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32화. 이름의 발견
전투가 끝난 광장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등불은 아직 여기저기 남아 타고 있었고, 녹은 눈이 돌바닥 틈으로 흘러들어 가는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발걸음에는 승리의 흥분보다 무거운 침묵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가게로 돌아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카운터에 둘러앉은 그들 위로, 방금 전까지 하늘을 갈랐던 금빛과 은빛의 잔상이 아직 눈꺼풀 안쪽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비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카운터의 나뭇결을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사가 그녀 앞에 따뜻한 물 한 잔을 놓아주자, 비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나, 이제 말해야 할 것 같다……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수연이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물었다.
"뭘?"
"내가 누구였는지."
비아는 손끝으로 물잔의 온기를 오래 더듬었다. 그 손짓이 마치 말을 고르는 시간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원래, 열 명이었다……이다. Decem Custodes Somni — 꿈의 열 수호자."
그 말에 세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도시의 연대기를 쓰는 사람으로서, 그 명칭이 단순한 옛말이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알아챘다.
"세레스티아가 첫 번째였다……이다. 순환을 지키는 자, 옛 이름은 루체모라. 그다음이 현무, 지속과 지혜를 지키는 자. 청룡은 생명과 성장, 백호는 결단과 질서, 주작은 문명과 빛, 황룡은 중앙과 균형. 그리고 노바일라는 가능성을, 사일론은 기억을 지켰다……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이름을 불렀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노래의 가사를 하나씩 되짚는 사람처럼, 그 순서가 몸에 밴 리듬으로 흘러나왔다.
"녹사는 여덟 번째였다……이다. 통각과 경고를 지키는 자."
녹사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표정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오래전에 이미 받아들인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손끝이 물잔의 표면을 한 바퀴 돌았다.
"열 번째였다……이다."
"열 번째면……" 파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담당이었어요?"
"순례."
비아가 짧게 답했다.
"나는, 정착을 못 하는 자였다……이다. 다른 아홉은 각자의 자리가 있었다. 세레스티아는 하늘, 현무는 바다, 청룡은 숲, 백호는 산맥, 주작은 탑, 황룡은 중앙, 노바일라는 갈림길, 사일론은 오래된 서고, 녹사는—"
"통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녹사가 대신 말을 이었다. "그게 내 자리였다."
"그런데 나는." 비아가 다시 말을 받았다. "정해진 자리가 없었다……이다. 나는 문이었으니까. 문은 한 곳에 있으면 안 된다……이다. 문은 필요한 곳마다 열려야 하니까."
"중앙 성당에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문이 열 개 있었다……이다. 각 수호자마다 하나씩. 근데 내 문 옆에는, 방이 없었다……이다."
세레나가 낮게 물었다.
"방이 없었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비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그 성당을 실제로 걷는 사람처럼, 손을 허공에 대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홉 개의 문은, 손잡이가 전부 달랐다……이다. 세레스티아의 문은 은빛 물결무늬 손잡이, 현무의 문은 거북 등딱지 모양의 청동 손잡이, 청룡의 문은 초록 넝쿨이 감긴 나무 손잡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으니까, 각자의 방을 닮은 모양이었다……이다."
"근데 내 문은." 그녀가 손끝을 오므렸다. "그냥 평범한 나무였다……이다. 아무 장식도 없었다. 왜냐면 그 문 뒤에는, 방이 없었으니까. 문만 있고, 그 문이 이어지는 곳은 매번 달랐다……이다. 나는 늘 어딘가로 향하는 길 그 자체였다. 도착하는 자리가 없었다."
파빌라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손을 뻗어 비아의 손을 잡았다. 비아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옅게 웃었다.
"근데 지금은." 그녀가 말했다. "방이 있다……이다. 이 가게가."
그 말에 잠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연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살짝 돌렸다.
"그럼 그 사람이, 너희 전부를 이야기 실로 묶어서 부리고 있다는 거네."
"그렇다……이다." 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사가 벽에서 몸을 떼고 앞으로 나섰다.
"각자의 담당이 있었다는 건,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야기를 기록해온 자다. 세계들 사이를 다니며, 살아가는 것들의 이야기를 적어온 자. 그러니 우리도 결국은 적힌 존재였던 거다."
"적힌 존재라서, 붙잡을 수 있었다는 거야?" 수연이 물었다.
"그래. 이야기에는 실이 있다.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끝이 있다. 그 실을 붙잡으면— 그 존재의 흐름을 손에 쥔 것과 같다." 녹사가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부르러 올 거란 걸. 그래서 늘 준비하고 있었다."
형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수첩을 꺼냈다. 그러나 펜을 쥔 손이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그는 몇 줄을 적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건." 그가 말했다. "유괴 사건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것도, 연쇄 유괴." 그가 덧붙였다. "저는 지금까지 이 사건을 세계 대 신, 혹은 인간 대 신의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은 이야기로는— 이건 그냥 인질극입니다. 열 명의 인질이 각자의 자리에서 붙잡혀, 붙잡은 자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세레스티아도, 청룡도, 백호도, 앞으로 만날 나머지도— 전부 피해자입니다. 가해자는 단 한 명입니다."
