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54화. 토핑과 무대

"나도 토핑 배울래."

그날 아침, 수연이 팔짱을 낀 채 카운터 안으로 불쑥 들어서며 선언했다.

라면사장은 육수 냄비를 젓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맨날 라면 먹기만 했잖아요. 저도 뭔가 만들어보고 싶어서."

"조리는 위험하다."

"제가 검을 다루는 사람인데, 뭐가 위험해요."

수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라면사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은 계란 삶는 거부터."

"콜."


수연의 첫 도전은 반숙 계란이었다.

라면사장이 냄비에 물을 올리고, 정확한 시간을 재는 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수연은 그 설명을 절반쯤 흘려들으며, 이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거, 시간 재는 거 귀찮은데. 그냥 얼려버리면 안 돼요?"

"……뭐?"

"계란을 얼렸다가 순간적으로 녹이면 반숙처럼 되지 않을까요?"

라면사장은 그 발상에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반숙이 아니라 그냥 얼었다 녹은 계란이 될 거다."

"해봐야 알죠."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계란 하나를 손에 쥐고, 손끝에 살짝 냉기를 불어넣었다. 계란 껍데기 표면에 서리가 살짝 맺혔다.

"어, 어…… 이거 왜 이렇게 되지?"

그녀가 당황해서 계란을 살펴보니, 껍데기는 얼었지만 속은 그대로였다. 미묘하게 실패였다.

라면사장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옅게 웃음을 참았다.

"거 봐라."

"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수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계란 서너 개를 연달아 실패한 끝에, 그녀는 결국 얌전히 시간을 재는 방식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는 게 확실히 정확하네요."

그녀가 시무룩하게 인정했다.

"모든 걸 힘으로 해결할 순 없다."

"알아요, 아는데……. 그냥 한 번쯤 편법을 써보고 싶었어요."

라면사장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려다, 순간 손을 멈췄다. 그 어색한 손짓에 수연도 잠시 멈칫했지만, 둘 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계란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면사장은 자신이 방금 무슨 행동을 하려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그런 무심한 애정 표현을 해본 적이 없었다. 손님을 대할 때도, 소예나 비아를 대할 때도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방금, 몸이 먼저 움직이려 했다.

'……이게 무슨.'

그는 속으로 당황하며 헛기침을 하고는, 애써 무뚝뚝한 얼굴로 냄비 쪽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꾸만 곁눈으로 수연 쪽을 향했다. 그녀 역시 계란을 만지작거리며, 방금 그 손짓의 여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은 뭐 도전해볼까요?"

수연이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서둘러 물었다.

"오이 채썰기."

"오, 그건 자신 있어요."


그 소란을 지켜보던 비아가 카운터에 걸터앉아 참견하기 시작했다.

"수연이 요리사가 된다……이다? 그거 위험한 발상이다……이다."

"야, 나도 잘할 수 있어."

"저번에 눈 치우다가 화단 통째로 날린 사람이 누구였다……이다?"

"그, 그건 옛날 얘기잖아!"

수연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비아는 그런 그녀를 놀리듯 킬킬 웃었다.

"그래도 응원한다……이다. 실패해도 재밌을 것 같다……이다."

"실패 안 해!"

마침 소예도 그 소란을 듣고 다가와 웃음을 터뜨렸다.

"수연 씨, 저도 처음에 라면사장님한테 배울 때 진짜 많이 실패했어요. 파 써는 것도 처음엔 한쪽만 두껍게 잘려서."

"소예도 그랬어?"

"그럼요. 근데 계속 하다 보니까 늘더라고요. 수연 씨도 금방 늘 거예요."

소예의 그 격려에, 수연은 조금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수연은 오이를 도마 위에 올려두고, 검을 가볍게 뽑아 들었다.

"수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마침 주방을 지나가던 이리스가 그 광경을 보고 기겁했다.

"오이 채썰기."

"검으로요?!"

"어차피 자르는 건 다 똑같지."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검압을 아주 살짝 실어 오이를 향해 휘둘렀다. 순간, 오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얇고 균일하게 채썰어졌다. 마치 기계로 자른 것처럼 정교했다.

