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47화. 눈 오는 날의 첫 손님 자리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어느 오후, 수연은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늘 앉던 카운터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무심코 그 자리의 나뭇결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오랫동안 앉아온 자리라, 이제는 그 감촉마저 익숙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어? 여기, 나 처음 왔을 때 앉았던 자리 아닌가?"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라면사장이 그 말에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그녀를 흘끔 보았다.

"이제 알았나."

"……사장님,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다."

"근데 왜 말 안 해주셨어요?"

"물어본 적 없었으니까."

수연은 그 대답에 어이없어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몇 달째 매일 앉아온 자리가, 그녀가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던 바로 그날 앉았던 자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근데 나 왜 계속 여기 앉았지? 딱히 정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수연이 문득 생각에 잠겨 물었다.

"몸이 기억한 거다."

라면사장이 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처음 앉았던 자리가, 가장 편한 자리로 남는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한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늘 별다른 고민 없이 이 자리로 걸어와 앉았다. 마치 이 자리가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문득 처음 이 도시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 자리에 앉았던 그날. 그때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자신이 얼마나 오래 머물게 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라면사장이 물었다.

수연은 그 질문에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 여기 살고 있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수연은 뭔가 벅찬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단순히 머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었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이런 게 실감 나지."

"자리는 원래 그런 거다."

라면사장이 담담하게 답했다.

"매일 앉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자리가 자신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깨닫는 날이, 진짜로 여기 산다는 걸 실감하는 날이다."


수연은 그 말에 가게 안을 새삼 둘러보았다. 낡은 카운터, 손때 묻은 의자들, 벽에 걸린 메뉴판. 몇 달 전만 해도 낯설었던 이 공간이, 이제는 완전히 그녀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소예 자리는 어디예요?"

그녀가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저기, 창가 쪽."

"이리스는요?"

"카운터 안쪽. 서빙하다가 잠깐씩 앉는 자리."

수연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의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자리를 갖고 있었다.


"근데 사장님 자리는 어디예요?"

수연이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나는…… 자리가 없다."

"네? 왜요?"

"주방 전체가 내 자리니까. 딱 한 곳에 고정될 필요가 없다."

수연은 그 대답이 묘하게 이 사람다웠다.

"그럼 사장님은 어디에도 안 앉아 있어도 여기 사는 거네요."

"그런 셈이다."


마왕도 마침 카운터 근처에 앉아 있다가 그 대화에 흥미를 보였다.

"나도 그런가 궁금하군."

그가 자신이 늘 앉는 구석 테이블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왕님도 확인해보세요."

"확인할 것도 없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 정확히 이 자리에 앉았다. 그때는 그냥 구석이라 앉았다고 생각했는데."

"근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 자리에서 창밖이 제일 잘 보인다. 왕좌에 앉아 있을 때도, 나는 늘 창밖을 내다보는 걸 좋아했지. 몸이 무의식중에 익숙한 자리를 찾은 건가 싶다."

수연은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자기만의 이유로 그 자리를 골랐던 거네요."

"그런 셈이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 다 이유가 있었겠지."


그날 오후, 소예가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창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뭐에 대해 얘기하고 계셨어요?"

"자리 얘기. 나 오늘 처음 알았는데, 내가 늘 앉는 자리가 처음 왔을 때 앉았던 자리더라고."

"진짜요? 저도 확인해봐야겠다."

소예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앉은 창가 자리를 새삼 둘러보았다.

"어, 저도 맞는 것 같아요! 처음 여기 왔을 때도 이 자리에 앉았던 것 같은데."


"신기하다. 다들 그런 건가."

수연이 말했다.

"아마도요. 근데 왜 그럴까요?"

"사장님이 그러시더라. 처음 앉은 자리가 제일 편한 자리로 남는다고."

소예는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엔 그냥 아무 데나 앉았는데, 이제는 여기 아니면 이상하게 어색해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음을 나눴다.


이리스도 그날 서빙을 하다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확인해봤는데, 진짜 맞아요! 카운터 안쪽 이 자리, 처음 왔을 때도 여기 앉았어요."

"그럼 다 똑같네."

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거 되게 신기한 거 아니에요? 우리 다 무의식중에 같은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이리스가 말했다.

"그러게. 마치 그 자리가 우리를 부르는 것처럼."


수연은 문득 그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 자리가, 우리가 처음 이 도시를 받아들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소예가 물었다.

"그러니까, 처음 앉았을 때 우리는 다 낯설고 무서웠잖아. 근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안심했던 거고. 그래서 몸이 계속 그 안심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이리스는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되게 맞는 말 같아요."


세레나도 순찰 도중 잠시 들렀다가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자리가 없어요."

그녀가 문득 말했다.

"세레나 씨도요? 사장님이랑 똑같네요."

