 빛 마음에 드세요?"
"어서 오세요."
"그거 말고 다른 말도 해보세요. 예를 들면…… '고마워요' 같은 거."
넬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마치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듯,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결국,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어서 오세요."
며칠이 지나도 넬의 대본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볼도가 야간 순찰을 마치고 여관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넬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어서 오세요."
"저는 손님이 아니라 순찰 중인데."
"어서 오세요."
볼도는 그 반복에 옅게 웃으며,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넬 씨, 매일 이 자리를 지키시는 거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서 오세요."
"저도 매일 같은 길을 걷지만, 가끔은 그 반복이 힘들 때가 있거든요. 근데 넬 씨는 그걸 매일 웃으며 하시니까요."
그의 그 말에, 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 놀라움과 비슷한, 그러나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날 밤, 볼도는 그 짧은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여관 앞을 지나며 넬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어서 오세요."
"저 어제 순찰 나가기 전에, 넬 씨 생각이 나서 이거 하나 가져왔어요."
그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미오 파렛의 우편함에서 자신이 써넣었던 그 시들 중 하나를, 따로 옮겨 적어온 것이었다.
넬은 그 종이를 받아 들고, 오래도록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요."
그녀는 여전히 같은 말을 했지만, 그 종이를 받아 든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며칠 뒤, 수연이 다시 그 여관 앞을 지나가던 날이었다.
"넬 씨, 오늘도 안녕하세요."
수연이 인사를 건넸다.
넬은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어서, 오세요."
그 말은 여전히 같은 대사였지만, 그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 다른 말을 하려다, 결국 익숙한 대본으로 돌아온 것처럼.
수연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기뻐했다.
"넬 씨, 방금 뭔가 다른 말 하려고 하셨죠?"
넬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처음으로 분명한 갈망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수연이 배달을 마치고 그 여관을 지나던 저녁이었다.
넬은 여느 때처럼 문 앞에 서 있었다. 수연은 배달을 마치고 다시 가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저 갈게요, 넬 씨."
수연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넬은 그 인사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처음으로 대본에 없던 말이 흘러나왔다.
"……잘 다녀오세요."
수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떴다.
"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잘 다녀오세요."
넬이 다시 한번, 또렷하게 그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옅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수연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넬 씨! 방금 대본에 없던 말 하신 거예요!"
"……그런가 봐요."
넬이 스스로도 놀란 듯 답했다. 그녀는 그 짧은 문장 하나를 말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는지 이제야 실감하는 듯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냥…… 당신이 매일 인사해줄 때마다, 저도 뭔가 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쌓였던 것 같아요."
넬의 그 말에, 수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잘하셨어요, 넬 씨. 진짜 잘하셨어요."
그날 저녁, 수연은 가게로 돌아와 이 소식을 라면사장에게 전했다.
"사장님! 넬 씨가 드디어 다른 말을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잘 다녀오세요'라고요!"
라면사장은 그 소식에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됐군."
"그쵸? 저 진짜 기뻤어요."
수연이 신이 나서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라면사장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밝은 표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너는, 사람들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저요?"
"그래. 저 여관 여자도, 네가 매일 찾아가지 않았으면 아직 그 대본 안에 갇혀 있었을 거다."
수연은 그 칭찬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의 인정 한마디가,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그날 밤, 넬은 여관 앞에 홀로 서서 별을 올려다보았다.
"잘 다녀오세요."
그녀는 그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되뇌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한 그 말이, 그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는 "어서 오세요"와 "잘 다녀오세요" 외에도, 더 많은 말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오늘 밤은 충분히 벅찼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 수연은 그 여관의 불빛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 도시에서는, 매일 조금씩 이런 작은 기적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가게에 도착한 그녀는, 라면사장과 나란히 마감을 정리하며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근데 사장님, 넬 씨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말만 반복했을까요?"
수연이 문득 물었다.