"어…… 이거 진짜 잘 됐는데?"

수연 자신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라면사장이 다가와 그 결과물을 살펴보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채썰린 오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드물게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쓸 만하군."

"진짜요?"

"두께가 일정하다. 이 정도면 냉면 고명으로 써도 되겠다."

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저 재능 있는 거 아니에요?"

"검압 조절이 재능이지, 요리 재능은 아니다."

"그게 그거죠 뭐."


그날, 라면사장은 수연의 검압 채썰기를 몇 번 더 시켜보며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이 정도 정교함이면……."

그가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동치미. 무를 이렇게 얇게 썰 수 있으면, 여름 한정 메뉴로 살얼음 동치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얼음 동치미요?"

"얼음을 살짝 곱게 갈아 넣은 동치미. 시원하게 먹는 여름 사이드."

수연의 눈이 반짝였다.

"저 그거 만드는 거 도와드릴게요! 얼음 가는 거면 저 완전 전문이잖아요."

"……그래, 그건 인정한다."

라면사장은 그렇게 답하며 처음으로 그녀의 재능을 순순히 인정했다. 수연은 그 인정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두 사람은 그날 오후, 함께 살얼음 동치미 시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라면사장이 무를 절이고 육수를 우려내는 동안, 수연은 그 옆에서 얼음을 곱게 갈아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손끝으로 냉기를 조절하며, 물을 아주 미세한 결정으로 얼려나갔다.

"이 정도면 될까요?"

그녀가 곱게 간 얼음을 보여주며 물었다.

라면사장이 다가와 그 얼음 결정을 살펴보았다. 그가 몸을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자, 수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의 숨결이 손끝에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딱 좋다."

그가 짧게 답하며 몸을 뗐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다는 걸 수연은 놓치지 않았다.

'……저것도 저 사람 나름의 반응인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웃음이 났다. 자신만 이렇게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만든 오이 채썰기가 성공을 거둔 뒤, 라면사장은 곧바로 다음 재료를 꺼내왔다.

"이번엔 무."

"무는 좀 두꺼운데, 될까요?"

"조절만 잘하면 된다. 아까 오이보다 살짝 힘을 더 실어봐라."

수연은 그 조언에 따라 신중하게 검을 겨눴다. 오이보다 단단한 무의 질감을 느끼며, 그녀는 검끝에 실리는 냉기의 세기를 아주 미세하게 조정했다. 처음 한 번은 두께가 고르지 않아 실패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채가 나왔다.

"오, 이번엔 진짜 잘 됐다!"

수연이 신이 나서 외쳤다.

라면사장이 다가와 그 결과물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무생채로 바로 써도 되겠군."

"그쵸? 저 이제 진짜 토핑 담당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아직 갈 길이 멀다."

"에이, 그래도 늘었잖아요."

수연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라면사장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확실히 늘었다."

그 인정의 말 한마디에, 수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녀는 그 반응을 감추려 괜히 다음 재료를 찾는 척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라면사장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협업하여 동치미 국물에 살얼음을 살짝 얹은 첫 시제품을 완성했다.

"먹어볼래?"

라면사장이 작은 그릇에 담아 건넸다.

수연은 그 그릇을 받아 한 숟갈 떠먹었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이 입안 가득 퍼지며, 살얼음이 아주 살짝 씹히는 식감이 더해졌다.

"어……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내 레시피에 네 얼음이 더해진 거니, 당연하지."

라면사장이 드물게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희 둘이 같이 만든 거네요."

수연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라면사장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

그 짧은 대답 속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따뜻한 온도가 담겨 있었다.


그날 저녁, 소예가 시제품을 먹어보고 감탄했다.

"이거 여름에 완전 인기 있을 것 같아요!"

"공식 메뉴로 올릴까 고민 중이다."

라면사장이 답했다.

"이름은 뭐로 하실 거예요?"

"살얼음 동치미. 그대로."

