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39화. 실의 원리

이튿날 아침,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서기 전 잠시 짐을 정비했다. 레테는 어젯밤 수거해온 사슬의 잔해—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 옅은 빛을 머금고 있는 파편들— 를 유리병에 조심스럽게 담고 있었다.

"이거, 분석해보고 싶은 거야?" 수연이 물었다.

"네." 레테가 파편 하나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답했다. "이런 걸 직접 만져볼 기회가 흔치 않아서요."

그녀는 파편을 눈앞에 가까이 들어 올렸다. 그 표면에 남은 나이테 무늬가, 빛에 비추자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건 그 사람의 기록 권능이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신들도 '적힌 존재'라서, 이야기를 붙잡히면 묶여요. 이 파편 하나하나가, 청룡의 이야기 중 한 대목이었을 거예요."

"그럼 이게 사라지면, 청룡의 그 기억도 사라지는 거야?" 수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레테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붙잡았던 '손'의 흔적이에요. 원래 이야기는 청룡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다만 이 손이, 그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거죠."

형사가 그 옆에서 짐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럼 이 힘이 안 통하는 존재도 있습니까?"

"출발 전에 녹사 씨가 정리해줬던 그대로예요." 레테가 파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이미 끝났거나, 아예 없거나, 이야기 그 자체거나— 그 셋만 안 묶여요. 저는 그중 첫 번째고요. 근데, 이걸 직접 만져보고 나서야 그 말이 왜 사실인지 몸으로 알겠어요."

그녀는 파편 하나를 형사의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나이테 무늬가 불빛도 없는 아침 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 실은, 밖에서 가져온 재료로 짠 게 아니에요. 청룡 자신의 이야기에서 뽑아낸 올로 짠 거예요. 이 나이테 무늬— 이건 사슬의 장식이 아니라, 청룡이 살아온 시간 그 자체예요. 그러니까 묶인 존재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자기가 묶이는 거죠.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제 살을 조이는 매듭이에요."

형사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그래서 신들이 스스로 못 풀었던 거군요. 남이 씌운 사슬이라면 어떻게든 벗어냈을 텐데— 자기 이야기로 짠 사슬이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풀 수가 없는 거예요."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끝난 이야기인 저한테 실이 안 걸리는 이유도 같은 원리예요. 끝난 이야기에서는, 더 뽑아낼 올이 없거든요."

"근데,"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 게 무슨 느낌이야? 안 이상해?"

레테는 잠시 그 질문을 곱씹었다.

"이상하다기보다는— 평온해요." 그녀가 답했다. "제 몸에 남은 감각으로 비유하자면, 다 읽은 책을 덮어둔 느낌이랄까요. 책장을 넘길 이유가 더는 없는 거죠. 그래서 저는 두렵지 않아요. 두려움도 결국은, 다음 장에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거니까요."

"그럼 우리는?" 수연이 물었다. "우리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잖아."

"그래서 여러분은 두려워할 자격이 있는 거예요." 레테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두려움은 나약함이 아니라, 아직 다음 장이 남아 있다는 증거니까요."

레테는 남은 파편들을 마저 병에 담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이것 봐요."

병 안에서, 부서진 파편 두 개가 아주 느리게 서로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했다— 끊어진 단면끼리, 다시 이어지려는 몸짓이었다.

"실이… 다시 이어지려고 해요." 레테가 낮게 말했다. "쓰다 만 문장이, 스스로 완성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요."

"그럼 청룡이 다시 묶일 수도 있다는 거야?" 수연이 병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 파편들끼리는 못 잇겠죠. 너무 잘게 부서졌으니까요. 근데 이 성질 자체는 기억해둬야 해요— 그 사람의 기록은, 끊어놔도 스스로 다시 이어지려 한다는 거. 그러니까 풀어준 신들이 계속 자유로우려면, 끊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 다음 문장을, 그들 스스로 계속 써나가야 해요. 청룡이 마지막에 '내 계절을 내가 정한다'고 말한 거— 그게 그냥 작별 인사가 아니었던 거예요."

