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64화. 황룡전 (중) — 격돌
수연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검끝에 냉기를 모아, 거대한 얼음창 하나를 만들어 던졌다. 지금까지 수백 번을 반복해온 동작이었다. 청룡의 비늘을 뚫었고, 백호의 발톱을 막아냈던 바로 그 일격이었다. 얼음창은 정확히 거수의 앞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거수는 피하지 않았다. 그 다리에 얼음창이 닿는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부서지는 소리도, 박히는 소리도 없었다. 대신 그 얼음창은 마치 거울에 비친 상처럼, 거수의 몸에 닿은 그 지점에서 그대로 방향을 반전시켰다.
그리고 정확히 같은 속도로, 정확히 같은 크기로— 수연을 향해 되돌아왔다.
"…어?"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얼음창이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얕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그 상처를 내려다보며, 순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내 거잖아……"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익숙한 냉기, 익숙한 궤적, 익숙한 무게.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어깨에 와닿는 순간, 그녀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손이, 갑자기 다른 사람의 손처럼 낯설게 자신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녀의 발치, 완벽하게 평평하던 대지 위에 처음으로 얼음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이 세계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흔적이었다. 지금까지 이 땅은 아무것도 새기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거수 사이에서 오간 이 짧은 충돌 하나가, 처음으로 그 매끈한 표면에 작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검격 자체였다. 얼음의 날을 세워, 정확한 궤도로 거수의 목덜미를 향해 베어 넣었다.
그 검격도 거수의 몸에 닿는 순간 반사됐다. 똑같은 궤도로, 똑같은 속도로, 그녀를 향해 되돌아왔다. 그녀는 급히 검을 세워 막았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 손목 전체에 저릿한 반동이 퍼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힘의 크기를,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되돌려받는 감각이었다.
"…이거 뭐야, 진짜." 그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몇 번을 더 시도했다. 얼음 발판을 밟고 뛰어올라 각도를 바꿔 공격했지만, 반사되어 돌아오는 일격은 언제나 그녀가 날린 것과 정확히 같은 방향에서, 정확히 같은 힘으로 그녀를 향했다. 마치 그녀 자신이 허공에 만든 거울을 보며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 거울 속의 자신이,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정확히 같은 동작으로 마주 베어오는 싸움.
한 번은 발판이 깨지는 틈에 반사된 일격을 온전히 맞았다. 그녀의 옆구리에 익숙한 냉기가 파고들었다. 그녀 자신의 얼음이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오히려 더 아팠다. 상대의 힘이었다면 그저 아픈 데서 끝났을 것을, 자신의 것이 자신을 찌르는 감각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몸은 그 공격이 위험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는데도, 동시에 그 공격의 결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피할 타이밍을 매번 반 박자 놓쳤다.
"…내가 나한테 지고 있네." 그녀가 피를 닦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이번엔 하나의 큰 일격 대신, 잘게 쪼갠 얼음 조각 수십 개를 한꺼번에 흩뿌렸다. 넓게 퍼진 공격이라면,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도 그만큼 흩어져 힘이 약해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거수의 몸에 닿은 얼음 조각들은, 각각 부딪힌 지점에서 정확히 그 자리 그대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흩어지지도, 뭉치지도 않았다. 수백 개의 작은 상처가 그녀의 팔과 다리 곳곳에 동시에 새겨졌다. 마치 온몸의 피부 표면 전체가 한꺼번에 얇게 베인 것 같았다. 아까의 큰 상처와는 또 다른 종류의 통증이었다— 깊지는 않지만, 넓고, 집요하고, 어디를 먼저 감싸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드는 통증.
"…분산도 안 통하네." 그녀가 헐떡이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번엔 검을 크게 휘둘러, 반원 형태의 얼음 칼날을 만들어 거수의 다리를 노렸다. 그 칼날 역시 닿는 순간 반전되어, 정확히 같은 반원의 궤적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베고 지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녀는 한쪽 무릎을 대지에 찧었다. 완벽하게 평평한 그 바닥에, 그녀의 무릎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몇 번을 더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다— 낮게 깔아 치는 일격, 높이 띄워 내리찍는 일격, 짧고 빠른 연속 공격. 방식이 무엇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녀가 만든 모든 힘이, 정확히 같은 무게로 그녀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검이 안 되면, 마법이었다.