마고 센느도 그 소식을 듣고 부두에서 건너와 시제품을 맛보러 왔다. 그녀는 한 숟갈 떠먹고는 잠시 침묵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평가를 내렸다.

"어묵탕이랑 같이 먹으면 완벽하겠는데."

"어묵탕이랑?"

라면사장이 되물었다.

"응. 뜨거운 어묵탕 한 입, 시원한 동치미 한 입. 온도 차로 승부 보는 거지."

"그건 네 가게 메뉴랑 엮으려는 수작 아니냐."

"수작은 무슨! 순수하게 맛으로 하는 말이야."

두 사람은 또 그렇게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시네요."

"이게 싸우는 거야? 이 정도는 그냥 대화지."

마고가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이 투닥거림을 즐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라면사장 역시 겉으로는 떨떠름한 척했지만, 그 손끝은 어느새 어묵탕과의 조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한번 같이 팔아볼까."

"오, 드디어 인정하는 거야?"

"실험적으로. 여름 한정으로."

"콜!"

마고가 신이 나서 손을 내밀었고, 라면사장은 마지못한 척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두 가게의 작은 협업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수연 씨 이름은 안 넣어요? 같이 만드셨잖아요."

소예의 그 말에, 수연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됐어. 그냥 사장님 메뉴에 들어가는 걸로 충분해."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라면사장 역시 그 반응을 지켜보며,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저 얼굴, 자꾸 눈에 밟히는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이리스가 시제품을 한 숟갈 얻어먹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진짜 대박인데요? 이런 건 좀 화려하게 홍보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홍보?"

라면사장이 되물었다.

"네! 제가 드론으로 조명 좀 쏴드릴게요. '올여름 신메뉴, 살얼음 동치미!' 이렇게요."

이리스가 벌써 신이 나서 손을 휘저으며 상상 속의 조명 연출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

"에이, 손님 끌어야죠! 제가 잘하는 게 이런 거잖아요."

수연이 그 옆에서 웃으며 거들었다.

"신입 말도 일리 있어요. 이왕 만든 거 제대로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죠."

라면사장은 두 사람의 성화에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개업 첫날만. 화려한 건 안 된다."

"네네, 은은하게 갈게요!"

이리스가 신나서 대답했다. 그렇게 살얼음 동치미는 여름 한정 메뉴로 정식 채택되었고, 이리스의 조명과 함께 개업 첫날을 맞이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날 오후, 시제품 소식을 들은 세레나도 순찰 중 잠시 들러 맛을 보았다.

"이거 괜찮네요. 도시 기록에 이 메뉴, 정식으로 등재해둘게요."

"기록까지 남길 필요가 있나."

라면사장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이 도시의 모든 새로운 시도는 기록할 가치가 있어요. 특히 이렇게 두 분이 협업해서 만든 거라면 더더욱요."

세레나의 그 말에, 수연과 라면사장이 동시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협업이라고 할 것까지야."

"수연 씨가 얼음 갈아준 게 없었으면 이 메뉴, 이렇게 완성 못 했을 거잖아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고는, 다시 순찰을 위해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난 뒤, 가게 안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협업은 무슨."

라면사장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러게요. 그냥 도와드린 거죠, 뭐."

수연도 서둘러 맞장구쳤다. 그러나 두 사람 다 그 말이 그리 싫지 않다는 걸, 서로의 표정에서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밤, 가게 마감 후 라면사장은 새로 만든 메뉴판에 살얼음 동치미를 추가로 적어 넣었다. 여름 한정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는 그 옆에 아주 작게, 눈에 잘 띄지 않는 글씨로 무언가를 덧붙였다.

"검압으로 완성한 얼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글씨였지만, 그것은 그가 수연에게 건네는 나름의 인정이자, 남몰래 간직하고 싶은 작은 기록이었다.

