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62화. 황룡의 세계
지난 격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 사람은 다시 짐을 꾸렸다. 수연의 팔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붕대가 감겨 있었고, 레테는 이번에도 새로 채운 유리병 몇 개를 조심스레 상자에 눌러 담았다. 형사는 수첩의 새 페이지를 펼치며, 그 위에 다음 목적지의 이름을 적으려다 멈췄다.
이름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름을 적을 필요가 없었다.
"후드가 가리키는 방향이……" 수연이 손끝으로 후드의 매듭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번엔 좀 이상해. 옆이 아니라 그냥 아래야. 아니, 정확히는— 사방에서 다 느껴져."
레테가 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원정을 떠나기 전 형사가 세레나에게서 빌려온, 이 세계들의 대략적인 배치를 그린 지도였다. 아홉 개의 영역이 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아무 이름도 적히지 않은 자리가 하나 있었다.
"청룡의 영역이 동쪽, 백호가 서쪽, 주작이 남쪽, 현무가 북쪽이었죠." 레테가 손끝으로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이 가운데 자리가, 지금까지 아무도 채워 넣지 못한 자리예요."
"황룡." 형사가 그 이름을 짧게 뱉었다.
"네."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의 수호자. 그리고 문제는— 이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가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결국 이 가운데를 지나야 귀로가 열린다는 겁니다. 우회로가 없어요."
"왜 없어?" 수연이 물었다.
"중앙이니까요." 레테가 답했다. "그가 다른 여덟 영역 사이의 균형을 잡고 있다면, 그를 거치지 않고 이 세계들을 가로지르는 길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길이 결국 그를 지나요. 그게 중앙이라는 자리의 정의니까요."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지도 위의 빈자리를 오래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지나온 여덟 개의 영역은 저마다 뚜렷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청룡의 초록, 백호의 흰빛, 주작의 붉음, 현무의 짙은 남색. 그러나 이 가운데 자리는, 지도 위에서도 그저 여백으로만 남아 있었다.
"…색이 없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마 곧 알게 되겠죠." 형사가 지도를 접으며 답했다. "모든 색을 가진 건지, 아니면 색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 없는 건지."
경계에 다다르기 전, 세 사람은 마지막 마을에서 하루를 묵었다. 백호의 영역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탓이었다. 수연은 팔의 붕대를 갈며,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인 한 명을 떠올렸다.
그 노인은 이 근방에서 나고 자라, 평생 그 경계 근처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젊은 시절엔 대상(隊商)을 이끌고 여러 영역을 오가며 물건을 나르는 일을 했었지만,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짐을 진 나귀들이 자꾸 방향 감각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기에, 결국 그 뒤로는 이 경계에서만 장사를 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저 안쪽엔, 아무도 오래 못 버텨." 노인이 지팡이로 저 멀리 지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사는 사람이 없거든. 살 수가 없어. 뭘 해도 다 그대로 돌아오니까. 농사도 안 되고, 장사도 안 돼. 심은 만큼만 정확히 자라고, 판 만큼만 정확히 돌아오는 데서는, 뭘 벌어들일 수가 없어."
"그럼 그 안쪽엔 아무것도 없어요?" 수연이 물었다.
"그분이 계시지." 노인이 조용히 답했다. "다들 그분을 화석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화석은 죽은 거잖아. 그분은— 증언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거기 서서 모든 걸 지켜보고 계신 분이거든."
형사는 그 말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화석이 아니라 증언. 그는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화석은 과거의 것이지만, 증언은 지금도 유효한 진술이었다.
다음 날 새벽, 세 사람은 그 노인의 배웅을 받으며 경계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영역의 경계를 넘는 순간부터,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이상함을 느꼈다.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발바닥이었다. 수연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자신이 걷는 방식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걸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몸을 미세하게 흔들어 균형을 잡아왔다— 발밑의 작은 돌부리, 살짝 기운 땅, 스치는 바람의 방향.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몸에 끊임없이 아주 작은 신호를 보내왔고, 그녀의 몸은 그 신호에 맞춰 무의식적으로 반응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 신호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땅은 완벽하게 평평했다.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그 평면에는 돌부리도, 기울기도, 풀 한 포기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그 위를 걷는 순간, 그녀의 몸은 오히려 휘청였다.