형사가 그 말을 수첩에 옮겨 적고, 밑줄을 그었다.

- 해방의 조건: 실을 끊는 것(수연의 몫) + 풀려난 존재가 자기 서사를 스스로 이어 쓰는 것(각자의 몫). 전자만으로는 언젠가 다시 묶인다.


형사가 펜을 멈추고, 문득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수연 씨의 그 힘은,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레테는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가 신중하게 답했다. "수연 씨의 힘은 이야기를 묶는 힘이 아니라, 이야기를 무시하는 힘이에요. 그 사람의 권능이 서사 위에서 작동한다면, 수연 씨의 힘은 서사 밖에서 작동하는 거죠. 그러니까 정확히는— 그 사람과 정반대의 원리예요."

수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신을 죽일 수도 있는 거고."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 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이 아무리 '적힌 존재'라도, 서사 논리 자체를 무시해버리면— 그 서사가 아무리 잘 짜여 있어도 소용없어요. 그게 이 힘이 무서운 이유이자, 동시에 유일하게 그 사람에게 맞설 수 있는 이유예요."

형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 말은, 이 힘을 제어할 방법도— 그 사람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뜻이겠군요."

"맞아요." 레테가 답했다. "그래서 저도 이 힘의 한계를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확실한 건— 이 힘이 향하는 방향은, 온전히 수연 씨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다. 서사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요."

수연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 힘을 두려운 우연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매번 그녀 자신이 정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그럼 나, 계속 정해야겠네. 이걸 어디로 쓸지."

"그러셔야 할 겁니다." 형사가 답했다.


세 사람은 짐을 정리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걸으면서 수연은 문득 물었다.

"근데 그 세 부류 말고, 자기 발로 걸어가서 붙잡힌 애도 있다며. 녹사."

레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사 씨는 조금 다른 경우예요. 그분은 이야기가 있는 존재고, 실도 걸릴 수 있는 존재예요. 다만 스스로 그 실을 받아들이러 간 거죠. 그러니까 그분의 경우엔—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 실을 억지로 끊어내는 게 아니라, 그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끊어드려야 할 수도 있어요."

"원하는 방식이라니?"

"모르죠, 아직은." 레테가 옅게 웃었다. "그건 그때 가서 알게 될 것 같아요."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후드를 매만졌다. 온기가 다시 한번,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엔 서늘하고 냉랭한 기운이 섞인 방향이었다.

"…이번엔 뭔가 다른 느낌이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다릅니까?" 형사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뭔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해가 저물자, 세 사람은 낮은 언덕 아래 바람을 피할 자리를 찾아 모닥불을 피웠다. 형사가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키우는 동안, 레테는 낮에 담아둔 유리병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병 속의 파편들이 불빛을 받아, 꺼져가는 숯처럼 옅게 명멸했다.

불이 자리를 잡자 형사는 수첩을 꺼내, 어제오늘의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문득 멈췄다.

"수연 씨. 기록에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뭔데."

"어제 쓰신 기술들 말입니다. 명칭을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땅에서 솟아난 첨주들은— 뭐라고 부르십니까?"

수연은 담요 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름? 그런 거 없는데. 몰라. 그냥 꼬챙이. 찌르는 거."

"…꼬챙이." 형사는 그대로 받아 적으려다 펜을 멈췄다. 사건 파일에 꼬챙이라고 적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미제 사건에 가칭을 붙이던 옛 손버릇대로 또박또박 펜을 움직였다. "지면 첨주형. 통칭… 가시밭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가시밭?" 수연이 피식 웃었다. "거창하네. 땅에서 꼬챙이 올라오는 게 단데."

"기록은 거창해야 나중에 찾기 쉽습니다." 형사는 진지했다. 그런 식으로 몇 개의 항목이 더— 그녀가 "그거", "큰 거", "차가운 거"라고 부르는 것들이 관청 문서 같은 이름을 받아 가며— 차례로 정리되어갔다.

