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76화. 축제의 뒷정리
축제 다음 날, 광장은 전날의 열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자, 다들 힘내서 정리합시다!"
세레나가 사람들을 독려하며 앞장서서 배경막을 접었다. 도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조명대를 해체하고, 부스를 접고, 흩어진 색종이들을 쓸어 담았다.
"어제 진짜 재밌었어요."
"그러니까요, 저희 애들이 아직도 회전목마 얘기만 해요."
정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제의 여운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즐거운 소란 속에서, 이리스는 무대 근처에서 조명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신입, 여기 있었네."
수연이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어, 왔어? 뭐 도와줄까?"
"아니, 나는 이거 옮기러 온 거야. 근데 신입 혼자 여기서 뭐 해?"
"조명대 마지막 점검. 어제 그렇게 사고 났으니까 완전히 분해해서 문제 없나 확인하려고."
수연은 그 성실함에 옅게 웃었다.
"역시 감독다워."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이리스는 그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시 조명대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의 소동 이후로, '감독'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정리를 이어갔다. 조명 부품들을 상자에 담고, 전선을 정리하고, 무대 배경막을 접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때, 비아가 정리하는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갔다.
"정리하는 거 재미없다……이다."
"비아 씨도 좀 도와주세요."
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제 개회 선언했다……이다. 그거면 충분히 했다……이다."
비아는 그렇게 당당하게 답하며 팔짱을 꼈다. 이리스는 그 뻔뻔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조금만 도와주세요. 이 상자 옮기는 거요."
"……하나만이다……이다."
비아는 마지못한 척하며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손길은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비아 씨, 은근 성실하시네요."
"당연하다……이다. 나는 뭐든 대충 안 한다……이다."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비아는 몇 개의 상자를 더 옮겨주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리스와 수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근데 신입."
수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응?"
"어제 말이야. 도망칠 때."
이리스는 그 말에 손을 멈췄다.
"그때, 너 웃고 있었어."
"……뭐?"
"도망칠 때. 얼굴이 빨갛고 당황한 것 같았는데, 입꼬리는 웃고 있었어."
이리스는 그 지적에 순간 말을 잃었다.
"그, 그럴 리가……."
"진짜야. 내가 똑똑히 봤어."
"몰라."
이리스는 그렇게 짧게 답하고 다시 조명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귓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몰라가 뭐야, 자기 얼굴이잖아."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그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수연은 그 반응에 슬쩍 웃었다. 이리스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근데 나 그거 보고 좀 놀랐어."
"뭐가?"
"신입이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본 것 같아서. 평소엔 뭔가 조심스럽게 웃잖아. 근데 그때는 그냥…… 순수하게 웃고 있었어."
이리스는 그 말에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웃고 있었어?'
그녀는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려 했지만, 너무 정신없었던 나머지 자신의 표정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열 초 동안 느꼈던 감정이 단순한 두려움만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이리스가 나직이 인정했다.
"거봐, 역시 좋았던 거잖아."
"좋았다고는 안 했어."
"근데 웃었잖아."
"그건……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수연은 그 옹색한 변명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스도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그 대화를 마침 근처에서 지나가던 세레나가 듣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걸음을 늦추고,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리스 씨가 웃었구나.'
세레나는 그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 이리스를 무대 총감독으로 지목했을 때, 그녀가 이렇게까지 변화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세레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지금 이 순간은, 두 사람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다음 축제 때는, 어쩌면.'
그녀는 그런 작은 기대를 품으며 다시 정리 작업으로 향했다.
그 무렵, 파올라 링과 키에 안데르도 회전목마와 얼음 초롱을 정리하며 어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 애들 표정 봤어요? 저 진짜 뿌듯했어요."
파올라가 목마를 하나씩 분해하며 말했다.
"저도요. 제 초롱 보고 다들 예쁘다고 해줘서 얼마나 좋던지."
안데르가 맞장구쳤다.
"이게 다 감독님 덕분이죠. 저 같은 사람도 무대에 세워주신 거잖아요."
"맞아요. 저도 처음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지나가며 듣게 된 이리스는, 그 말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한 일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정리는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조명대와 배경막, 부스들이 하나씩 창고로 옮겨졌고, 광장은 서서히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세레나가 정리 마무리를 선언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짐을 챙겼다.
"이리스 씨,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세레나가 다가와 말했다.
"위원장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 축제, 이리스 씨 없었으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못 끝냈을 거예요."
이리스는 그 칭찬에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한 거 아니에요. 다들 도와주셔서 된 거예요."
"그래도 이끈 사람은 이리스 씨였잖아요."
세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그리고, 어제 그 순간도요. 조명 고치신 거."
이리스는 그 언급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그냥 순간적으로……."
"아니요, 그건 그냥 순간이 아니었어요. 지난 며칠 이리스 씨가 쌓아온 것들이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세레나의 그 말에, 이리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감독님."
세레나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다른 정리 작업을 돕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리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신입."
"응?"
"아까 그거, 진짜 비밀로 해줄 수 있어?"
"뭐를?"
"내가 웃었다는 거."
수연은 그 부탁에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생각해볼게."
"수연아."
"장난이야, 장난. 비밀로 해줄게. 근데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
"다음에 또 무대 위에 설 일 있으면, 그때는 도망 안 치기."
