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20화. 수연과 녹사

녹사가 가게에 자연스럽게 드나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수연은 문득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광장 근처에서 우연히 녹사와 마주쳤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오후 햇살을 쬐고 있었다.

"녹사 씨."

"수연 씨."

수연은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당신, 싸울 줄 알아요?"

녹사는 그 질문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냥. 광장에서 그 아저씨 받아낼 때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거든. 반사 신경이 진짜 빨랐어. 그런 몸놀림은 보통 훈련받은 사람한테서나 나오는 건데."

녹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옅게 웃었다.

"칼은 안 써요."

"그럼 다른 걸 써요?"

"아무것도 안 써요."

"에이, 그럴 리가. 나랑 한번 대련해볼래요?"

"대련이요?"

"응. 검 대 맨손이라도 좋고. 나 요즘 딱히 상대할 사람도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했거든."

녹사는 그 제안에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수연은 그녀가 거절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녹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다치게 하진 마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두 사람은 가게 뒤편의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소문은 금세 퍼져, 소예와 볼도가 구경하러 나왔고, 지나가던 마왕도 흥미가 동했는지 팔짱을 끼고 자리를 잡았다. 비아는 창가에 매달려 눈을 반짝였다.

"이거 내기해도 되나?"

마왕이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안 돼요."

소예가 단칼에 잘랐다.

"재미없는 것들."

마왕은 투덜대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볼도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소예는 흥분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수연 언니, 힘내요!"

"저는 누구 편도 안 들어요."

세레나도 순찰 도중 소식을 듣고 잠시 걸음을 멈춰 지켜보기로 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두 사람의 자세를 살폈다.

"준비됐어요?"

수연이 목검을 들며 물었다. 실전용 검은 위험할 수 있어 나무로 만든 연습용 검이었다.

"네."

녹사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자세를 잡았다. 정확히는, 자세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편안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진짜 그렇게 서 있을 거예요?"

"네."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목검을 휘둘렀다. 결코 전력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속도였다.

녹사는 그 일격을 정확히, 그러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몸을 반보만 옮겼을 뿐인데, 목검은 허공을 갈랐다.

"오."

수연이 감탄하며 연이어 몇 번 더 공격을 시도했다. 찌르기, 베기, 다시 찌르기. 그러나 녹사는 매번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움직여 그것들을 흘려보냈다. 반격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때려요?"

수연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때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대련이잖아요. 이러면 재미없지."

"저는 다치기 전에 멈추게 하는 쪽이에요. 다치게 하는 쪽이 아니라."

수연은 그 말에 순간 검을 늦췄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도 그중 하나고, 상대가 스스로 멈추게 만드는 것도 그중 하나예요."

"근데 그러면 이긴 게 아니잖아요."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요. 저는 그냥…… 누군가 위험해지기 직전에 멈추게 하는 게 익숙해요."


수연은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이 가진 힘을 살짝 담아 휘둘렀다. 원인 없이 결과를 내는 그 낯선 감각을 아주 살짝 실어서.

검끝에서 얼음 결정이 반짝이며 뻗어나갔다.

녹사는 그 순간에도 침착하게 반보 물러섰다. 얼음 결정은 그녀를 스치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부서졌다.

"……방금 그건 못 피할 줄 알았는데."

"위험한 걸 미리 느껴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 담담함이, 이상하게 수연의 속을 긁었다.

"그니까 그게 좀 그런데."

수연이 검을 고쳐 쥐며 말했다.

"뭐가요?"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안 변해. 내가 뭘 하든, 얼마나 세게 나가든. 그냥 다 알고 있었다는 얼굴로 피하기만 하잖아."

"그게 왜 문제예요?"

"진짜 나랑 붙는 게 아니라, 나를 관리하는 것 같아서 그래."

"관리라니……"

녹사는 그 말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일 뿐이었다.

"봐줬잖아. 지금까지 계속. 상대해준다면서, 사실은 그냥 받아주기만 했지."

수연은 그 말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이번엔 장난이 아니었다. 원인 없이 결과를 내는 그 힘을 절반쯤 풀어놓은 채, 그녀는 진심으로 검을 내질렀다.

얼음이 검신을 타고 뻗어나가며 공기를 얼렸다. 이번엔 반보로 피할 수 있는 궤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검은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녹사가 사라진 것도, 더 빨리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검끝이 닿아야 할 자리에 아주 잠깐, 뭔가 다른 밀도의 공기가 있었다. 안개를 벤 것 같은 감각.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모양을 한 무언가를 스친 감각.

