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36화. 수연의 지루함
평화가 길어지자, 수연은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는 하루하루가 낯설고 정신없었다. 벽을 부수고, 벽값을 갚고, 배달을 배우고, 이상한 손님들을 만나고.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녀의 일상은 어느새 익숙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배달 다녀오고, 손님상 치우고, 가끔 콜라비빔면 만들어 먹고, 저녁엔 카운터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고.
"……심심하다."
그녀는 카운터에 턱을 괴고 앉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가 심심해."
라면사장이 그릇을 정리하며 물었다.
"몸이 근질근질해. 뭔가 좀 격렬한 일이 없나."
"평화로운 게 안 좋나."
"좋긴 한데…… 나 원래 이렇게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이잖아."
그녀는 결국 그날 오후, 배달을 마치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공터에 도착한 그녀는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기로 했다.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기본 동작부터 시작했다. 베기, 찌르기, 회전. 몸에 밴 동작들이 하나둘 이어졌다.
"으랏차!"
그녀는 점점 동작에 힘을 실었다. 원인 없이 결과를 내는 그 낯선 힘도 슬쩍 풀어놓았다. 검끝에서 얼음 결정이 반짝이며 뻗어나갔다.
처음엔 그냥 허공에 몇 번 휘두르는 정도였다. 그러나 몸이 풀리자, 그녀는 점점 더 크고 복잡한 동작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며 베기, 도약하며 찌르기, 연속 베기.
그 동작들 하나하나에서 얼음이 뻗어나가며 허공에 궤적을 남겼다. 처음엔 그저 흩어졌던 얼음 조각들이, 그녀가 반복해서 같은 자리를 스치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수연은 땀을 닦으며 검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터 곳곳에, 정교한 얼음 조형물들이 서 있었다. 그녀가 무심코 반복한 동작들이, 얼음을 겹겹이 쌓아 올려 마치 작은 조각상들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나선형으로 뻗은 기둥, 꽃잎처럼 펼쳐진 얼음 결정, 아치형으로 휘어진 얼음 다리까지.
"……이게 뭐야."
그녀는 자신이 만든 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어이없어했다. 그냥 몸을 풀려고 한 건데, 어느새 작은 정원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거 어떡하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아무도 안 오는 외곽이니 그대로 두기로 하고 가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배달을 나섰던 그녀는 공터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이게 뭐야, 진짜 예쁘다!"
"누가 이런 걸 만들었지?"
"얼음 정원이래! 밤새 갑자기 생겼다는데?"
수연은 화들짝 놀라 그쪽으로 달려갔다. 어제 자신이 만든 얼음 조형물들 앞에 이미 십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감탄하고 있었다.
"……어."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기, 언니! 이거 누가 만든 건지 알아요?"
한 아이가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 수연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그, 글쎄. 나도 잘 모르는데."
두반 카로도 소문을 듣고 달려와 조형물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기술이 보통이 아닌데."
그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조각가 양반이 보기에도 그래요?"
지나가던 주민이 물었다.
"그럼. 얼음이라는 재료 자체가 다루기 까다로운데, 이렇게 자연스러운 곡선을 냈다는 건…… 계획하고 만든 게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 흔적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의도가 없다는 거지. 근데 의도가 없어서 오히려 더 살아있어."
두반 카로는 그렇게 말하며 조형물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남겼다. 수연은 그 옆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가게로 돌아온 그녀는 그 이야기를 라면사장에게 전했다.
"큰일 났어. 나 어제 그냥 몸 풀려고 검 휘둘렀는데, 얼음 정원이 생겨버렸어."
"들었다. 소문이 벌써 퍼졌더군."
"어떡하지? 내가 만들었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라면사장은 그 질문에 담담하게 답했다.
"이상하게 볼 이유가 있나."
"그냥…… 심심해서 몸 풀다가 실수로 그런 거잖아. 뭔가 부끄러운데."