"…어, 잠깐." 그녀가 갑자기 균형을 잃을 뻔하며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괜찮으십니까?" 형사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평평하기만 한데, 오히려 못 걷겠어." 그녀가 발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상해. 원래 걸을 땐 조금씩 기울어지는 데 맞춰서 몸을 바로잡잖아. 근데 여기는 기울어질 데가 없어서, 오히려 내가 뭘 기준으로 서 있는지를 모르겠어."
레테도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몇 걸음마다 한 번씩 살짝 휘청였고, 그때마다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균형이란 게, 사실은 계속되는 불균형 속에서만 성립하는 거였나 봅니다." 그녀가 걸음을 고르며 말했다. "완벽하게 평평한 곳에 서니까, 오히려 내 몸이 뭘 기준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치— 몸이 할 일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형사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자신의 오랜 습관 하나를 떠올렸다. 그는 형사 시절, 현장에 나갈 때마다 늘 발밑을 먼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바닥의 재질, 기울기, 미끄러움의 정도— 그 사소한 확인이 몇 번이고 그의 목숨을 구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는, 확인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확인할 게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의 오랜 감각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늘도 마찬가지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그 맑음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다. 세 사람의 옷자락도, 머리카락도, 완벽하게 정지한 채였다. 수연은 그 정적 속에서 문득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바람이 하나도 안 불어."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이상하게, 이게 더 무서워. 폭풍보다."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게,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처럼 느껴지는군요." 형사가 낮게 말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흔들리니까요. 심장도, 숨도, 이 대지의 바람도."
레테가 그 말을 받았다.
"균형의 극한이, 정지와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녀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완벽한 수평, 완벽한 무풍. 이건 안정이 아니라— 아무것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상태예요."
세 사람은 그 낯선 감각에 몸을 적응시키며, 한참을 더 걸었다. 걷는다는 행위 하나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처음이었다. 수연은 몇 번이나 휘청였고, 그때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차라리 얼음 발판이라도 만들어서 걸을까." 그녀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결국은 이 평면 위에 놓이는 거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레테가 답했다. "몸이 이 감각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걷던 중, 레테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먼 지평선을 바라봤다. 그녀는 오랫동안 지하 보관층에서 지내온 존재였다— 삭제된 것들을 받아 담는 역할을 하며, 세상의 빛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이 완벽하게 트인 지평선은 낯설고도 어딘가 두려운 풍경이었다.
"저는 원래, 좁은 곳에 익숙한 존재예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지하에서, 병 하나하나에 담긴 것들을 정리하며 살았죠. 그런데 이렇게 사방이 트인 곳에 서니까, 오히려 뭘 어디에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세계는— 아무것도 감출 곳이 없네요."
"감출 게 없는 세계라." 수연이 그 말을 곱씹으며 말했다. "그럼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뭘 숨기고 살아?"
"아무것도 안 숨기겠죠." 레테가 답했다. "숨긴다는 건, 뭔가 기울어진 것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저는 그런 세계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저 자신조차, 망각이라는 기울어짐 위에서만 존재해왔으니까요."
그날 밤, 세 사람은 그 평평한 대지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야영을 했다. 모닥불을 피워도 연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곧게 위로만 솟아올랐다. 수연은 그 연기 기둥을 오래 올려다보며, 노바 니발리스의 가게 앞에서 봤던 굴뚝 연기를 떠올렸다. 그곳의 연기는 늘 바람을 따라 비스듬히 흩어졌었다. 완벽하게 곧은 이 연기가, 그녀에게는 오히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비아, 잘 있겠지."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럴 겁니다." 형사가 담요를 그녀 쪽으로 건네며 답했다. "떠나기 전, 손을 그렇게 오래 안 놓던 걸 보면— 아마 지금도 그 앞치마 옆을 떠나지 않고 있을 겁니다."
수연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 끝에 옅은 그리움이 스쳤다. 담요를 끌어당기는 순간, 외투 안주머니 어디쯤에서 접힌 종이의 모서리가 가슴께에 살짝 배겼다— 그녀는 그것을 꺼내 보지 않은 채, 그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지그시 눌러두기만 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조차 이곳에서는 미동도 없이, 마치 박아놓은 못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저 별도 안 움직이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여긴 진짜, 뭐 하나 흔들리는 게 없다."