이리스는 그 조건에 잠시 생각하다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노력해볼게."
"약속이야?"
"약속. 근데 신입도 이상하다, 방금 그 반응."
수연이 웃으며 물었다.
"뭐가?"
"아까까지는 도망친 거 부끄러워하더니, 이제는 다음에도 서겠다고 약속하네."
이리스는 그 지적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부끄러운 거랑 하고 싶은 거는 다른 거니까."
"오, 신입 많이 컸다."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니라니까."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진심으로 웃었다. 그 웃음에는 놀림보다 대견함이 더 크게 담겨 있었다.
"대신 너도 조건 있어."
"뭔데?"
"오늘 내가 웃었다는 거,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하기. 특히 사장님한테."
"어? 사장님한테 말하면 왜 안 되는데?"
"그, 그냥…… 놀리실 것 같아서."
수연은 그 대답에 뭔가 눈치챈 듯 미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알겠어. 비밀 지켜줄게."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극장 거리를 지나다 돈키호테와 마주쳤다.
"오오, 감독님과 수연 씨! 정리는 다 끝났나?"
"네, 방금 끝났어요. 볼도 씨는요?"
"나는 어제 낭독한 시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음에도 또 낭독할 기회 있으면 좋겠다!"
"볼도 씨, 요즘 창고에 안 가신다고 들었어요."
이리스가 물었다.
"아, 그거! 이상하게도, 낭독 이후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예전만큼 자주 갈 필요를 못 느끼겠다!"
돈키호테가 그렇게 답하며 밝게 웃었다. 이리스는 그 변화에 옅게 놀랐지만, 이내 납득이 갔다. 마음속에 오래 담아둔 것을 꺼내놓는 일이, 때로는 그 어떤 위로보다 큰 효과를 낸다는 것을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에요."
"다 감독님 덕분이다! 첫 문장 조언해준 것도 그렇고!"
"저는 그냥 살짝 도와드린 거예요."
"그 살짝이 나한테는 컸다!"
돈키호테는 그렇게 우렁차게 답하고는 다시 자신의 시 노트를 챙겨 들고 걸어갔다. 이리스와 수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정리를 마치고 가게로 향했다. 저무는 햇살 아래, 어제의 축제 흔적들이 하나씩 지워지는 광장을 뒤로하고 걷는 길이었다.
"근데 신입."
이리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응?"
"고마워. 어제도, 오늘도."
"뭐가 고마운데?"
"그냥…… 계속 옆에서 봐줘서.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계속 지켜봐 줘서."
수연은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신입이니까 당연한 거야. 원래 옆에 있는 사람 응원해주는 거."
이리스는 그 담백한 대답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누군가와 나란히 걸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고마워."
"그래, 알았어. 그만 얘기하고 가자. 사장님 저녁 준비하고 계실 거야."
가게에 도착하자, 라면사장이 여느 때처럼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
"수고했다."
"사장님도요."
수연이 답했다.
"정리는 다 끝났나."
"네, 다 끝났어요."
라면사장은 그렇게 묻고는 두 사람에게 저녁으로 라면 한 그릇씩을 내밀었다.
"근데 사장님, 저희 정리하는 동안 가게는 어떠셨어요?"
수연이 물었다.
"평소보다 손님이 많았다. 다들 어제 얘기하러 왔더라."
"어떤 얘기요?"
"축제 얘기, 무대 얘기. 그리고 조명 고친 사람 얘기도 있었다."
이리스는 그 말에 순간 얼굴이 굳었다.
"제, 제 얘기도 나왔어요?"
"나왔다. 다들 감독님이 대단하다고 했다."
"부담스럽게……."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냥 사실을 말한 거다."
라면사장은 그렇게 답하며 담담하게 국물을 저었다. 이리스는 그 무심한 듯한 위로에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서비스다."
"오, 웬일이세요?"
"어제 다들 고생했다."
수연과 이리스는 그 말에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맛있다."
이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치. 어제 종일 이 냄새 맡으면서 팔았는데, 아직도 안 질려."
수연이 웃으며 답했다.
라면사장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국물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날 밤, 이리스는 자신의 방에서 캐스팅 목록을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그 목록만큼은 기념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빈칸이었던 자리에는, 이제 작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리스 — 10초'
그녀는 그 짧은 기록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완전한 이름도, 완전한 역할도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10초가, 다음 걸음을 위한 확실한 시작점이 되어줄 것이었다.
창밖에는 오늘도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축제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작은 변화들은 도시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리스는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았다. 정리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돈키호테의 후련해진 얼굴, 비아의 뻔뻔하면서도 성실한 손길, 그리고 라면사장의 무심한 듯 따뜻한 말들까지.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그녀는 그 생각을 하며 옅게 웃었다. 자신만 유별나게 변화를 겪고 있는 게 아니라, 이 도시 전체가 함께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그녀는 캐스팅 목록을 다시 한번 펼쳐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리스 — 10초'라는 짧은 기록 옆에, 그녀는 작은 글씨로 한 줄을 더 적어 넣었다.
'다음엔, 조금 더.'
그것은 거창한 다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충분히 무거운, 그리고 동시에 가벼운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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