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66화. 가능성과 기억
황룡의 영역을 벗어나자 세계는 다시 울퉁불퉁해졌다. 완벽하게 평평했던 대지를 지나온 발바닥은 그제야 흙의 굴곡과 돌부리를 다시 반가운 듯 느꼈다. 저울 같던 하늘 대신, 이제는 평범하게 삐뚤빼뚤한 구름이 떠 있었다. 수연은 그 삐뚤어진 구름 한 조각을 올려다보며, 이상하게도 그게 세상에서 제일 다행스러운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귀로의 마지막 밤이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그렇게 확신하지 못했지만, 후드 안의 온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옅어져 있었다 — 더 이상 어느 세계에도 붙잡힌 신을 가리키지 않는, 그저 은은하게 데워진 채로 잠잠한 온도. 형사는 그것을 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아무도 안 부르는 것 같습니다." 레테도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내려놓았다.
발바닥의 물집은 이미 굳은살로 바뀐 지 오래였다. 처음 문턱을 넘던 날, 흙의 질감이 낯설어 숨을 참았던 그 순간을 수연은 문득 떠올렸다. 그때는 모든 세계의 흙냄새가 다 다르게 느껴졌었다. 이제는 그 냄새들이 하나하나 구분되기보다, 겹겹이 쌓여 그녀 자신의 냄새 일부가 되어 있었다. 청룡의 들판에서 묻은 풀물 자국, 백호의 능선에서 밴 서릿내, 황룡의 평원을 지나며 신발 밑창에 눌어붙은 먼지 —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걸음 속에 함께 있었다.
야영 준비는 이제 손에 익어 있었다. 형사가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는 동안, 레테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들을 하나씩 꺼내 헝겊 위에 늘어놓았다. 청룡의 목을 감았던 사슬의 잔해, 백호의 눈에서 떨어져 부서졌던 얼음 눈물 한 조각, 주작의 깃털 끝에서 떼어낸 재의 파편, 현무가 가라앉기 직전 남긴 비늘 하나. 그리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병 하나 — 떠나기 전날 밤, 그녀가 품에 안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그 빈 병을 손끝으로 오래 쓸었다.
"이거, 결국 안 채워질 수도 있겠네." 수연이 모닥불 앞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레테가 병을 다시 헝겊에 감쌌다. "안 채워지는 것도 기록이에요. 무엇이 끝내 안 채워졌는지를 아는 것도, 결국 아는 것의 일부니까요."
형사가 불씨를 살리며 물었다. "이제 만나지 못한 건 노바일라와 사일론뿐이군요. 만나긴 할까요?"
"녹사 씨 말로는 묶이지도 않고 싸우지도 못하는 애들이라고 했으니까." 수연이 검집을 손질하며 답했다. "그럼 굳이 우리가 찾아다닐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알아서 피할 텐데."
"묶이지 않는다는 건, 오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라는 뜻일 겁니다." 형사가 답했다. "다만 여태 안 왔다는 건— 아직 올 이유가 없었다는 거겠죠."
그 말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모닥불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불꽃이 옆으로 눕듯 흔들렸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똑바로 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지나간 자리, 어둠 속에서 아주 작은 빛 하나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빛은 점점 가까워지며 날개의 윤곽을 그려냈다 — 서리로 조각한 것 같은 깃털을 가진 새였다. 날갯짓에도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마치 공기를 밀어낼 필요조차 없다는 듯, 그 새는 소리도 없이 허공을 밟고 내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깃털 하나하나가 얼음이었지만, 모닥불 곁에 앉아도 녹지 않았다. 오히려 불빛을 받아 깃 끝마다 무지갯빛으로 잘게 부서졌다 — 마치 그 안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수천 갈래의 색이 다 담겨 있는 것처럼. 눈동자는 더 이상했다. 검은자위 안에서 작은 빛의 점들이 끊임없이 자리를 바꿨다.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아직 걸어보지 않은 길들이 그 안에서 서로 자리를 다투는 것 같았다.
"노바일라." 레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경계보다 존중이 앞섰다.
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인사라기보다, 그저 자기 존재를 확인시키는 몸짓이었다.
"오랜만이다." 그 목소리는 노래하듯 낮았지만, 한 음절 한 음절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너희가 오는 걸,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보고 있었다고요?" 수연이 검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럼 진작 좀 도와주시지."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노바일라가 답했다. 그 말에는 변명도, 미안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너희가 청룡을 만날지, 만나지 않을지— 그 갈림길에 내가 손을 얹으면, 그 순간 그건 더 이상 너희의 선택이 아니게 된다. 나는 그저 갈림길을 본다. 밟는 건 언제나 너희다."
형사가 수첩을 꺼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지금 이렇게 찾아오신 것도, 저희 갈림길 중 하나였습니까?"