"아, 그리고." 형사가 앞 장을 뒤적였다. "도시에서 촉수와 처음 마주치셨을 때 말입니다. 골목에 내려서자마자 찌르셨다고, 방벽 뒤에 있던 상인들이 그러더군요. 진술을 종합하면 마주친 순간부터 검이 꽂히기까지— 넉넉잡아 반 초. 그건 명칭이 뭡니까?"

"그것도 기술이야?" 수연이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냥 찌른 건데."

"반 초는 기술입니다." 펜이 다시 움직였다. "적성 개체 조우 시 영 점 오 초 내 선제 자돌. 통칭— 인사." 그는 항목을 다 적은 뒤,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덧붙였다. "적한테 인사성 하나는 바르시더군요."

수연이 어이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형사가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데, 수연이 모닥불을 바라본 채 불쑥 덧붙였다. 어딘가 마지못한 목소리였다.

"…하나 더 있긴 해. 직접 넣는 거."

펜이 멈췄다. "직접… 무엇을 말입니까?"

"마력을. 몸 안에다가." 그녀는 짧게 말했다. 설명은 그게 전부였지만, 형사는 그 두 마디의 뜻을 이해했다. 밖에서 때리는 게 아니라 안에서 헤집는 힘이라면— 그 안의 장기가 어떻게 되는지는, 시신을 오래 본 사람일수록 잘 안다.

"그건 이름 안 붙여도 돼." 수연이 말했다. "안 쓸 거니까."

형사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펜을 움직였다. 체내 마력 직주입 — 통칭, 무단침입. 사용 기록: 없음. 그는 마지막 두 글자에 밑줄을 그었다.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적지 말라니까."

"적었으니까 지킬 수 있는 겁니다." 형사가 수첩을 덮으며 답했다. "쓰지 않은 기록도 기록입니다. 제가 보기엔, 오늘 적은 것 중에 이게 제일 중요한 항목입니다."

레테가 병을 무릎에 올린 채,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세계도 부숴본 사람이, 정작 자기 힘에는 이름 한 번 안 붙여봤다는 게."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잖아." 수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부를 일이 없었어. 그냥 쓰면 되니까."

"그러니까요." 레테는 그 이상 말을 보태지 않고, 옅게 웃기만 했다.

수연은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아침부터 목에 걸려 있던 질문을 마침내 꺼냈다.

"…레테 씨. 아까 그거, 좀 더 물어봐도 돼? 내 힘이 서사 밖에서 작동한다는 거."

"물어보세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야? 나도… 이야기가 없는 거야? 바스티타스처럼?"

레테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손짓이었다.

"아니요. 당신한테는 이야기가 있어요. 시작이 있고, 상처가 있고,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있죠. 저는 그걸 볼 수 있어요. 다만— 당신의 힘만이, 그 이야기의 바깥에 있어요. 비유하자면… 페이지 위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수연은 그 비유를 한참 곱씹었다.

"…그럼 걔는, 나를 못 읽는 거네."

"정확히는— 읽을 수는 있는데, 계산할 수가 없는 거죠." 레테가 답했다. "그 사람의 권능은 결국 예측이에요. 이 선택 다음엔 저 선택이 오고, 이 실을 당기면 저 매듭이 풀린다는 걸 미리 아는 힘. 근데 당신의 힘은 원인과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어요. 그 사람의 장부 어디에도, 당신 힘의 다음 줄은 미리 적혀 있지 않아요."

모닥불이 타닥, 하고 튀었다.

"…그래서 그때, 내 사랑을 못 지웠나." 수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지울지 말지 계산했다며, 걔가. 근데 결국 못 지웠잖아."

"그건 제가 확언할 수 없어요." 레테가 신중하게 말했다. "못 지운 건지, 안 지운 건지— 그 차이는 그 사람 안에만 있으니까요. 다만 하나는 분명해요. 모든 게 계산대로여야 하는 존재한테, 계산이 안 되는 변수가 딱 하나 남아 있다는 것. 그건 그 사람이 만든 완벽한 세계에 뚫린, 유일한 구멍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은 그 구멍을 지금까지 메우지 못했어요."

형사가 불에 가지 하나를 더 얹으며 입을 열었다.