수연이 말했다.

"비슷한 이유일 거예요. 저도 늘 순찰을 도니까, 한곳에 고정될 필요가 없어요. 근데……." 그녀는 잠시 말을 골랐다. "가끔 이 가게에 들를 때, 항상 문 앞 그 자리에 서요. 앉지는 않지만."

"왜 거기예요?"

"거기서 가게 전체가 다 보이거든요.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예요."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세레나에게는 앉는 자리 대신, 지켜보는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세레나 씨만의 자리네요."

"그런 것 같아요."


라면사장은 그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다들 제법 깊이 생각하는군."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수연이 물었다.

"비슷하다. 이 가게에 앉는 모든 자리는, 그 사람이 처음 안심했던 자리다. 그래서 다들 무의식중에 그리로 돌아간다."

"그럼 저 붉은 테두리 그릇 자리도, 언젠가 그런 자리가 되는 거예요?"

수연이 문득 그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낮게 답했다.

"그래야 할 텐데."


수연은 문득 궁금해져 다시 물었다.

"근데 사장님, 저 자리에 대해서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어요."

"뭔가."

"제가 처음 왔을 때, 왜 하필 이 자리에 앉았을까요? 그때는 가게 안 어디든 앉을 수 있었잖아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카운터 앞자리다. 제일 가까운 자리."

"그게 왜요?"

"낯선 곳에 오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 옆에 앉으려 한다.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날, 벽을 부수고 들어온 직후 그녀는 정신없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그럼 그것도 무의식적인 선택이었던 거네요."

"그렇다. 근데 그 무의식적인 선택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기하다.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은 건데."

"아무 생각 없는 선택이 때론 제일 정직한 선택이다. 계산 안 하고 몸이 하는 선택이니까."


그날 저녁, 눈은 더욱 소복하게 쌓여갔다. 가게 안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고, 저마다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연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이 작은 자리 하나를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쌓아왔는지.

"나, 진짜 여기 살고 있구나."

그녀가 다시 한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놀라움이 아니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수연은 문득 궁금해져 창밖의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이 도시에 처음 온 사람들, 다들 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저마다 다르다."

라면사장이 답했다.

"어떤 사람은 하루 만에 찾고, 어떤 사람은 몇 달이 걸린다."

"몇 달씩 걸리는 사람도 있어요?"

"있다. 재하가 그랬다. 자기 집 안에서만 머물다가, 겨우 이 가게까지 걸어오는 데 몇 달이 걸렸지."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가 처음 가게에 왔던 그날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떠올랐다.

"그럼 재하 씨도 이제 자기 자리가 생겼어요?"

"구석 자리다. 문에서 제일 먼, 그러나 전체가 다 보이는 자리."

"왜 하필 그 자리일까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다 지켜볼 수 있는 자리니까. 아직은 그 정도 거리가 그에게 필요한 거다."

수연은 그 설명에 마음이 짠해졌다. 사람마다 필요한 거리와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이 가게는 늘 그렇게 세심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언젠가 재하 씨도 카운터 앞자리에 앉을 날이 올까요?"

"올 거다. 서두르지만 않으면."


비아가 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수연, 오늘 왜 그렇게 자리 얘기만 하냐……이다?"

"그냥, 오늘 처음 깨달은 게 있어서. 내가 늘 앉는 이 자리가, 처음 왔을 때 앉았던 자리라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이다?"

"너도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안다……이다! 이 가게 자리들, 내가 다 기억한다……이다!"

수연은 그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왜 진작 말 안 해줬어?"

"물어본 적 없었다……이다."

라면사장과 똑같은 대답이었다. 수연은 그 닮음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가게 문을 닫기 전, 라면사장은 외상장부를 꺼내 짧은 한 줄을 적었다.

『수연 — 자기 자리를 깨닫다 (완료). 이 도시에 뿌리내린 첫 순간.』

수연은 그 페이지를 곁눈질로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 도시에서의 삶이, 이제는 정말로 그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을 천천히 한 바퀴 걸어보았다. 소예의 창가 자리, 이리스의 카운터 안쪽 자리, 마왕의 구석 테이블, 재하의 먼 구석 자리, 그리고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붉은 테두리 그릇의 자리까지.

이 가게 안의 모든 자리에는, 저마다의 이야기와 저마다의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들이 모여, 이 작은 가게를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다른 사람한테 이 도시에 대해 이야기해줄 날이 오겠지."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말해줄 건데."

라면사장이 물었다.

"음…… 여긴 자리마다 다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진짜로 여기 살게 되는 거라고."

라면사장은 그 말에 옅게 웃었다.

"괜찮은 설명이다."

수연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있었고, 가게 안의 온기는 그 눈을 녹일 만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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