수연은 크게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허공에 얼음 창 백 자루를 도열시켰다. 창끝들이 일제히 빛을 머금는 그 광경은, 그녀가 무대 위에서 수백 번 펼쳐 보인 익숙한 진형이었다. 일제 사격. 백 발의 창이 거수의 몸에 닿는 순간— 백 발 전부가 각자의 접점에서 그대로 반전되어 돌아왔다. 하늘 절반이 자기 창으로 뒤덮이는 광경을 올려다보며, 수연은 몸 앞에 다층 방벽을 겹겹이 둘러 세웠다. 창이 방벽에 박히는 소리가 폭우처럼 쏟아졌고, 마지막 한 겹에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에야 그 비가 그쳤다. 방벽을 해제하는 손끝이 후들거렸다. 간신히— 정말 간신히였다.
다음은 폭풍이었다. 하늘을 통째로 덮는 빙설 폭풍, 그녀가 광역전에서 꺼내 드는 제압기. 눈보라의 소용돌이가 거수를 중심으로 몰아쳤고, 그 가장자리가 거수의 몸에 닿는 순간 폭풍 전체가 뒤집혔다. 소용돌이의 눈이 거수에게서 그녀에게로 옮겨왔다. 되돌아온 폭풍은 그녀가 급히 세운 방벽을 순식간에 통째로 얼려버렸다— 얼음이 얼음에게 얼어붙는, 말이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방벽째 갇히기 직전에 스스로 그것을 부수고 굴러 나왔다. 입안 가득 눈가루의 맛이 씹혔다.
던지는 힘이 안 되면, 움직이는 몸은 어떨까. 수연은 눈가루를 뱉으며 제 옆의 허공에 마력을 부어, 자신과 똑같은 윤곽 둘을 세웠다. 복제체 둘이 좌우로 갈라져 거수에게 달려들었다— 일격이 아니라 몸이라면, 저 거울도 셈이 복잡해질지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복제체의 검이 거수의 몸에 닿는 순간, 되돌아온 것은 검격이 아니었다. 거수의 표면에서 그녀와 똑같은 윤곽 둘이 그대로 걸어 나왔다. 같은 얼굴, 같은 검, 같은 무게중심. 그녀의 복제체와 거울의 복제체가, 완벽하게 평평한 대지 위에서 서로를 베기 시작했다. 넷 다 그녀였다. 그리고 첫 합이 갈리기도 전에— 거울 쪽의 그녀 하나가,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복제체의 복제체라, 그 근육 기억까지 고스란히 비쳐 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무대 인사를 하고, 자신이 그 인사하는 자신을 베려 드는 광경.
수연은 그 광경을 끝까지 보지 않고 손을 내저어 마력을 통째로 거둬들였다. 넷의 윤곽이 한꺼번에 빛으로 풀어져 흩어졌다.
"…이건 좀 아니다."
절하는 자기를 베는 자기를 구경하는 취미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힘도 몸도 아닌, 수는 어떨까. 수연은 실체 없는 환영의 창을 먼저 날리고, 반 박자 뒤에 진짜를 물렸다— 미끼로 회피를 끌어내고 그 회피 지점에 본방을 꽂는, 뮤나 페브가 '리허설'이라 이름 붙인 페인트. 힘을 되돌리는 거울이라도, 속임수까지 되돌릴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되돌아온 것은— 환영이 먼저였고, 진짜가 그 뒤였다.
순서도, 간격도, 미끼가 그리는 궤적의 각도까지 그대로였다. 그녀가 짠 수순이 한 치의 해석도 거치지 않고, 즉시, 통째로 반사되어 돌아온 것이다. 수연은 날아온 환영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그 뒤의 진짜만 쳐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 거울은 위력만 비추는 게 아니었다. 의도까지 비추고 있었다. 가짜를 던지면 가짜라는 사실째로, 노림수를 던지면 노림수째로 돌아온다—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럼, 이것까지 돌려줄 수 있어?'
