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21화. 하로 벤딕의 유리등
가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골목 안쪽, 낡은 공방 하나가 있었다. 간판도 없이 창가에 색색의 유리등만 잔뜩 매달려 있는 그곳은, 유리등 수리공 하로 벤딕의 작업실이었다.
수연이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지름길로 들어섰다가, 그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에 이끌려 걸음을 멈췄던 것이다.
공방 안, 백발이 희끗한 노인이 작업대 앞에 앉아 작은 유리 조각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이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깨진 등이 조금씩 원래의 형태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뭐 하세요?"
수연이 창문 너머로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등 고친다."
"그냥 등이에요?"
"그냥 등은 아니지."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들어와서 봐라. 어차피 배달 다니는 애 같은데."
수연은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벽면 가득 걸린 유리등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다 손님들 거예요?"
수연이 둘러보며 물었다.
"그렇다."
"근데 왜 다 여기 걸려 있어요? 안 돌려주셨어요?"
하로 벤딕은 작업하던 등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벽면의 등 하나를 가리켰다.
"저건 3년 전에 맡긴 거다."
"3년이나요?"
"주인이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준비요?"
노인은 담뱃대를 물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등은 원래 어떤 집 창가에 걸려 있었다. 그 집 아들이 전쟁터에서 안 돌아왔지. 어머니는 매일 밤 저 등을 켜뒀다. 아들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올 수 있게."
"그런데요?"
"어느 날 등이 깨졌다. 어머니는 그걸 고치지 않고 그냥 나한테 맡겼다. 다시 걸 자신이 없었던 거다."
수연은 벽면을 다시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등마다 매달린 작은 이름표가 있었다. 낯선 이름들, 낯선 날짜들. 저마다의 사연이 새겨진 채로 조용히 걸려 있었다.
"저건요?"
수연이 파란빛이 도는 등을 가리켰다.
"저건 이혼한 부부 거다. 남편이 아내한테 결혼 선물로 준 등인데, 헤어지면서 깨졌다. 근데 아내가 버리기는 아까웠는지 나한테 맡겼다."
"그럼 저것도 계속 여기 있는 거예요?"
"아니, 저건 곧 찾으러 온다. 아내가 재혼한다고 하더군. 새 집에 걸겠다고."
"헤어진 남편이 준 등을요?"
"등에는 잘못이 없다. 그 안에 담겼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지. 이제 저 등은 새로운 마음을 담게 될 거다."
수연은 그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 계속 여기 걸려 있는 거예요? 영원히?"
"아니. 언젠가 그 어머니가 다시 켤 준비가 되면, 그때 찾으러 올 거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른다. 그냥 기다리는 거다."
수연은 그 대답에서 어쩐지 라면사장의 말투가 겹쳐 보였다. 이 도시의 어른들은 다들 비슷한 속도로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수연은 공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고 있을 등들이, 조용히 불을 밝힌 채 걸려 있었다.
"근데 아저씨는 등만 고치는 거예요, 아니면……"
"뭘 묻고 싶은 거냐."
"그냥, 아까 그냥 등이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하로 벤딕은 손에 든 유리 조각을 불빛에 비춰 보며 답했다.
"내가 고치는 건 유리가 아니다."
"그럼 뭔데요?"
"불이 꺼진 집에, 다시 불을 켤 이유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벽면의 등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것들이 그저 유리 세공품이 아니라, 저마다 누군가의 결심을 기다리고 있는 물건들처럼 느껴졌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등이 깨지면 사람들은 대개 그걸 계기로 불을 안 켜기 시작한다. 습관이 끊기는 거지. 근데 등을 고쳐서 돌려주면, 그 사람은 다시 불을 켤 이유를 갖게 된다. 등 자체가 이유가 되는 거다."
"그게 유리 조각 몇 개 붙이는 걸로 되는 거예요?"
"안 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거다. 유리는 하루면 붙일 수 있어도, 이유는 그렇게 빨리 안 만들어진다."
수연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가게에서 매일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 도시의 많은 것들이, 겉으로는 단순한 물건이나 행위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훨씬 깊은 무게가 담겨 있었다.
"저도 뭐 도울 거 없어요?"
수연이 불쑥 물었다.
"뭘 돕겠다는 거냐."
"그냥. 저 라면가게에서 배달만 하는데, 가끔은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서요."
하로 벤딕은 잠시 그녀를 살피다가 유리 조각 하나를 건넸다.
"저기 저 등, 손잡이 부분만 좀 다듬어봐라. 조심해서."
수연은 그 작은 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 노인이 시키는 대로 사포로 가장자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손끝이 서툴렀지만, 그녀는 신중하게 작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하면 돼요?"
"어. 잘한다. 손끝이 제법 야무지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작업에 몰두했다. 공방 안에는 유리 부딪히는 소리와, 사포가 스치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아저씨는 원래 뭐 하던 분이세요?"
수연이 문득 물었다.
"유리공이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여기 오시기 전에요?"
"그래."
"왜 유리공이 되셨어요?"
하로 벤딕은 잠시 손을 멈추고 담뱃대를 다시 물었다.
"내 손으로 뭔가를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보다, 깨진 걸 다시 이어 붙이는 게 더 좋았다. 완전히 새것보다, 흉터가 남아도 다시 쓸 수 있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거든."
"흉터가 남아도요?"
"그럼. 오히려 흉터가 있어야 그 등이 겪은 시간이 보인다. 완벽하게 새것처럼 고치는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안 하는 거다."