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 서늘함은 눈앞의 녹사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훨씬 더 먼 곳, 훨씬 더 오래된 감각이었다.

세계 밖의 무언가가 상대를 받쳐주고 있는 듯한 느낌. 아무리 몰아붙여도 그 뒤에 또 다른 층이 있고, 그 층 뒤에 또 다른 층이 있는 듯한, 끝이 없는 감각. 마지막으로 그 감각을 느꼈던 게 언제였는지, 수연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몸이 먼저 알았다. 이건 사람과 겨루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을.

"……너 뭐야, 진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가끔…… 사람 치는 거 같지가 않아. 뭔가 훨씬 큰 것의 그림자만 스치는 느낌이야."

가게 뒤 공터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녹사는 그 말에 놀라지도, 상처받지도 않았다. 그저 여느 때처럼 담담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죠."

"……부정 안 해?"

"부정할 것도 긍정할 것도 없어요. 당신이 뭘 느꼈든, 그건 당신 몫이니까요."

"그게 무슨 태평한 소리야."

"태평한 게 아니라……." 녹사는 잠시 말을 골랐다. "당신이 알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좋고, 모르고 지나가도 그건 그거대로 좋다는 거예요.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수연은 그 대답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화를 낼 상대도, 사과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저 자기 혼자 무언가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안. 이상한 말 했다."

"이상한 말 아니었어요."

녹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낮게 물었다.

"방금, 어디 갔다 온 얼굴이었어요."

수연은 그 질문에 순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옛날에, 비슷한 걸 느낀 적 있어. 뭔가랑 마지막으로 부딪혔을 때.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느낌만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나 봐."

"힘들었겠네요."

"힘들었다기보단…… 무서웠어. 지금도 조금."

녹사는 그 말에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수연의 떨리는 손을 살며시 감쌌다. 밤마다 누군가 무너지기 직전의 소리를 듣던 그 손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여긴 그 세계가 아니니까."

수연은 그 말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고마워."

"다시 해볼래요? 이번엔 나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볼게요."

녹사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좋아."

수연은 목검을 내리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아래로, 방금 몸을 훑고 지나간 그 낯선 감각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진짜 신기하네. 나 진심으로 상대할 사람 오랜만이었는데. 여기 온 뒤로 다들 나 무서워서 살살 하거나, 아예 안 붙으려고 하거든."

"저는 상대해준 적 없어요. 그냥 피했을 뿐이지."

"그게 상대해준 거예요. 나 혼자 치고 혼자 지치는 것보단 낫잖아."

녹사는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어릴 때 도장에서 검을 배웠어요."

수연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요?"

"응. 처음엔 그냥 취미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진짜 진지하게 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쓰는 검은 그때랑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요?"

"그땐 그냥 기술이었어요. 정해진 동작, 정해진 호흡. 근데 지금은…… 뭔가 몸 안에서 그냥 튀어나오는 느낌이에요. 배운 적 없는데도 아는 것처럼."

녹사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무섭지 않아요? 자기가 다 이해 못 하는 힘을 쓴다는 거."

"처음엔 무서웠어요. 근데 이제는…… 그냥 나구나, 싶어요."

"그거 좋은 태도예요."

"그쪽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좀 안심되네요."

녹사는 그 말에 살짝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마왕이 팔짱을 풀고 다가와 혀를 내둘렀다.

"허, 이거 재미없는 대련이군. 한쪽이 아예 안 때리니."

"그래도 재밌었어요."

수연이 헐떡이며 답했다.

"뭐가 재밌나. 일방적으로 피하기만 하는데."

"저 사람이 나를 얼마나 진지하게 보고 있는지 느껴졌거든요. 그게 재밌었어요."

마왕은 그 대답에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나도 옛날에 그런 신하가 하나 있었지. 절대 나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늘 나보다 한 수 앞서 있던 자."

"어떻게 됐어요?"

"내가 너무 늦게 그 가치를 알아봤다."

마왕은 그 말을 끝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세레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순찰을 이어가러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땀을 흘린 뒤, 두 사람은 공터 한쪽에 나란히 앉아 숨을 골랐다.

"근데 진짜 이해가 안 돼요."

수연이 말했다.

"뭐가요?"

"다치기 전에 멈추게 한다는 거. 그게 가능해요? 상대가 진심으로 덤비는데."

"가능해요. 다만 그러려면 상대가 정말로 다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내가 다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당신 검은 저를 노리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어요."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눈이 뭘 어쨌길래."

"당신 눈은 계속 저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제가 얼마나 다치는지, 제가 얼마나 힘든지. 진짜로 상대를 다치게 하려는 사람의 눈은 그렇지 않아요."