그의 말에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신들의 전쟁"이라 불러온 이 싸움이, 사실은 훨씬 단순하고 훨씬 무거운 이름으로 다시 불려야 한다는 걸 모두가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인질극이라." 세레나가 그 단어를 곱씹듯 되뇌었다. "그럼 저희는 인질을 구하러 가는 거군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둘 다일 겁니다." 형사가 수첩을 덮으며 답했다. "안타깝게도, 인질을 구하려면 가해자와 부딪혀야 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그날 밤, 세레나는 가게를 나와 홀로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품 안에는 종이 뭉치 하나가 있었다. 그녀가 며칠 전부터 준비해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실험의 결과였다.
Writer가 증언대에 남긴 쪽지— "지금 이 도시에서 백 명에게 물으면, 아흔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라는 그 문장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그 문장을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반박하려면 근거가 필요했고, 근거를 만들려면— 직접 물어야 했다.
그녀는 도시의 우체통을 하나씩 돌며, 익명의 질문지를 백 장 돌렸다. 질문은 하나였다. "가장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우시겠습니까?" 답은 종이 한 귀퉁이에 예 혹은 아니오로 표시해 상자에 넣도록 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상자가 그녀의 손에 돌아왔다.
그녀는 광장 한구석의 낡은 벤치에 앉아, 종이를 한 장씩 꺼내 펼쳤다. 종이는 저마다 다른 손의 필체를 담고 있었다. 어떤 것은 다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였고, 어떤 것은 여러 번 망설인 흔적이 남은 눌러쓴 글씨였다. 그녀는 그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느끼며 숫자를 세어나갔다.
하나, 둘, 셋… 그녀는 그렇게 세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숫자가 쌓일수록, 그녀의 손짓은 점점 느려졌다.
여든넷.
백 장 중 여든넷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는 그 숫자 앞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벤치 위에 놓인 종이 뭉치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그 숫자를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었다.
'…여든넷.'
그녀는 그 숫자를 도시의 다른 통계들— 인구, 강수량, 화재 건수처럼 다뤄보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이 숫자는 통계가 아니라, 여든네 명의 사람들이 밤에 혼자 앉아 종이에 손을 얹고, "그렇다"라고 눌러 쓴 시간의 총합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 새삼 자문했다. 도시의 규칙, 도시의 시간, 도시의 기억— 그 모든 것을 지키는 게 옳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 도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사실은 그 규칙과 시간과 기억의 일부를 지우고 싶어 한다면. 그녀가 지키는 게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짐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그녀 자신의 고집인지— 그 경계가 갑자기 흐려졌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그 결과를 형사와 수연에게 보여줬다. 가게 안, 아직 문을 열기 전의 조용한 시간이었다.
"…여든넷이요." 그녀가 종이 뭉치를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 명 중 여든넷이, 가장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우겠다고 답했습니다."
수연이 그 종이를 집어 들어 훑어봤다. 형사는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그것을 바라봤다.
"…우리가 지금 지키려는 게," 세레나가 말을 이었다. "정말 이 도시 전체가 원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걸 견딜 수 있는 우리 몇 명만의 고집일까요."
수연은 그 질문에 즉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종이를 든 채, 시선을 카운터 위 어딘가에 고정한 채로 오래 침묵했다.
'…나는 그 나쁜 새끼가 하는 짓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속에서 낯선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 싸움을 단순하게 여겨왔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과, 그걸 막는 사람들. 그런데 이 숫자는 그 단순함을 무너뜨렸다. 여든넷이라는 숫자는, "막는 사람들"이 사실은 소수일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결국 낮게 말했다. "근데 하나는 알아요. 물어본 사람 중에, 저는 없잖아요. 저한테 물었으면 저는 아니라고 했을 거예요. 근데 그 여든네 명이 진짜로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런 거라면— 제가 뭐라고, 그 사람들 대신 그 고통을 짊어지라고 강요해요."
형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질문에 바로 답을 못 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수치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입니다. 아프냐고 물으면, 사람은 늘 지금 아픈 부분부터 말하니까요. 그게 그 사람들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근데 그게 그 사람들 전부가 아니라는 걸," 세레나가 조용히 반박했다. "제가 증명할 수 있나요? 저는 그냥 제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닐까요?"
그 질문 앞에서, 형사도 더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저항군—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는 것조차 부끄러운, 자신들 몇 명의 확신만으로 뭉친 이 작은 무리가, 정말 도시 전체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그 균열은 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 자신들을 향해 생긴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세레나는 홀로 거리를 걷다가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며칠 전 증언대에서, 정적 속에 조용히 일어나 걸어 나갔던 찻집 노파 — 헬가였다.
노파는 자신의 작은 찻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낡은 나무 상자에 찻잔들을 하나씩 옮겨 담고 있었다. 세레나가 다가가자, 노파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손을 계속 움직였다.
"…뭐 하세요?"
"보시다시피." 노파가 찻잔 하나를 신문지로 감쌌다. "정리하고 있어요."