"수사할 때도 비슷한 게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그를 봤다.

"사건 파일을 아무리 완벽하게 짜도, 꼭 하나씩은 안 맞는 증거가 나옵니다. 시간이 안 맞거나, 동선이 안 맞거나. 그때 형사가 갈 길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증거를 중심으로 파일을 전부 다시 쓰거나— 아니면 그 증거를 서랍 깊숙이 치워버리거나." 그는 잠시 불을 바라봤다. "치워버린 쪽은, 언젠가 반드시 그 증거 앞에서 무너집니다. 제가 본 바로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걔는 치워버린 쪽이네." 수연이 말했다.

"예. 그리고 그 치워진 증거가—" 형사가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죠."

수연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 그녀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근데 그거, 무섭기도 해. 걔 논리 밖에 있는 게 나 하나뿐이라면— 결국 마지막엔, 내가 뭘 하느냐로 다 정해진다는 거잖아."

"네." 레테는 부드럽게, 그러나 피하지 않고 답했다. "그 무게는 덜어드릴 수가 없네요. 다만— 혼자 지는 무게는 아니에요. 페이지를 넘기는 게 당신 손가락이라면, 어느 페이지에서 넘길지 함께 읽어주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당신들이고."

"네. 그리고 도시에 남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이고요."

수연은 담요를 끌어당기며, 모닥불 너머의 어둠을 바라봤다. 후드 속에 남은 희미한 온기가, 그 어둠 어딘가를 여전히 가리키고 있었다.

'…계산 안 되는 변수라. 그래— 끝까지, 계산 못 하게 해줄게.'

그녀는 그 다짐을 품은 채, 낯선 세계에서의 밤치고는 드물게 깊은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길을 나서자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청룡의 세계였던 푸른 들판이 뒤로 멀어지고, 발밑의 흙이 점점 딱딱하게 얼어붙은 서리로 바뀌어갔다. 나무들도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몇 그루만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형사가 그 변화를 눈치채고 낮게 말했다.

"세계가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응." 수연이 후드의 온기를 다시 확인하며 답했다. "이 냉랭한 느낌, 아까보다 더 강해지고 있어."

레테가 주변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이 근처 어딘가에, 다음 수호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발걸음을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세 사람은 그 낯선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서리로 뒤덮인 산맥의 능선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능선 위로, 유난히 짙은 흰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마치 그 산맥 전체가 무언가를 망설이며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망설이고 있어요." 레테가 그 안개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이 세계 전체가요."

"망설여?" 수연이 되물었다.

"어제 수연 씨가 말했잖아요. 뭔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저도 이제 보여요. 이 서리, 이 안개— 전부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멈춰 있는 것들이에요. 녹지도 못하고, 더 얼지도 못하고.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정하지 못한 하늘빛까지요."

형사가 걸음을 늦추고 수첩을 꺼냈다. 그는 출발 전 비아에게 들었던 수호자들의 목록을 손끝으로 짚어 내려갔다.

"백호— 결단과 질서의 수호자. 자리는 산맥." 그가 낮게 읽었다. "결단을 지키던 존재가 붙잡히면, 그 세계는 이렇게 되는 거군요. 나쁜 결정이 내려지는 세계가 아니라—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세계."

"어떤 의미로는, 청룡의 세계보다 더 조용한 감옥이에요." 레테가 능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장이 멈춘 세계에는 그래도 반복이라도 있었죠. 근데 결단이 멈춘 세계에는— 반복조차 시작되지 못해요."

수연은 후드를 고쳐 쓰며, 검자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어제까지 남아 있던 손끝의 저릿함이,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가자. 이번엔 이름부터 알고 싸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면 비아 씨께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형사가 수첩을 덮으며 답했다. "남은 여덟의 옛 이름을요. 그때까지는— 우리가 가진 방식으로 갑니다."

세 사람의 발자국이, 서리 낀 땅 위에 나란히 찍히며 능선을 향해 이어졌다. 그 발자국들만이, 망설임으로 얼어붙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방향을 정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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