수연은 그 말에 자신의 검을 떠올렸다. 원인 없이 결과를 내는 힘,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일부가 된 그 낯선 감각. 어쩌면 그것도 흉터처럼, 굳이 지우지 않아도 되는 것일지 몰랐다.
"근데 이건 원래 배달이 아니잖아요."
작업을 마친 수연이 문득 말했다.
"그렇지."
"제가 자청해서 하는 거예요. 이런 것도 해도 되죠?"
"뭐가 문제냐."
"그냥…… 라면사장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요."
하로 벤딕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옅게 웃었다.
"그게 제일 오래가는 거다. 시켜서 하는 건 시키는 사람이 없어지면 끝나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안 끝난다."
수연은 그 말에 뭔가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도시에 온 이후 처음으로,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한 순간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하로 벤딕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
그는 작업대 서랍에서 작은 유리등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은은한 주황빛이 도는 등이었다.
"이거 가져가라."
"이게 뭔데요?"
"오늘 네가 다듬은 조각으로 만든 거다."
수연은 놀라 등을 받아 들었다. 그 안에서 따뜻한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왜 저 주시는 거예요?"
"첫 작업 기념이다. 그리고……." 노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너도 언젠가 이 등처럼, 불이 꺼졌다가 다시 켜질 날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 이걸 보면서 기억해라. 다시 켤 이유는, 결국 스스로 만드는 거라는 걸."
수연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져 등을 꼭 안았다.
"고맙습니다."
"또 와라. 손 필요할 때 부르마."
공방을 나서기 전, 수연은 문득 그 3년 된 등을 다시 돌아보았다.
"저 등요, 진짜 언젠가 찾으러 올까요?"
하로 벤딕은 그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답했다.
"온다."
"어떻게 확신해요?"
"매달 한 번씩, 그 어머니가 여기 온다. 등을 찾으러 오는 게 아니라, 그냥 창밖에서 등이 잘 있는지 보러 온다."
"직접 안 들어오고요?"
"아직은. 근데 지난달엔 문 앞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그전엔 골목 어귀에서만 서성였는데."
"그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거네요."
"그렇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움직인다. 한 번에 확 바뀌는 게 아니라, 아주 조금씩."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에서 만난 많은 것들이 그랬다. 녹사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포목점 주인의 사과도. 전부 한 번에 되지 않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들이었다.
"저도 언젠가 저 어머니가 등 찾으러 오는 날 보고 싶어요."
"그럼 자주 들러라. 그날이 언제일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되죠?"
"당연하다. 여긴 아무나 들어와도 되는 곳이다. 저 라면가게처럼. 다른 게 있다면, 저긴 배를 채워주고 여긴 불을 채워준다는 것 정도지."
수연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이 도시 곳곳에 이렇게 닮은 문턱을 가진 곳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가게로 돌아온 수연은 카운터 한쪽에 그 작은 등을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은은한 주황빛이 저녁 어스름 속 가게 안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이거 뭐야?"
소예가 다가와 물었다.
"내가 만든 거야. 하로 벤딕 아저씨네서."
"직접 만든 거야? 대박이다."
소예가 등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감탄했다.
"이거 손잡이 부분, 진짜 직접 다듬은 거야? 완전 티 안 나는데."
"티 안 나는 게 좋은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되게 자연스럽다는 뜻이야. 처음 하는 거치곤."
"아저씨가 옆에서 계속 봐주셨거든. 나 혼자였으면 다 깨 먹었을걸."
소예는 그 등을 조심스럽게 다시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도 언니 따라가도 돼? 다음에 갈 때."
"당연하지. 근데 아저씨가 조수 필요하실지는 모르겠다."
"에이, 손 많으면 좋지. 나도 뭔가 만들어보고 싶어."
라면사장도 그 등을 흘끔 보며 물었다.
"오늘 배달은 다 마쳤나."
"응, 마치고 나서 그냥 들렀어. 도와드리고 싶어서."
"시킨 적 없는데."
"그러니까 더 좋은 거잖아."
라면사장은 그 대답에 옅게 웃으며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손님상을 정리하며 그 작은 등을 흘끔 다시 바라보았다.
"잘 챙겨둬라. 저런 건 흔히 안 주는 거다."
"알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수연은 그날 밤, 카운터에 놓인 작은 등불을 바라보며 하로 벤딕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다시 켤 이유는 결국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 그녀는 그 말이 비단 등불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비아가 그 등 앞으로 다가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예쁘다……이다."
"그치?"
"직접 만들었다는 게 더 예쁘다……이다."
"내일도 갈 거야, 거기."
"왜……이다?"
"도울 게 있으면 돕고 싶어서. 딱히 이유는 없어. 그냥 좋아서."
비아는 그 대답에 한참을 생각하다 작게 웃었다.
"그게 제일 좋은 이유다……이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서 하는 일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의 차이를 오늘 처음으로 몸으로 배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차이가, 앞으로 이 도시에서 그녀가 만들어갈 많은 순간들의 기준이 될 것 같았다.
라면사장은 마감 정리를 하며 그 작은 등불의 빛이 카운터 위에 은은하게 번지는 걸 지켜보았다. 하로 벤딕이 만든 등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걸려 있듯, 이 가게에도 언젠가 그런 시간들이 조금씩 쌓여갈 것이었다.
그는 문득 가게 한쪽,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낮은 의자와 붉은 테두리 그릇을 바라보았다. 저것도 언젠가는, 하로 벤딕의 등처럼 제 주인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그 역시 알 수 없었지만, 문을 열어두고 기다리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로 벤딕이 매달 등을 살피러 오는 어머니를 묵묵히 기다리듯, 그도 매일 그 빈자리를 조용히 닦아두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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