"오래 하다 보면, 그게 자기인 줄 알게 되는 거다. 대본이 곧 자기라고 믿어버리는 거지."
"그럼 우리도 그럴 수 있어요? 뭔가에 갇혀서, 그게 진짜 자기인 줄 착각하는 거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사장님도 그런 거 있어요?"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그 짧은 대답에, 수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늘 담담하고 흔들림 없어 보이는 그가, 자신도 모르게 갇혀 있는 어떤 틀이 있는 건 아닐지.
"그거, 저랑 같이 깨보실래요?"
수연이 장난스럽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말에 순간 손을 멈췄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지는 게 보였다.
"……생각해보마."
그가 그렇게 얼버무리며 다시 정리에 집중했다. 수연은 그 반응에 웃음이 났다. 오늘 넬이 대본 밖의 말을 꺼낸 것처럼, 어쩌면 이 사람도 언젠가 자신만의 틀을 깨고 나올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며칠 뒤, 세레나가 순찰을 마치고 가게에 들러 반쯤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저 오늘 심심한데 뭐 재밌는 거 없어요?"
"재밌는 거라니."
"외상장부 좀 봐도 돼요? 이 도시 회계 감사 차원에서."
라면사장은 그 말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별생각 없이 장부를 건넸다.
"봐라. 볼 것도 없다."
세레나는 그 장부를 펼쳐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녀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장님, 이거 봐요. 여기 '웃음 3회 미납'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아, 그거."
"이게 뭐예요?"
"어떤 손님이 돈 대신 웃어주기로 했다. 근데 아직 안 웃었지."
세레나는 계속 장부를 넘기며 다른 항목들도 발견했다.
"여기는 또 뭐예요? '포옹 1회, 미이행'."
"그것도 사연이 있다."
"들어볼 수 있을까요?"
라면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어떤 손님이, 돈이 없어서 포옹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근데 막상 하려니 부끄러워서 도망갔지."
"그래서 아직도 미수금으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 언젠가 다시 오면 받으려고."
세레나는 그 이야기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장부, 진짜 이 가게의 숨은 역사책이네요."
그녀는 계속 페이지를 넘기며 더 많은 진기한 항목들을 발견했다. '별똥별 목격담 공유로 대체', '눈사람 만들어주기 약속', '이야기 하나 들려주기'. 그 하나하나가, 이 가게를 거쳐간 사람들의 소소한 순간들을 담고 있었다.
세레나는 그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회수 불가능한 채권이잖아요."
"원래 못 받는 돈이다."
"그럼 왜 적어두세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적어두면, 잊지 않으니까."
세레나는 그 말의 무게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못 받을 돈인데, 잊지 않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여기 왔었다는 거, 그리고 나한테 뭔가 약속했다는 거. 그걸 기억하고 싶은 거지."
세레나는 그 대답에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단순한 금전 기록이 아니라, 이 가게를 거쳐간 모든 이들의 작은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이거 봐도 돼요? 첫 페이지."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순간 손을 뻗어 장부를 살짝 붙잡았다.
"……그건, 안 된다."
"왜요?"
"아직 때가 아니다."
세레나는 그 반응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장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알겠어요. 근데 이 회수 불가능 채권들, 도시 기록엔 어떻게 남겨야 할지 고민되네요."
"그냥 둬라. 어차피 나 혼자 아는 거로도 충분하다."
그날 오후, 수연이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그 대화를 전해 들었다.
"세레나 씨가 장부 감사를 했다고요? 재밌었겠다."
"의외로 재밌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세레나가 웃으며 답했다.
"어떤 거요?"
"어떤 손님은 노래 한 곡으로 값을 치르기로 했대요. 근데 아직 안 불렀고요."
"또요?"
"돈키호테 씨는 '정의로운 행동 1회'로 값을 치르기로 했는데, 뭐가 정의로운 행동인지 아직도 고민 중이래요."
