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82화. 올라타려는 것
도시 외곽 완만한 언덕 위, 헤라라는 여인이 홀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등반가들을 이끌던 길잡이였다. 마지막 원정에서 정상을 코앞에 두고 눈사태로 대원 하나를 잃었고, 그 정상만큼은 끝내 밟지 못한 채 산을 떠나 이 도시로 흘러들어왔다. 완만한 언덕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높이였다.
그날 아침, 정상에 오른 헤라 앞에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완만한 언덕이 아니라, 그녀가 예전에 길을 잡던 그 험준한 산맥이었다.
"오랜만이에요, 헤라 씨."
소므니움이 뒤에서 나타났다.
"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눈사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어요. 근데 당신은 아직도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고 계시죠. 정상을 포기하고 하산하기로 한 그 선택을. 여기서라면, 완주하실 수 있습니다."
헤라는 그 산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게 가짜라는 걸 알면서 오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는 당신이 정하는 겁니다. 가짜든 진짜든, 그 순간의 성취감은 진짜로 느껴질 테니까요."
"근데 깨고 나면, 저는 여전히 완주 못 한 사람으로 남아 있잖아요. 당신 말이 다 진실이라고 해도, 결국 저를 여기 붙잡아두려는 거잖아요. 그 시간 동안, 저는 진짜 제 삶을 살지 못하는 거고요."
"영리하시네요. 근데 그 진짜 삶이라는 것도, 결국 완전하지는 않잖아요? 여전히 이 미련을 안은 채로 살아가야 하니까요."
헤라는 그 지적에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저는 여전히 이 미련을 안고 살아요. 근데 그게 저예요. 완벽하지 않은 채로, 그래도 지금 살아가는 게 저예요. 이 산, 정말 아름다워요. 근데 저는 이제 여기 오르고 싶지 않아요."
소므니움은 잠시 침묵하다가 옅게 웃었다.
"아쉽네요. 근데 존중합니다."
눈앞의 산맥이 흐려지고, 헤라는 언덕 정상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방금 소므니움을 만났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제가 정말 원하던 걸 정확히 알고 있더라고요."
"근데 어떻게 안 넘어갔나."
라면사장이 물었다.
"완주하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어요. 근데 그게 가짜라는 걸 알면서 붙잡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확한 판단이다."
그 소식은 곧 도시 전체에 퍼져나갔다. 소므니움의 유혹을 처음으로 이겨낸 사례였다. 다음 날, 헤라가 다시 언덕을 오를 때는 몇몇 이웃들이 동행했다.
"헤라 씨는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서웠어요. 근데 제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가게에 들른 헤라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정리한 종이 뭉치를 녹사에게 건넸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도 도움이 될지 몰라서요."
"고맙다. 잘 챙겨두겠다."
녹사는 짧게 답하며 그 종이를 챙겼다.
같은 밤, 비아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흥미를 느꼈다.
"소므니움, 나도 노려볼까……이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낯선 기척이 스며들었다.
"안녕하세요, 비아 씨."
"왔다……이다."
"저를 기다리셨나 보군요."
"기다린 건 아니다……이다. 근데 궁금했다……이다. 나한테도 뭘 보여줄 수 있는지……이다."
소므니움은 그녀 앞에 어떤 풍경을 펼쳐 보이려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나……이다."
"보통은 아무리 옅어도 뭔가 그리워하는 잔상이 있기 마련인데, 당신에게는 그런 게 거의 없군요."
"나는 문이다……이다. 문은 그리워하지 않는다……이다. 그냥 열리고 닫힐 뿐이다……이다."
"그럼,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거군요."
"있다……이다. 근데 그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종류는 아니다……이다. 모든 문이 열리는 걸 보고 싶다……이다. 근데 그건 과거도 아니고, 이루지 못한 미래도 아니다……이다. 그냥…… 아직 오지 않은 거다……이다."
소므니움은 진심으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제 힘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종류가 아니군요. 저는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 있었던 가능성만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다……이다. 실망스럽지 않다……이다. 오히려 안심된다……이다."
"물러가겠습니다. 근데 잠깐."
비아가 그를 불러 세웠다.
"뭔가요?"
"라면사장 건드리지 마라……이다."
그 말에는 평소와 다른 무게가 담겨 있었다.
"당신도 그분에 대해 뭔가 아시는군요."
"많이는 모른다……이다. 근데 안다……이다. 그 사람 건드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이다."