"부끄러울 거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잖나."
수연은 그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마왕도 그 소문을 듣고 흥미로운 얼굴로 찾아왔다.
"그게 네 짓이었나."
"……어떻게 아셨어요?"
"딱 보면 안다. 이 도시에서 그 정도 힘을 그렇게 무심하게 흩뿌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수연은 그 말에 머쓱해했다.
"그냥 몸 좀 풀었을 뿐인데 일이 커졌어요."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내가 다스리던 시절엔, 병사들이 훈련하다 만든 흔적도 종종 백성들 구경거리가 되곤 했지. 무예라는 게 원래 그렇다. 진지하게 갈고닦다 보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나온다."
"그런 건가요."
"그래. 부끄러워할 거 없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수연은 그 말에 조금 어깨가 펴지는 걸 느꼈다.
그날 오후, 결국 소문이 소예의 귀에도 들어갔다.
"언니! 그 얼음 정원 얘기 들었어요? 완전 유명해졌던데!"
"……그거 사실 나야."
"네?!"
소예가 눈을 크게 떴다.
"언니가 만든 거예요?"
"그냥 검 연습하다가 실수로. 정말 대단한 거 아니야."
"에이, 사람들이 완전 좋아하던데요! 저도 아까 가서 봤는데 진짜 예뻤어요!"
수연은 그 반응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좋았어?"
"그럼요! 꽃잎 모양 얼음이랑, 그 나선형 기둥이랑. 완전 예술 작품이에요."
비아도 그 소식을 듣고 신이 나서 물었다.
"수연이 만든 거냐……이다?"
"응, 근데 그냥 실수로."
"실수로 그렇게 예쁜 게 나오냐……이다?"
"나도 몰라. 그냥 몸 풀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비아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도 보고 싶다……이다! 데려가 달라……이다!"
수연은 결국 그 성화에 못 이겨, 저녁 무렵 비아와 함께 다시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착하니, 낮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녁노을이 얼음 조형물에 반사되어 붉고 푸른 빛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
"우와……!"
비아가 감탄하며 조형물 사이를 뛰어다녔다.
"이거 진짜 수연이 만든 거냐……이다?"
"응."
"완전 신기하다……이다! 나도 이런 거 만들고 싶다……이다!"
주민들도 하나둘 수연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저기, 혹시 이거 만드신 분 맞으세요?"
한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정말 아름다워요! 우리 애가 여기 완전 좋아해요. 매일 와서 구경해요."
"감사합니다……."
"저기, 혹시 또 만들어주실 수 있어요?"
다른 주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이런 게 매주 하나씩 생기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 도시에 볼거리도 생기고."
수연은 그 제안에 당황했다.
"그, 그건 좀……. 저도 그냥 몸 풀다가 우연히 만들어진 거라서요."
"그래도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희가 뭐 사례는 못 해드리지만."
수연은 거절하려다가, 사람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고 결국 대답을 미뤘다.
"생각해볼게요."
가게로 돌아온 수연은 그 이야기를 다시 라면사장에게 전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매주 만들어달래."
"그래서 뭐라고 했나."
"생각해본다고 했어. 근데 이거 계속하면 그냥 검 연습이 아니라 일이 되는 거잖아."
"싫은가."
수연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싫지는 않아. 근데 부담스러워. 사람들 기대에 맞춰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게."
라면사장은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대에 맞추려고 하지 마라. 그냥 네가 연습하는 김에 만드는 거다. 그게 다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되는 거야?"
"그게 제일 오래가는 마음가짐이다."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평소처럼 연습하고, 그러다 뭔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두는 거네."
"그렇다. 억지로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안 나온다."
"근데 매주라는 게 좀 부담스러운데."
"매주가 아니라 그냥 네가 연습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사람들이 매주 기대하는 건 사람들 몫이지, 네가 맞춰줘야 할 의무는 아니다."
수연은 그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낫네."