수연은 마지막 단을 꺼냈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구름이 원형으로 밀려나고, 그 너머에서 불타는 바위 하나가 끌려 내려왔다— 운석. 도시 사람들이 아예 '피날레'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그녀의 최대 화력이었다. 이 완벽하게 평평한 세계의 하늘에 처음으로 열기가 생겨났고, 그 열기가 굉음도 없이 거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거수는 피하지 않았다. 운석이 그 등의 탑 끝에 닿는 순간, 반전됐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속도, 똑같은 열량의 불타는 바위가 이번엔 수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피할 거리가 없었다. 남은 방벽도 없었다. 죽는다— 그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검을 하늘로 치켜들고, 낙하하는 운석의 심부를 향해 역주문을 꽂아 넣었다. 공연의 마지막 순서— 도시에서 '무대막'이라 부르던 그 실드로 제가 던진 운석을 받아, 관객들 머리 위 안전한 높이에서 불꽃으로 터뜨리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오늘은 실드를 펼 여유가 없어, 역주문 하나가 그 막의 몫을 대신했을 뿐이었다. 운석이 상공에서 산산이 터지며 불티와 얼음 알갱이가 뒤섞인 폭발이 하늘 가득 피었고, 그 열기가 그녀의 어깨와 팔뚝을 훑으며 옷자락을 태웠다. 충격파에 떠밀려, 그녀는 평평한 대지 위를 몇 바퀴나 굴렀다.
수연은 그을린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 하늘에 흩어지는 불꽃의 잔광을 올려다봤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샜다.
"…공연에서 하던 그대로네. 근데 오늘은 관객이 없네."
수만 명을 웃게 하던 기술이 오늘은 제 목숨 하나를 건지는 데 쓰였다. 그 사실이 우습고, 조금 서글펐다. 그리고 확실해졌다— 이 상대 앞에서는 그녀의 최대 화력조차, 고스란히 그녀 자신의 사형 선고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멀리서 지켜보던 형사와 레테는, 그 광경에서 점점 다른 무언가를 읽어내고 있었다.
"저건 시험이 아닙니다." 형사가 낮게 말했다. "저 신은 수연 씨를 다치게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정확히 같은 크기로 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수연 씨가 얼마나 강하게 나오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를 보고 있는 겁니다."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레테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건 시험이 아니라— 관찰이에요. 저 신은 지금, 수연 씨가 이 반복 속에서 뭘 걸고 있는지를 보려는 거예요."
수연은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정확히 같은 결론에 스스로 다다르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반사 공격을 다시 받아내며, 그녀는 문득 손을 멈췄다. 지금까지 그녀는 계속 더 강한 일격을 만들어 던졌다. 그리고 그 강함은, 정확히 같은 크기로 돌아와 그녀 자신을 상하게 했다. 힘을 올릴수록, 돌아오는 상처도 커졌다. 이건 힘의 시험이 아니었다. 힘으로는 절대 이 저울을 기울일 수 없는 구조였다.
'…얘, 나한테 뭘 보고 싶은 거지.'
그녀는 헐떡이며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거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던진 것을 정확히 돌려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유일하게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무엇을 던지느냐— 가 아니라, 그녀가 그 되돌아온 것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였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그 자식의 얼굴이 스쳤다. 그 나쁜 놈이 지우려는 마지막 항목. 상실도, 배신도, 자기희생도 없는 완벽한 무통의 세계. 그 세계에는 아마 이런 싸움도 없을 것이다. 되돌아오는 자신의 검에 다칠 일도, 그 아픔을 감수하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갈 일도. 그녀는 그 생각 끝에서, 자신이 지금 이 거수 앞에서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너, 내가 뭘 걸었는지 보고 싶은 거구나."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거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긍정에 가까웠다.
수연은 검을 늘어뜨렸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모든 방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강한 일격을 던질수록, 강한 상처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던지는 걸 멈추고, 돌아오는 걸 그대로 받는 것.
그녀는 방어 자세를 완전히 풀었다. 검을 고쳐 쥐지도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거수가 그 움직임에 반응해, 이번에도 그녀가 조금 전 날렸던 마지막 얼음창을 정확히 같은 크기로 되돌려 보냈다. 수연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얼음창이 그녀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이 갈라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반사된 검격이 그녀의 다리를 스쳤다. 무릎이 잠깐 꺾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여기서, 그녀의 몸과 마음이 정확히 갈라졌다.