"경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데 저는 이미 그분과 한 번 마주했습니다. 흥미로운 분이더군요."
"조심해라……이다."
그 말을 끝으로, 소므니움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비아는 지난밤의 일을 라면사장에게 전했다.
"저놈, 나한테 아무것도 못 보여줬다……이다. 근데 사장님에 대해 뭔가 아는 눈치였다……이다. 진짜 조심해야 한다……이다."
"고맙군."
수연이 옆에서 물었다.
"근데 비아 씨는 왜 아무 꿈도 안 꾸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라면사장이 답했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살고, 그래서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갈망한다. 우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겪는다."
"그거 좀 부럽네요."
"부러워할 것 없다……이다. 그리워할 게 없다는 건, 좋기만 한 게 아니다……이다. 가끔은,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이다."
그 말에, 가게 안에는 잠시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비아 씨도, 나름의 방식으로 외로우신 거네요."
이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롭다는 표현, 정확하지는 않다……이다. 근데 비슷한 감정일 수도 있다……이다."
"그럼 저희가 자주 놀러 갈게요."
"환영한다……이다."
비아는 그렇게 답하며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헤라와 녹사는 가게 한쪽 구석에 마주 앉아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했다.
"근데 헤라 씨, 이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눠줄 수 있을까요? 저 말고도, 이런 걸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요. 제가 겪은 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녹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적었다.
'첫 사례 — 헤라. 완주보다 현재. 이런 자리, 정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가게 안, 라면사장은 오늘 있었던 두 가지 사례를 되새겼다. 헤라는 미련을 인정하면서도 놓아주었고, 비아는 애초에 그리워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저놈이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
그는 그 생각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므니움과의 다음 마주침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예감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크고 작은 마주침이 이어지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하나둘 가게에 와서 나누기 시작했다.
소예는 이 도시에 오기 전 살던 골목 꿈을 꾸었다. 그리워하던 얼굴들이 그녀를 반겼지만, 소므니움이 "여기서는 그들이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속삭이자, 그녀는 오히려 냉정해졌다.
"이 사람들, 진짜로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거죠. 저는 지금 있는 곳에서 얻은 게 있어요. 그걸 잃고 싶지 않아요."
그 대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낸 첫 사례였다.
극장 거리의 마왕 — 스스로 그렇게 부르길 고집하는 배우 — 은 꿈속에서 진짜 강력한 존재가 되어 사람들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힘 앞에서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저는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거지, 무섭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었네요."
그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오히려 그 위엄 있는 몸짓만 훔쳐 다음 즉흥극에 써먹었다. 소므니움도 그 반응엔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야경대의 부관은 옛 부대에서 잃은 부하들이 웃으며 그를 맞는 꿈을 꾸었다. 무너지지 않고 버틴 그는, 슬픔과 책임을 구분해냈다.
"슬픔은 안고 가는 거지, 없애는 게 아니야. 근데 책임은 놓으면 안 되는 거고."
세 사람의 사례는 저마다 달랐지만 가게에 하나씩 쌓이며, 도시 사람들에게 소므니움을 대하는 여러 각도의 지혜를 남겼다. 녹사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받아 적으며 짧게 되뇌었다.
"통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 조용한 승리들의 뒤편에서, 소므니움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가게 뒷골목, 아무도 없는 밤. 소므니움은 잠들어 있는 수연의 방 창가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홀트도, 헤라도, 소예도, 다들 자기 안의 미련만 봤을 뿐이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근데 당신은 조금 다르더군요, 수연 씨."
수연의 꿈속, 익숙한 가게 안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라면사장이 마주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한 눈빛으로.
"……이게 뭐예요?"
"당신이 그리워하는 미래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지만 당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마음."
소므니움의 목소리가 배경처럼 깔렸다.
꿈속의 라면사장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지나치게 따뜻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수연은 순간 그 손을 마주 잡으려다가, 문득 멈췄다.
'……이 손, 진짜 사장님 손이 아니야.'
그녀는 그 위화감을 붙잡고 물었다.
"당신,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그냥 내 미련을 보여주는 거라면서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그랬습니다. 근데 당신을 들여다보다가, 흥미로운 걸 알게 됐어요."
"뭔데요."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라면사장이라는 존재가 있더군요. 근데 그분은 제 힘이 전혀 닿지 않는 분입니다. 그리움도 미련도 없는, 시간 밖의 존재. 그런 분께 다가갈 방법이,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소므니움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그런데 당신을 통하면,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겠더군요."