그는 그 글씨를 쓰고 나서, 스스로도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장부를 덮었다. 요즘 들어 자신이 부쩍 이런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걸, 그는 이제 완전히 부정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가게 밖에는 어느새 초여름을 예고하는 듯한 미지근한 바람이 골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은 눈이 오는 계절이었지만, 이 가게 안에서는 이미 작은 계절의 변화가,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수연은 눈을 뜨자마자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이불 속에서 혼자 웃음을 지었다. 라면사장이 자신의 채썰기를 인정해주던 순간, 그리고 그 어색했던 손짓의 여운까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채비를 하고 가게로 향했다. 요즘 들어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즐거워졌다는 걸,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가게에 도착하자, 라면사장이 이미 카운터에서 새로운 재료들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오늘은 뭐 배워요?"

수연이 앞치마를 두르며 물었다.

"파 써는 법."

"오, 그거 오이나 무보다 어려울 것 같은데."

"실 같은 두께로 썰어야 한다. 검압 조절 좀 더 섬세하게 해봐라."

수연은 그 말에 도전 의식을 느끼며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그녀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는 라면사장의 눈빛 역시, 예전과는 조금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그렇게 파 써는 연습에 몰두하던 그 무렵, 이리스는 또 다른 배움의 자리를 조용히 넓혀가고 있었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끝에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극장 하나가 있었다.

간판은 색이 바래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앞 넓은 공터에서는 매일 저녁 작은 공연들이 열렸다. 인형극을 하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저마다의 재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리스는 그 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곤 했다.

그날도 배달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그 공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정교한 인형을 조종하며 짧은 이야기를 연기하고 있었다. 인형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저거…… 진짜 잘하네."

그녀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흩어지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방금 공연 정말 인상 깊었어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코모 리치라는 이름의 인형극 연출가였다.

"고맙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처음 뵙는 얼굴인데."

"라면가게에서 일해요. 저는 이리스라고 해요."

"아, 그 가게. 소문 많이 들었어요. 드론으로 조명을 다루신다고요?"

이리스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 골목 안에서는 소문이 빨라요. 특히 빛을 다루는 재주를 가진 사람 이야기는요."


코모는 그녀에게 자신의 인형극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도시에 온 이후로, 그는 계속 자신이 알던 이야기들을 인형으로 재현해왔다고 했다.

"근데 요즘 좀 고민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무슨 고민이요?"

"조명이요. 제 인형극은 그림자와 빛의 조화가 중요한데, 지금은 그냥 촛불 몇 개로 때우고 있거든요. 좀 더 극적인 연출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리스는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 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요?"

"제 드론들, 조명 연출 진짜 잘해요. 색깔 조절도 되고, 움직임도 자유자재로 되고요."

코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한번 봐도 될까요?"

이리스는 그 자리에서 드론 하나를 띄워 짧은 시연을 보여주었다. 드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은은한 붉은 빛에서 서서히 푸른빛으로 바뀌는 조명을 만들어냈다. 코모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거…… 이거 완전 제가 찾던 거예요!"

코모는 흥분한 얼굴로 이리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 뒤늦게 실례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손을 뗐다.

"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리스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순수한 감탄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았다. 화려한 세계에 있을 때는, 모두가 그녀의 재능을 이용하려 하거나 계산적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재주에 감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드론들, 이름이 있어요?"

코모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냥 번호로 불러요. 1번, 2번…… 이렇게요."

"오, 그럼 방금 그 붉은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뀐 애는?"

"3번이요."

"3번, 정말 대단하네요."

코모가 드론을 향해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이리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문득, 아홉 개의 드론에게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날 이후, 이리스는 매일 저녁 배달을 마치면 그 극장 거리로 향했다.

코모의 인형극뿐 아니라, 유리 오르간을 연주하는 솔 미제레라는 연주자와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솔은 특수하게 제작된 유리 파이프들을 두드리고 문질러 신비로운 음색을 만들어내는 연주자였다.

"이 소리에 어울리는 빛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솔이 말했다.

"어떤 느낌을 원하세요?"

"음, 물 위에 떨어지는 빛 같은 느낌이요. 흔들리고, 부서지고, 다시 모이는."

이리스는 그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드론 몇 대를 동시에 움직여 수면에 비친 빛처럼 일렁이는 조명을 만들어냈다.

"어…… 이거예요! 정확히 이거예요!"

솔이 감탄하며 외쳤다.