수연은 그 관찰에 조금 놀랐다. 그녀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내내 상대를 진짜로 다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는 걸, 그제야 스스로도 다시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럼 진짜로 다치게 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봐요?"

"눈이 상대가 아니라 자기 안쪽을 보고 있어요.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자기 화를 확인하러 검을 쓰는 거예요."

"그런 사람도 만나본 적 있어요?"

녹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답했다.

"몇 번요."

"그럴 때도 안 다쳤어요?"

"다치기도 했어요. 멈추게 하는 것과 다치지 않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수연은 그 대답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 속에는 그녀가 감당해온 수많은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했다.

"미리 말해줬으면 살살 할 걸 그랬어요."

"괜찮아요. 당신 건 진짜였어도 안 무서웠어요."

"왜요?"

"아까 말했잖아요. 눈이 저를 보고 있었다고."

"그거…… 되게 이상한 능력이네요."

"능력이라기보단, 그냥 오래 봐온 것뿐이에요. 사람들이 정말로 무너지기 직전인지, 아니면 그냥 힘을 쓰고 있는 건지."

수연은 그 말에 담긴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지켜봐야, 이런 구분이 가능해지는 걸까.


"근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네요."

수연이 불쑥 말했다.

"뭐가요?"

"보통 상대가 나를 안 때리고 계속 피하기만 하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근데 당신은 안 그래."

"왜 그럴까요?"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이 피하는 방식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녹사는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봐줘서."

"진심이에요. 그리고……."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좀 안심돼요. 뭔가 무너지기 직전이어도, 누군가는 알아채 줄 거라는 게."

녹사는 그 말에 시선을 떨궜다.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겨져 왔던 그녀에게, 그 말은 낯설고도 벅찬 것이었다.

"저도…… 당신처럼 정면으로 부딪혀오는 사람이 오랜만이라 좋았어요."

"저기,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요?"

"밤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 위험을 느끼면…… 정작 본인이 힘들 땐 누가 알아줘요?"

녹사는 그 질문에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은 괜한 걸 물었나 싶어 후회했지만, 이내 녹사가 낮게 입을 열었다.

"아무도요."

"……"

"그래서 좀 서툴러요. 제가 힘든 걸 표현하는 거."

"그럼 오늘부터 연습해요."

"뭘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거. 나한테라도."

녹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연습해볼게요.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나도 급할 거 없어요."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나란히 앉아 저무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공터 저편에서 소예와 볼도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둘 다 대박이었어요! 다음엔 저도 껴줘요!"

소예가 신나서 외쳤다. 비아도 창가에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다음엔 나도 볼 거다……이다!"

수연은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녹사도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조금은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 수연은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 손님으로서, 자신이 앞으로 만날 존재들 중엔 이렇게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워도 결국 마음을 나누게 되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고. 오늘의 대련은 그 첫 걸음 중 하나였다.

가게에 도착하자 라면사장이 두 사람의 땀에 젖은 몰골을 보고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뛰었나."

"대련했어요."

"누가 이겼나."

"아무도요."

"그게 무슨 대련이야."

"그런 대련도 있는 거예요."

라면사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두 그릇을 내밀었다.

"땀 흘렸으면 먹어야지."

녹사는 그 그릇을 받아 들며 잠시 손을 멈췄다.

"저도요?"

"당연하다. 대련 상대는 손님 취급 두 배로 한다."

그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가게 안 몇몇이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녹사도 그 웃음에 섞여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게 웃었다.

수연은 그 웃음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생각했다. 오늘 대련에서 진짜로 뭔가를 얻은 건 자신이었다고. 검을 나눈 게 아니라, 서로의 눈을 나눈 시간이었다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낮에 스쳤던 그 낯선 확신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언젠가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다는 감각. 그러나 그게 언제였는지 떠올리려 할수록, 기억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마치 원래 그런 것은 없었다는 듯이, 세상이 그 기억 위에 조용히 이불을 덮어버린 것처럼.

수연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그 찜찜함을 밀어냈다. 지금은 그냥, 녹사가 웃고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했다.

비아가 카운터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울었다……이다."

"누가?"

수연이 물었다.

"녹사가……이다. 웃기만 했다……이다."

수연은 그 말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밤마다 대신 비명을 질러주던 사람이,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것으로 웃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내일도 웃게 해주자."

"어떻게……이다?"

"몰라. 그냥 자꾸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거?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비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 위 문고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가게 밖, 저녁 하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빛 아래,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웃음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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