그다음 주, 수연은 다시 좀이 쑤셔서 공터로 향했다. 이번엔 아예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갔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이미 몇몇 주민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수연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그냥, 오늘쯤 오시지 않을까 해서요."
한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수연은 결국 포기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구경은 해도 되는데, 방해는 하지 마세요."
"네!"
그녀는 그날도 몸을 풀며 검을 휘둘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동작에 몰입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도 점점 잊혔다.
한 시간 뒤, 지난주와는 또 다른 모양의 얼음 조형물들이 생겼다. 이번엔 나비 모양으로 펼쳐진 얼음 결정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우와, 이번엔 나비다!"
아이들이 환호하며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처음의 부끄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더 마음이 갔다.
가게로 돌아온 그녀는 그날 밤, 라면사장에게 말했다.
"오늘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더라."
"그래서 어땠나."
"부담스럽긴 한데…… 나쁘지 않았어. 애들이 진짜 좋아하는 거 보니까."
"그거면 됐다."
"이거 계속해도 될까? 매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연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아가 그 옆에서 신이 나서 말했다.
"나도 다음엔 같이 갈 거다……이다! 얼음 나비 진짜 예뻤다……이다!"
"그래, 같이 가자."
수연은 그렇게 답하며 옅게 웃었다. 이 도시에서의 지루함이, 어느새 또 다른 즐거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심심해서 시작한 검 연습이, 이제는 도시 사람들과 나누는 작은 축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며칠 뒤, 이리스가 그 소문을 듣고 신이 나서 수연을 붙잡았다.
"신입 얘기 들었어요, 아니…… 수연 씨, 그 얼음 정원 진짜예요?"
"어, 맞아. 근데 이리스도 알고 있었어?"
"당연하죠! 손님들이 아침마다 그 얘기만 해요.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그거 조명 좀 곁들이면 훨씬 더 화려해지지 않을까요?"
"조명?"
"제 드론으로 얼음 조형물에 빛을 비춰주는 거예요! 상상해봐요, 얼음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수연은 그 제안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진짜 예쁘겠는데."
"그쵸?! 다음번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이리스는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수연은 그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엔 같이 가자."
다음 주, 수연은 정말로 이리스와 비아를 데리고 공터로 향했다. 이번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알리고, 작은 행사처럼 준비했다.
수연이 검을 휘두르며 얼음 조형물을 만드는 동안, 이리스는 드론을 띄워 그 위로 은은한 빛을 비췄다. 얼음 결정들이 조명을 받아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우와……!"
모여든 주민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그 사이를 뛰어다녔고, 어른들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거 완전 예술이다!"
"매주 이렇게 해주시면 안 돼요?"
이리스는 그 반응에 우쭐한 얼굴로 수연을 돌아보았다.
"거봐요! 제 조명발 죽이죠?"
"인정. 완전 다른 느낌이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재주를 겹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비아는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신나서 소리쳤다.
"나도 뭔가 하고 싶다……이다! 나도 꾸미고 싶다……이다!"
"그럼 비아는 리본으로 장식 담당해라!"
이리스가 그렇게 외치자, 비아는 신이 나서 조형물 사이사이에 작은 리본들을 매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합작으로, 그날의 얼음 정원은 이전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따뜻한 광경이 되었다.
라면사장은 그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외상장부를 꺼내 새 줄을 적었다.
『얼음 정원 — 심심해서 시작해, 도시의 즐거움이 되다 (진행 중).』
수연은 그 페이지를 곁눈질로 보며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는, 지루함마저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밤, 그녀는 가게 문을 잠그며 문득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낯설고 정신없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루함 자체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고 있었다.
"심심한 것도 나쁘지 않네."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비아가 그 말을 듣고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나비 말고 용 만들어달라……이다!"
"용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해봐라……이다! 재밌을 거다……이다!"
수연은 그 무모한 요청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주에는 또 어떤 모양이 나올지, 그녀 자신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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