이리스는 그 반응에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빛이 다른 사람의 예술을 빛나게 하는 걸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 한편에는,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도 함께 있었다.

솔은 유리 오르간을 정리하며, 문득 이리스에게 물었다.

"이리스 씨는 원래 뭘 하던 사람이에요?"

"저요? 빛을 만들어서 팔던 사람이었어요."

"팔았다고요? 그럼 이런 조명 연출도 예전엔 돈 받고 하셨겠네요."

"네, 그랬죠.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빛을 만든다고 유명했었어요."

이리스가 담담하게 답했다. 솔은 그 말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은요? 여기서도 돈 받고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여기선 그냥……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답하며 스스로도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대답이었다. 모든 것이 거래이고 평판이었던 그 세계에서, 그녀는 순수하게 좋아서 무언가를 한다는 감각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거 좋네요. 좋아서 하는 일."

솔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스도 그 말에 따라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이리스 씨, 우리랑 같이 공연 안 해볼래요?"

며칠 후, 코모가 제안했다.

"저요? 저는 그냥 조명만 해드리는 건데."

"그 조명이 없으면 제 인형극도 반쪽짜리예요. 이리스 씨도 이 공연의 일부예요."

이리스는 그 말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저는 그냥 뒤에서 빛만 다루는 사람인데……."

"그게 왜요? 무대 뒤에서 빛을 만드는 사람도 엄연히 공연자예요."

코모의 그 말에, 이리스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는 늘 그 자리에 익숙했다. 화려한 조명을 만들고, 다른 사람이 그 빛 아래에서 주목받는 걸 지켜보는 자리. 그것이 자신에게 맞는 자리라고,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

"저는…… 뒤에 있는 게 편해요."

그녀는 결국 그렇게 답했다.

코모는 그 대답에서 뭔가 미묘한 여운을 느낀 듯,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럼 뒤에서라도, 계속 같이해줄래요?"

"네, 그건 좋아요."


그날 저녁 공연이 끝난 뒤, 코모와 솔은 이리스를 위해 작은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세 사람은 공터 한쪽에 앉아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리스 씨는 이 도시 오기 전엔 어디서 활동하셨어요?"

솔이 물었다.

"어…… 좀 화려한 곳이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하고, 시상식 같은 것도 있고."

"오, 그럼 유명하셨겠네요?"

"네, 꽤나요."

이리스는 그렇게 답하며 옅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뭔가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근데 지금은 여기서 이렇게 조명 도와주고 계시고요. 아쉽지 않으세요?"

코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리스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지금이 더 좋아요."

"왜요?"

"예전엔…… 제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앞만 보고 달렸거든요. 근데 여기 와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뭘 알아가고 계신데요?"

이리스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직 비밀이에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코모와 솔도 그 웃음에 맞춰 웃으며 더 캐묻지 않았다.


그날 밤, 비아가 우연히 극장 거리를 지나다가 이리스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신입, 여기서 뭐 하냐……이다?"

"아, 비아. 조명 도와주고 가는 길이야."

"매일 오는 것 같다……이다. 재밌냐……이다?"

"응, 재밌어."

비아는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아 텅 빈 무대를 바라보았다.

"근데 신입, 표정이 좀 이상하다……이다."

"내 표정이 어떤데?"

"뭔가 갖고 싶은데 못 갖는 얼굴이다……이다."

이리스는 그 말에 순간 움찔했다. 비아의 말은 늘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보여?"

"응. 나는 문이니까, 그런 얼굴 많이 봤다……이다. 열고 싶은데 못 여는 얼굴."

"그럼 나는 뭘 열고 싶어 하는 걸까?"

이리스가 반쯤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건 신입이 알아야지, 내가 어떻게 아냐……이다."

비아는 그렇게 답하며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평소와 달리 묘한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근데 하나는 안다……이다."

"뭔데?"

"열고 싶은 문이 있다는 거 아는 것만으로도, 반은 온 거다……이다."

이리스는 그 말에 잠시 멍하니 비아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그저 장난스럽게 넘겼을 말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고마워, 비아."