수연은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 지금 나를 이용해서 사장님한테 다가가려는 거예요?"
"이용이라기보다는…… 초대라고 해두죠. 당신이 원하는 이 미래를 계속 보여드리면, 당신은 이 안에 더 오래 머물 것이고, 그럴수록 저는 당신의 마음을 통해 그분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이라는 창을 통해 엿보는 거죠."
그 설명은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소름 끼치도록 노골적이었다.
"싫어요."
수연이 즉각 답했다.
"제 마음이 진짜인 것과, 당신이 그걸 이용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예요. 이 손 놔요."
그녀는 꿈속에서 잡혔던 손을 뿌리쳤다. 라면사장의 형상을 한 그것이 순간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흥미로운 반응이네요. 대부분은 자기 마음이 이용된다는 걸 알아도, 그 온기를 놓지 못하던데."
"내 마음은 내가 지켜요. 당신 손 안 빌려요."
소므니움은 그 대답에 잠시 침묵하다가, 처음으로 목소리에서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당신들, 이 도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이렇게……."
말끝을 흐린 그 순간, 꿈의 풍경이 거칠게 흔들렸다. 마치 바깥에서 무언가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듯한 진동이었다.
"수연."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꿈 전체를 뒤흔들었다. 진짜 라면사장의 목소리였다.
수연은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현실의 방, 창가에 실제로 라면사장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나."
"……사장님, 방금 어떻게……."
"네 방문 앞에서, 저놈의 기척을 느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살짝 열리려는 느낌이었다."
라면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방향엔 이미 아무 기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놈이 뭘 하려던 건지, 정확히 아나."
"저를 통해서, 사장님한테 가까이 오려고 했어요."
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전 들었던 설명을 그대로 전했다. 라면사장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런 방식은 생각 못 했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한테 화나셨어요?"
"아니. 너한테 화날 일이 아니다. 저놈이 처음으로, 이 도시가 아니라 나를 직접 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수연은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저는, 사장님한테 위험한 틈이 된 거예요?"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틈이 아니다. 네 마음은 네 거고, 저놈이 그걸 훔쳐보려 한 거지 네 잘못이 아니다."
"근데 방금, 저 스스로 그 손을 놓기 전까지는……."
"놓았잖나. 그거면 됐다."
그 단호한 확인에, 수연은 조금 안심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졌다.
"사장님, 그 꿈속에서 본 거, 진짜 사장님이 저한테 그렇게 다정하다는 뜻은 아니겠죠?"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그건…… 지금 대답할 질문이 아니다."
그 대답은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수연은 그 여백에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졌지만, 지금은 그것을 캐물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이 일은 녹사와 세레나에게도 조용히 전해졌다.
"저놈이 사장님을 직접 노리기 시작했다는 거네요."
세레나가 정리했다.
"수연을 통해서. 다음엔 다른 통로를 찾을 거다."
녹사가 답했다.
"이리스일 수도 있고, 비아일 수도 있고. 저놈이 못 뚫는 문 옆에 있는 사람은 전부, 우회로가 될 수 있다."
"그럼 그 사람들을 그냥 두면 안 되겠네요."
세레나가 정리하며 말했다.
"매번 몰래 알게 되기보다는, 아예 자리를 하나 만드는 게 낫겠다."
녹사가 말했다.
"이렇게요?"
"이 가게 한쪽에, 오는 사람마다 자기 얘기를 편하게 하고 갈 수 있는 자리. 헤라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세레나는 그 제안에 눈을 반짝였다.
"저도 그 자리, 정식으로 만드는 거 도울게요. 이제까지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따로 모였는데, 아예 매일 열어두는 게 낫겠어요."
"녹사 씨가 상주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이리스가 옆에서 제안했다. 녹사는 그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있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렇게 가게 구석, 원래 잡동사니가 쌓여 있던 자리에 작은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였다. 상담소라는 이름이 붙은 그 자리에, 녹사는 매일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도 사실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꿨는데, 별거 아닌 것 같아서 말 안 했어요."
"별거 아닌 건 없다. 말해봐라."
녹사의 말투는 여전히 짧고 무뚝뚝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 담백함에 편안함을 느꼈다. 위로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짚어주는 태도였다.
며칠 사이, 상담소에는 크고 작은 사례들이 쌓여갔다.