수연은 그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완전 돈키호테 씨답네요."
"근데 진짜 신기한 게 뭔지 알아요?"
세레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뭔데요?"
"이 장부에 적힌 사람들 중에, 진짜로 돈으로 갚은 사람보다 이런 이상한 걸로 갚기로 한 사람들이 더 많아요."
"그건 왜 그럴까요?"
"아마…… 이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돈보다 더 중요한 걸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마음이라거나, 이야기라거나."
세레나의 그 통찰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도 이 가게에서 지내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저도 여기 처음 왔을 때, 돈 한 푼 없었잖아요. 근데 사장님이 그냥 받아주셨죠."
"그때도 뭔가 적어두셨어요?"
수연이 궁금해서 라면사장에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옅은 미소로 답했다.
"……적어뒀지."
"뭐라고요?"
"그건 비밀이다."
"에이, 뭐예요!"
수연이 투덜거렸지만, 그 비밀스러운 대답이 오히려 그녀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근데 이 장부, 보면 볼수록 신기해요."
세레나가 문득 말했다.
"뭐가요?"
"보통 회계 장부라면 숫자만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요. 이게 단순한 회계가 아니라, 이 도시의 작은 역사 같아요."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옅게 웃으며 답했다.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다. 그냥 잊지 않으려고 적어두는 거다."
"그것 자체가 거창한 거예요, 사장님은 몰라서 그러시는 거고."
세레나의 그 말에, 라면사장은 뭐라 답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저도 하나 만들어볼까요. 이 도시 전체의 그런 장부."
세레나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돈 안 되는 것들 다 적어두는 장부?"
"네. 이 도시에서 오가는 마음들, 약속들, 다 기록해두는 거예요. 돈으로 환산되지 않아도, 의미 있는 것들이요."
수연이 그 제안에 눈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저도요."
이리스도 마침 지나가다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라면사장은 세 사람이 신나서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며, 문득 이 가게의 오래된 장부가 이렇게 확장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럼 그 장부는, 누가 관리할 거냐."
"제가 할게요! 도시 기록 담당이니까요."
세레나가 자원했다.
"대신 제 장부의 원칙은 지켜라. 억지로 받아내려 하지 말고, 그냥 기록만 해라."
"당연하죠. 그게 이 도시의 방식이니까요."
세레나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이 가게에서 얻은 작은 영감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라면사장은 홀로 가게에 남아 장부를 다시 펼쳤다.
그는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겨보았다. 거기 적힌 이름 하나가, 여전히 흐릿하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름처럼.
'……이것도, 언젠가는 보이겠지.'
그는 그렇게 되뇌며 장부를 덮었다. 오늘 세레나가 던진 질문들 — 왜 못 받을 돈을 적어두는지, 첫 페이지에 뭐가 있는지 — 이 그의 마음 어딘가를 다시 건드렸다.
그는 문득 수연을 떠올렸다. 만약 언젠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이 장부 어딘가에 적는다면, 그것은 어떤 항목이 될까. 회수 불가능한 채권? 아니면 이미 충분히 받은 것?
그는 그 생각에 스스로도 조금 웃음이 나며, 장부를 서랍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가게 밖으로는 밤바람이 조용히 불고 있었다.
그는 문득 낮에 수연이 캐물었던 그 비밀을 떠올렸다. 그녀가 처음 이 가게에 왔던 날, 그는 정말로 장부에 무언가를 적어두었다. 다른 항목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는 서랍에서 장부를 다시 꺼내, 아주 오래된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지친 얼굴로 문을 두드린 사람. 갚을 것은, 나중에 그녀가 정한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때는 그저 이 가게의 오랜 원칙에 따라 적어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그 문장에는 이미 그때부터 그녀를 향한 어떤 특별한 마음이 스며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정한다, 라.'
그는 그 문장을 다시 한번 읽으며 옅게 웃었다. 언젠가 수연이 이 문장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답할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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