세레나는 그 옆에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상자 안에는 이미 찻잔 여섯 개가 담겨 있었고, 노파의 손끝에서 일곱 번째가 신문지에 감싸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몰라요." 노파가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결연함도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정한 데는 없어요.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왜요?"
노파는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세레나를 봤다.
"짐은 사실, 증언대 있던 그날 밤부터 싸기 시작했어요."
"…그날 밤부터요?"
"그날 들은 얘기들이, 며칠을 안 떠나더라고요. 잃은 줄도 모르고 잃은 사람들 얘기요. 저는 제 아픔을 하나도 안 놓치고 붙들면서 살아왔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그날 밤 처음으로 모르겠어졌어요. 그래서 갈 데도 안 정하고, 그냥 조금씩 싸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신문지로 감싼 찻잔을 상자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다 오늘 아침 시장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요. 백 명한테 물었더니 여든넷이 지우고 싶다고 했다더라— 그런 숫자는 발이 빠르거든요. 저도 그 물음을 받은 사람이에요. 저는 아니라고 답한 쪽이고요. 근데 여든넷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미련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제 아들이 죽은 뒤로, 저는 이 찻집에서 20년을 버텼어요. 그 아픔이 매일 저를 찔렀지만, 그 찌름 덕분에 매일 아침 일어날 이유도 있었어요. 근데 이제 알아버렸잖아요. 여든넷은 그 찌름 자체를 지우고 싶어 한다는 걸. 그럼— 저 혼자만 그 아픔을 붙들고 있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어졌어요."
"그래서 떠나시는 거예요?"
"싸우지도 못하겠고," 노파가 상자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편하게 있지도 못하겠고. 그냥— 여기 없는 게 낫겠어요."
그녀는 상자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찻집 간판 아래, 오랫동안 걸려 있던 작은 종이 뗄 때 딸그락 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 소리에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레나는 그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노파는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채, 눈이 채 녹지 않은 골목 사이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 발걸음은 도망도 아니었고, 저항도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자신이 알아버린 것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세레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가, 품속의 종이 뭉치를 다시 꺼내 여든넷이라는 숫자를 들여다봤다. 그 숫자 옆에, 조용히 떠나간 한 사람의 걸음이 나란히 놓였다. 싸우는 사람도, 지우는 사람도 아닌— 그저 걸어 나가는 사람.
그녀는 그것이 이 싸움의 세 번째 답이라는 걸, 아직 정확한 말로 옮기지 못한 채로 느꼈다.
그날 밤, 가게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세레나가 낮에 있었던 일— 찻집 노파의 이야기까지— 를 전하자, 좁은 카운터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녹사가 그 침묵을 깬 것은 뜻밖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 손끝으로 자신의 팔뚝에 남은 오래된 흉터 하나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 여든넷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통증의 수호자였다. 내가 아는 건, 통증은 견뎌야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어떤 통증은 그냥— 너무 크다. 그런 통증 앞에서 '지우고 싶다'고 답하는 건 나약함이 아니다. 정직함이다."
"그럼 저 노파처럼 떠난 사람들이 맞다는 거야?" 수연이 물었다.
"아니." 녹사가 고개를 저었다. "떠난 사람이 옳다는 것도, 남은 우리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셋 중 어느 것도 거짓은 아니라는 거다. 지우고 싶은 마음도, 지키고 싶은 마음도, 그냥 떠나고 싶은 마음도. 전부 진짜다.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그중 하나만 진짜라고 결정해버린 거다. 나머지를 전부 지워도 되는 소음으로 취급한 거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으며 종이 뭉치를 다시 내려다봤다. 여든넷이라는 숫자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반박해야 할 증거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계속 안고 가야 할 무게였다.
"…나는 그냥."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 숫자 때문에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 안 해. 근데 이 숫자를 무시하고 싸우면, 우리도 걔랑 똑같아지는 거잖아. 자기가 맞다고 믿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는 셈 치는 거."
비아가 그녀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이다." 그녀가 말했다. "한 번 물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세레나는 그 말에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완전히 풀리지 않은 웃음이었지만, 적어도 그 안에는 다시 걸어갈 힘이 조금 섞여 있었다.
"…그렇겠네요." 그녀가 종이 뭉치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건 답이 아니라, 질문이 하나 더 생긴 거였어요."
가게의 등불이 그 밤에도 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노파가 걸어갔을 눈길 위로 새로운 눈이 조용히 덮이고 있었다.
다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흩어질 즈음, 비아가 문득 수연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딱히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옆에 붙어 앉아, 수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왜?" 수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비아가 짧게 답했다.
그녀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평소의 비아라면 잠시 붙어 있다가 곧 카운터 정리를 하러 갔을 텐데, 오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수연도 딱히 뿌리치지 않고, 그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너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 수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없다……이다." 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도, 왜 이렇게 수연의 손을 놓고 싶지 않은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 비아라는 자신의 오래된 정체성과 세레스티아의 옛 이름— 루체모라— 를 다시 이야기한 뒤로,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술렁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 안의 아주 오래된 것이, 잠깐 눈을 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 술렁임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수연의 손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수연은 그런 그녀를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고 그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창밖의 눈이,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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