"그렇다." 노바일라가 답했다. "다만 나는 그 갈림길 앞에 서 있을 뿐, 너희를 그쪽으로 밀지 않는다. 이렇게 나타난 지금도— 너희가 나를 무시하고 그냥 잠들 수도 있었다. 그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발소리라기보다, 발소리가 여러 겹으로 겹쳐 울리는 소리였다 — 한 걸음을 내딛는데 그 걸음이 남긴 자국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며 땅에 찍혔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걸음과, 이미 지나간 걸음과, 아직 오지 않은 걸음이 동시에 겹쳐 찍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따라, 믿을 수 없이 긴 다리를 가진 짐승 하나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형체를 드러냈다.
다리는 사람 키의 몇 배는 됐고, 관절마다 오래된 나무의 옹이처럼 두꺼운 마디가 있었다. 몸통은 딱정벌레의 등딱지처럼 단단하고 짙은 갈색으로, 표면에 무수한 잔금이 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잔금들이 상처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문자처럼 보였다.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눈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었다. 낱낱의 눈이 각기 다른 시간대를 보고 있는 듯, 눈동자마다 비치는 풍경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그 거대한 몸에서 풍기는 건 열기도 냉기도 아닌, 오래된 종이와 마른 흙이 섞인 냄새였다. 형사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도서관 냄새군요."
"사일론이다." 레테가 그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기억의 수호자."
수연은 그 거대한 몸 앞에서, 이상하게도 무섭기보다 조심스러워졌다. 사일론의 눈 하나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그 순간 수연은 자신이 지금 이 순간뿐 아니라, 아주 오래전 그녀가 지나온 모든 순간까지 동시에 읽히고 있다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우리는 묶이지 않는다." 노바일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불빛에 눈동자 속 작은 빛들이 잠깐 한 방향으로 몰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가능성과 기억은 삭제와 정면 모순이라, 그의 실이 우리에게 걸리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싸우지도 못한다. 가능성은 강요하지 않고, 기억은 개입하지 않으니까."
"그건 녹사한테 들었어요." 수연이 답했다. 목소리에 날이 조금 섰다. "그래서, 못 싸우는 애들이 지금 왜 온 건데요."
"싸우지 못한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다." 노바일라가 답했다. 그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 "나는 강요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출 수는 있다. 결전의 날, 나는 그에게— 그가 걸어올 수 있었던 모든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가 지나쳐 온 모든 갈림길, 그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문. 그것을 강제로 걷게 하진 않는다. 다만 그 문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걸, 더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들 뿐이다."
형사가 펜을 멈추고 물었다. "그건 저희에게 유리한 겁니까, 불리한 겁니까?"
"둘 다 아니다." 노바일라가 답했다. "그건 그냥— 공평이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가 지운 길들을 안 보고 걸어왔다. 나는 그 길들을 다시 보이게 할 뿐이다. 그다음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수연은 그 말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미친 새끼가 자기가 뭘 지웠는지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거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옮겨 생각했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무기보다 정확한 공격처럼 느껴졌다— 도망칠 곳 없이, 자기 손으로 지운 것들을 자기 눈으로 마주 보게 하는 것.
"그럼 사일론 씨는요?" 파빌라를 대신해 묻듯, 레테가 조용히 물었다.
사일론은 대답 대신 몸을 낮췄다. 긴 다리가 접히며, 그 거대한 몸이 모닥불 가까이로 내려왔다. 등딱지 위 잔금들이 불빛을 받아 잠깐 옅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아주 짧은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흐릿한 김이 오르는 냄비, 그 위로 뻗은 손. 손목을 살짝 꺾어 국자를 돌리는 각도, 면을 건져 올릴 때 손끝이 살짝 떨리는 습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연은 그 손의 각도만으로도 숨이 멎었다.
'…저건, 사장님 손이잖아.'
그 짧은 영상이 사라지자, 사일론의 눈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짐승이, 마침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전부. 기억한다. 그가. 라면을. 끓이던. 손의. 각도까지."
그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한 단어가 끝날 때마다 아주 짧은 정적이 끼어들었다— 마치 오래된 축음기의 바늘이 홈 하나를 넘을 때마다 잠깐 걸리는 것 같은, 그런 리듬이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늘어졌다가 뚝 끊기고 다시 이어졌다. 마치 이 목소리 자체가, 아주 오래된 기록을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재생하는 것 같았다.
수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지운다는 것, 잊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여기, 지운다는 개념 자체를 처음부터 몸에 담을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지우려 해도, 손의 각도 하나까지 살아남는 자리가 세상 어딘가엔 있었다.
"…그거." 그녀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거, 나도 몰랐던 거예요. 사장님이 국자 돌릴 때 손목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
"나는. 본 것을. 지우지. 않는다." 사일론이 답했다. 여전히 그 갈라진 리듬으로. "그것이. 나의. 전부다."