"뭘 이런 거 갖고……이다. 나 이제 간다……이다. 감독 할 일이 많다……이다."

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폴짝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리스는 그 뒷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날 밤, 이리스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 공터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무대는 이미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낮에 봤던 관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형극을 보며 웃고, 유리 오르간의 소리에 눈을 감고 몰입하던 그 표정들.

'저 표정들을 만드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상한 걸까.'

그녀는 그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빛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정의해온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정의가 요즘 들어 자꾸만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비아가 남기고 간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열고 싶은 문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반은 온 거라는 그 말. 그녀는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문득 예전 세계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을 만들었다고 인정받던 그날,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마주한 건 별빛이 아니라 어두운 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건 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별이 되는 것이었다는 걸.

그 깨달음 이후, 그녀는 계속 그 방법을 찾아 헤매왔다. 그러나 이 도시에 와서도, 그녀는 여전히 빛을 만들어 남에게 건네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대 위에 서는 것보다, 무대 뒤에서 그 무대를 빛나게 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근데 진짜 그게 편한 걸까. 아니면 그냥 익숙한 걸까.'

그녀는 그 질문에 아직 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열 번째 드론을 떠올렸다. 아직도 불이 켜지지 않는 그 드론. 다른 아홉 대는 저마다의 역할을 찾아 빛나고 있는데, 그 하나만은 여전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저것도…… 아직 자기 역할을 못 찾은 걸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품 안의 작은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그 리모컨의 열 번째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번 습관처럼 그 버튼을 살짝 눌러보곤 했다.

공터 저편에서 코모와 솔이 다음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이리스는 그 설렘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신도 언젠가 저런 설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가게로 돌아온 그녀는, 마감 준비를 하던 수연과 마주쳤다.

"오늘도 극장 거리 갔다 왔어?"

수연이 물었다.

"응, 조명 도와주고 왔어요."

"재밌어?"

"네, 재밌어요. 근데……."

이리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뭐?"

"아니에요, 그냥."

이리스가 얼버무리며 웃어넘겼다. 수연은 그 미묘한 표정을 눈치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모든 걸 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신입, 언제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나 잘 들어줘."

수연의 그 말에, 이리스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선배."

그날 저녁, 라면사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는 이리스의 표정에서 뭔가 미묘한 균열을 읽어냈지만,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저 아이…… 조금씩 뭔가를 찾아가고 있군.'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육수 냄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가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리스 역시 그 여정의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가게 밖으로는 극장 거리의 은은한 불빛이 골목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 중 몇 개는, 분명 이리스의 드론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빛의 주인은, 아직 자신이 그 무대의 일부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수연은 마감 정리를 마치고, 문득 라면사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사장님, 신입 요즘 뭔가 고민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라면사장은 그릇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 같더군."

"뭔지 아세요?"

"정확힌 모른다. 근데 짐작은 간다."

"뭔데요?"

라면사장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저 아이는, 남을 위해 빛을 만드는 것에는 익숙한데, 자기가 그 빛 안에 서는 건 아직 낯선 것 같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억지로 밀 순 없다. 때가 되면 스스로 나설 거다."

"열되 밀지 않는다, 그거요?"

"그래."

수연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이 가게의 오래된 원칙이, 이제는 그녀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근데 사장님은 그런 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사람 마음 읽는 거."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멈칫했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오래 봐왔으니까. 이 가게 오는 사람들."

"저도요?"

"……너도."

그의 그 짧은 대답에, 수연은 순간 심장이 살짝 뛰는 걸 느꼈다. 그가 자신을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는 사실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저는…… 어떤 사람 같아 보였어요? 처음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머물렀다.

"……지금 말고, 나중에 말해주마."

"에? 왜 지금은 안 되는데요?"

"아직…… 정리가 안 됐다."

그가 그렇게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다는 걸, 수연은 이번엔 확실히 눈치챘다.

'……저것도, 저 사람 나름의 균열인가.'

그녀는 그 생각에 웃음이 났지만, 애써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다. 가게 안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조용히 쌓여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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