"저는 그냥 아버지가 젊었을 때 꿈을 꿨는데, 별로 안 무서웠어요. 근데 이렇게 와서 말해도 되는 거예요?"
"된다. 안 무서워도 남는 게 있으면, 그것도 흔적이다."
녹사는 그렇게 답하며 수첩에 하나씩 적어나갔다. 그 수첩은 어느새 도시 사람들의 미련을 모아놓은 작은 지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근데 녹사 씨, 이렇게 다 들어주시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세레나가 물었다. 그녀 자신이 얼마 전 비슷한 지적을 받았던 터라, 그 질문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
"힘들지 않다. 나는 원래 이런 일을 한다."
"어떤 일이요?"
"누가 못 지르는 비명을 대신 듣는 일."
녹사는 그렇게만 짧게 답했다. 세레나는 그 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 무렵, 상담소를 찾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패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므니움은 결코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접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깔려 있었다 —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
"저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못 했어요."
한 참가자가 힘없이 말했다.
"답을 못 해도 된다. 답을 미루는 거랑, 그 질문을 피하는 거는 다르다."
녹사의 그 말에,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라면사장은 가게 일을 보면서도, 상담소 쪽으로 이따금 시선을 던졌다.
"녹사 저러다 지치지 않겠나."
수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치지 않는다. 저건 저 사람한테 숨 쉬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저희가 좀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돕고 싶으면, 네 얘기부터 해라."
수연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제 얘기요?"
"며칠 전 밤 일. 아직 상담소에 말 안 했지."
수연은 그 지적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녹사 앞에 앉아 소므니움이 자신을 통해 라면사장에게 다가가려 했던 일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 손을 놨어요. 근데 그게 맞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맞다, 틀리다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그 순간, 뭘 지키고 싶었는지가 중요하다."
"제 마음이요."
"그거면 됐다."
녹사는 그렇게 짧게 정리하며 수첩에 적었다.
'통로형 접근 — 수연 사례. 대상 인물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을 경유. 경계 대상: 이리스, 비아, 세레나.'
"근데 이거, 사장님한테도 보여드려야 하지 않아요?"
"이미 안다. 어젯밤 직접 겪었으니까."
"저 말고 다른 사람도 통로로 쓰일 수 있다는 거, 사장님도 아세요?"
"그래서 지금 상담소를 여는 거다. 통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미리 알아두려고."
수연은 그 말에 이 조용한 공간이 단순한 위로의 자리가 아니라, 실제로 도시를 지키는 하나의 방어선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그날 오후, 이리스도 처음으로 상담소를 찾았다.
"저는 아직 소므니움을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 미리 와도 되나요?"
"된다. 미리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저는 뭘 조심해야 해요?"
녹사는 그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네 안에 아직 다 못 이룬 것. 무대 위의 그 순간."
이리스는 그 정확한 지적에 옅게 웃었다.
"저도 그게 걱정이었어요. 다음에 저놈이 오면, 그 순간을 더 길게 보여주면서 유혹할 것 같아서."
"올 거다. 근데 그때, 네가 뭘 지키고 싶은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
"제가 뭘 지키고 싶은지, 어떻게 알아요?"
"이미 안다. 며칠 전에 대답했잖나. 완벽한 확신 없이도 서고 싶다고."
이리스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녹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녁 무렵, 상담소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듯 조용해졌다. 녹사는 수첩을 덮으며 오늘 하루 쌓인 사례들을 되짚었다.
"오늘도 여덟 명."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라면사장이 다가와 물었다.
"패턴이 좀 보이나."
"보인다. 저놈은 강한 사람보다, 답을 미뤄온 사람을 노린다. 확신이 있는 사람한테는 접근도 안 한다."
"그럼 이 상담소가, 결국 사람들한테 확신을 만들어주는 자리가 되는 거군."
"그래. 답을 미리 정리해두면, 저놈이 물어도 흔들릴 게 없다."
라면사장은 그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이 도시에 잘 맞는 이유를, 오늘 다시 알았다."
녹사는 그 드문 칭찬에 옅게,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그날 밤, 도시 사람들은 저마다 낮에 나눈 이야기를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상담소라는 작은 방 하나가, 어느새 도시 전체의 마음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게 안, 라면사장은 녹사가 정리한 수첩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이미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미련이 짧게 요약되어 있었다.
'……이 도시, 생각보다 단단하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그러나 동시에, 소므니움이 이 정도로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다음은 분명, 더 크고 정교한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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