레테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럼 사일론 씨가 줄 수 있는 건— 그가 지운 기록들의 원본이겠군요."
"그렇다." 사일론이 답했다. 이번엔 그 한 마디가 이상하게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짧은 문장에는 그 특유의 끊김이 덜한 것처럼. "지워진. 것은. 없다. 다만. 가려졌을. 뿐이다. 나는. 가려진. 자리마다. 원본을. 보존해. 두었다. 결전의. 날— 그것을. 증거로. 내놓겠다."
형사가 수첩에 그 말을 옮겨 적으며 낮게 물었다. "증거라 함은, 재판의 증거 같은 겁니까?"
"그가. 삭제가. 완전했다고. 스스로. 믿는. 그. 순간에." 사일론이 답했다. "나는. 그.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연은 두 존재를 번갈아 보며 오래 생각했다. 강요하지 않는 자와, 개입하지 않는 자. 둘 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수호자보다 무서운 무기를 쥐고 있었다— 진실 그 자체였다.
"그럼," 그녀가 마침내 물었다. "당신들은 우리 편이에요?"
노바일라의 눈동자 속 작은 빛들이 잠시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편이 아니다." 그녀가 답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다. 가능성은 어느 편도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지금까지 가능성을 지워왔으므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결과적으로 너희 쪽에 서게 되는 것뿐이다."
사일론이 그 말에 고개를 아주 느리게 끄덕였다. "기억도. 같다."
수연은 그 대답에 옅게 웃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세상 편들 게 아니라 그냥 진실 편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동맹의 말보다 믿음직스럽게 들렸다.
"그럼 됐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거면 충분해요. 그 자식이 결전 날, 자기가 지운 거 다 보고, 다 기억나고— 그러고도 안 멈추면, 그땐 진짜 내가 끝낼게요."
노바일라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동자 속 빛의 점들이 잠깐, 아주 잠깐 한 방향으로 정렬됐다가 다시 흩어졌다— 마치 지금 이 순간도 하나의 갈림길로 저장하는 것처럼.
형사가 수첩을 덮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걸로 전력이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황룡— 그리고 이제, 강요하지 않는 눈과 지워지지 않는 기억까지."
레테가 그 말을 받았다. "묶이지 않는 이 둘까지 더하면, 이제 원정에서 확보할 수 있는 힘은 전부 모인 셈이에요. 남은 건— 돌아가서 쓰는 것뿐이네요."
노바일라가 날개를 접으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결전의 날까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강요하지 않는다는 건, 자꾸 얼굴을 비추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으니까."
사일론도 그 긴 다리를 다시 펴며 몸을 세웠다. 그 거대한 그림자가 모닥불 빛을 가리며 잠시 어둠을 드리웠다.
"그날. 다시. 온다." 그가 말했다. 그 짧은 문장 사이에도, 여전히 그 낡은 축음기의 리듬이 남아 있었다.
두 존재는 온 방향과 반대로,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바일라의 날갯짓은 끝까지 바람 한 점 만들지 않았고, 사일론의 발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러 겹으로 겹쳐 울리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닥불 앞에는 다시 세 사람만 남았다. 수연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봤던 그 손의 각도— 국자를 돌리던 손목의 습관이, 이상하게도 자신의 손에도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착각에 옅게 웃고는, 손을 다시 검자루로 가져갔다.
레테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수연이 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이 스스로도 완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방금 본 그 짧은 영상 하나가, 지난 원정 내내 쌓아온 각오를 살짝 흔들어 놓았다. 신살의 힘도, 청룡도 백호도 아닌— 그저 국자를 쥔 손목 하나가, 그녀를 가장 깊이 건드렸다.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힘을 두 번째로 쓸 줄 알게 된 사람이, 결국 손목 각도 하나에 목이 메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상하지." 그녀가 낮게 덧붙였다. "그 많은 걸 보고 왔는데, 방금 그 짧은 거 하나가 제일 아파."
"그게 정상입니다." 형사가 답했다. "큰 것들은 각오하고 마주하니까요. 작은 것들이 늘, 예고 없이 옵니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 사이로, 노바일라와 사일론이 사라진 방향이 여전히 조금 더 짙은 어둠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어둠을 향해 속으로 짧게 되뇌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결전 날 봐요.'
"…이제 진짜 돌아가는 일만 남았네." 그녀가 낮게 말했다.
형사가 마지막 남은 장작을 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일이면, 문 앞입니다."
레테는 빈 유리병을 다시 품에 안았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 병이 무엇을 위해 비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강요할 수 없는 것과 지워지지 않는 것, 그 둘의 자리는 애초에 유리병 안이 아니라, 이렇게 밤하늘 아래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밤이 깊어갔다. 모닥불은 낮게 타올랐고, 그 위로 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내일이면 마침내, 오래 비워둔 그 문 앞에 다시 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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