레테가 모닥불 건너편에서 유리병 하나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답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저는 늘 흔들리는 것들만 다뤄왔거든요— 잊혀 가는 기억, 옅어지는 감정. 그게 흔들린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어요."
세 사람은 그 밤, 평소보다 말없이 오래 불을 지켰다. 다음 날 마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튿날 하루를 꼬박 걸은 끝에,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것은 처음엔 그저 먼 언덕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그 언덕이 실은 하나의 거대한 등이라는 게 드러났다. 소의 형상을 한 거수— 그러나 어떤 소보다도 거대하고, 그 등 위에는 오래된 탑 하나가 얹혀 있었다. 탑은 미동도 없었다. 깃발도, 종도, 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게, 황룡." 수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거수는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완벽하게 정지해 있었다.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등 위, 탑의 그림자만이 태양의 위치에 따라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탑의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다른 수호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청룡에게는 목을 감은 사슬이, 백호에게는 아마도 다른 흔적이 있었을 테지만, 이 거수의 등에는 아예 건물 하나가 통째로 얹혀 있었다. 오래된 석탑이었다. 이끼도, 균열도, 풍화의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그 탑이 지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것처럼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낡지도 않네요." 레테가 그 탑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세월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아요. 저건 방치가 아니라, 관리예요. 아주 오래, 아주 정확하게."
수연은 그 탑을 보며 문득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만난 수호자들은 저마다 몸에 상처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청룡의 목에 감긴 사슬처럼, 강제로 붙잡힌 흔적들. 그러나 이 탑에는, 붙잡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저 존재는 애초에 묶일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아니면— 묶인 것과 스스로 지키는 것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오래, 그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저건, 사슬이 아니라 그냥 저 자체인 걸까."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레테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분은, 싸워서 못 이겨요."
수연이 그녀를 돌아봤다.
"균형 그 자체라서, 가하는 힘만큼 정확히 되돌려줘요." 레테가 말을 이었다. "청룡은 계절을 붙잡혔고, 백호는—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각자 방식으로 힘을 겨룰 여지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황룡은 다릅니다. 저 분에게 어떤 힘을 가하든, 저 분은 그 힘을 그대로 되돌려줄 겁니다. 정확히 같은 크기로요. 그게 균형의 정의니까요."
"그럼 어떻게 이겨?" 수연이 물었다. "힘으로 안 되면."
형사는 그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형사로 일하며, 힘으로 풀리지 않는 사건들을 수없이 마주해왔다. 범인을 붙잡는 것보다, 그 범인 스스로 자신의 논리가 무너졌다는 걸 인정하게 만드는 게 훨씬 어려운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일수록, 결국 답은 하나였다— 상대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 그 논리가 스스로 무너지는 지점을 정확히 짚는 것.
"그럼 힘이 아니라 논리로 가야겠군요."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균형이 무너져 있다는 걸 증명하면 됩니다."
수연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논리로? 신을 상대로?"
"저 분이 균형 그 자체라면," 형사가 거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 분을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은, 저 분 스스로 자신의 저울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게 만드는 것뿐일 겁니다. 힘으로는 안 됩니다. 힘을 가하는 순간, 저 분은 그 힘을 정확히 되돌려줄 테니까요."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건 전투가 아니라— 재판이 될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저 멀리 정지한 거수를 바라봤다. 완벽하게 평평한 대지 위, 완벽하게 고요한 하늘 아래, 그 거대한 형체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침묵은 청룡의 포효보다, 백호의 그 어떤 힘보다도 무겁게 세 사람을 짓눌렀다.
"…가자." 수연이 마침내 검자루를 고쳐 쥐며 말했다. "이번엔 검보다 입이 더 바빠지겠네."
"그러시겠죠." 형사가 답하며, 먼저 그 평평한 대지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도 여전히 조금씩 흔들렸지만, 그는 그 흔들림을 애써 다잡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 사람은 그렇게, 색이 없는 지도 위의 빈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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