몸은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상처마다 익숙한 냉기가 스며들어, 마치 자신의 뼛속 깊이 새겨둔 감각이 배신하듯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검은 늘 자신을 지키는 도구였다. 검을 휘두르면 상대가 다쳤고, 그녀는 안전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오래된 공식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모든 힘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다치게 했다. 그것은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자신이 믿어온 방식 자체가 무너지는 감각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문득 아주 오래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원인도 과정도 없이, 그저 무너진 결과만 남았었다. 아무도 그 대가를 대신 치러주지 않았고, 그녀 혼자 그 폐허 속에 남겨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그녀가 받는 이 상처들에는, 적어도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 선택해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고, 그 선택의 대가를 그녀 자신이 알면서 치르고 있었다. 그 차이가,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계속 서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그녀는 이 도시를 떠나오던 새벽을 다시 떠올렸다. 손을 놓지 않던 비아, 카운터의 나뭇결, 붉은 테두리의 그릇, 그리고 지금은 저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얼굴. 그녀는 이 모든 상처가, 결국 그 하나를 향해 나 있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프지 않기 위해 물러서는 것과, 아프더라도 나아가는 것— 그 둘 중 무엇이 진짜 선택인지, 그녀는 이제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 아직 눌러져 있는 그 다른 힘— 원인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강제하는 그 힘도 잠시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그 힘을 꺼내면 이 반사의 저울 자체를 부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이 싸움은 부수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만약 여기서 그 힘을 쓴다면, 그녀는 다시 한번 결과만 남기고 과정을 지우는 쪽이 될 것이었다. 그건 지금 그녀가 증명하려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 힘을 손끝에 눌러둔 채로, 다시 앞을 봤다.
'…이번엔 이 힘 없이 가는 거야. 다치는 걸 감수하고, 그냥 걸어서.'
"나는 안 물러나."
그녀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반사된 얼음창 하나가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할 듯 스쳐 지나갔다. 피가 옷자락을 적셨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면 이 앞에—"
또 한 걸음. 검격 하나가 그녀의 뺨을 스쳐, 가느다란 상처를 남겼다.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이 있거든."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피하지 않았다.
검을 늘어뜨린 채로, 피를 흘리며, 그러나 멈추지 않고.
형사가 그 광경을 보며 뛰쳐나가려 했다. 레테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지금 저건, 수연 씨의 몫이에요."
형사는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손이 떨렸다. 그는 예전 형사 시절, 인질극 현장에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협상 담당자 뒤에 서 있어야 했던 밤들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뛰어드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망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이려 했었다. 그는 그 오래된 감각을 다시 억누르며, 두 주먹을 꽉 쥔 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레테 역시, 겉으로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병들을 매만지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수연이 정말로 쓰러진다면, 그녀가 지금까지 모아온 기억의 조각 중 어느 것을 꺼내야 할지— 그녀는 그 순서를 조용히 되짚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준비가 필요 없기를, 그녀는 마음 한구석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수연은 마침내, 거수의 거대한 앞발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그녀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팔뚝도, 옆구리도, 다리도, 뺨도— 자신의 검이 남긴 흔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똑바로 서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채, 두 발로.
거수의 거대한 눈이, 그 순간 크게 열렸다.
그것은 이 세계가 생겨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완벽한 균형 그 자체였던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이 계산하지 못한 무언가와 마주한 표정이었다. 그 거대한 눈동자 안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수연은 피 묻은 얼굴로 거수를 올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이제, 좀 흔들렸어?"
거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조금 전의 침묵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판단을 유보하는 침묵이 아니라, 판단 자체가 무엇에 부딪혀 잠시 멈춰 선 침묵.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형사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내셨습니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안도와 경외가 함께 섞여 있었다.
레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을 조용히 다시 상자에 넣었다. 쓰지 않아도 되어서, 오늘은 다행이었다.
완벽하게 평평했던 대지 위에는, 이제 두 사람 사이의 짧은 격돌이 남긴 얼음 파편과 핏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세계가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그 매끈한 표면 위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새겨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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