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58화. 제8수호자 (중)

눈이 그친 하늘 아래, 폐허가 된 대성당의 잔해가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무대가 되었다. 형사와 레테는 무너진 회랑의 돌무더기 뒤로 몸을 낮추며, 숨죽인 채 그 팽팽한 대치를 지켜봤다. 둘 다 함부로 끼어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오직 검을 든 사람과 실에 묶인 사람, 둘만의 몫이었다.

칼날이 부딪히기도 전에, 먼저 공기가 터졌다.

녹사의 팔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그 궤적을 따라 압력이 벽처럼 밀려와 수연을 강타했다. 검으로 막아냈지만 손목 전체가 뒤로 꺾일 듯 튕겼고, 발바닥이 눈 쌓인 돌바닥 위에서 두 뼘이나 밀려났다. 방어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째 타격이 이미 날아들고 있었다.

녹사의 몸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눈물은 이제 뺨을 넘어 턱 끝에서 얼어붙은 채로 자잘한 얼음 알갱이가 되어 떨어져 내렸고, 그 알갱이 하나하나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몸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발끝의 각도, 팔의 회전, 무게중심의 이동까지— 모든 동작이 완벽했다. 완벽하다는 사실이, 수연에게는 오히려 가장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건 감정이 실린 공격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술로만 짜인, 저항할 여지가 없는 폭력이었다.

두 번째 합에서, 녹사의 무릎이 수연의 명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수연은 몸을 비틀어 겨우 스쳐 보냈지만, 그 여파만으로 옆구리의 살갗이 찢어지듯 화끈거렸다. 뒤로 물러서며 바닥을 딛는 순간, 발밑의 돌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좍 퍼졌다. 자신이 밟은 충격만으로 돌바닥이 갈라진 것이었다. 수연은 그제야 이 싸움의 스케일을 실감했다— 이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스스로 규모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세 번째 합에서, 수연은 처음으로 비명을 들었다.

녹사가 입을 벌리려 했다. 그러나 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벌어지려는 턱과 그걸 붙잡는 실 사이에서 팽팽한 마찰이 일었고, 그 틈으로 억지로 새어 나온 소리는 비명이라기보다는 비명의 파편이었다— 온전한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실 사이로 짓이겨진 조각들. 그런데 그 파편 하나가 대성당의 무너진 첨탑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무너뜨렸다. 돌무더기가 눈보라 속으로 쏟아져 내렸고, 그 진동이 지면을 타고 퍼져 수연의 발밑까지 뒤흔들었다.

다음 파편이 정면으로 날아왔을 때, 수연은 반사적으로 방벽을 짰다. 한 겹이 아니라 세 겹— 공연장에서 낙하하는 운석을 통째로 받아내던, 그녀가 아는 가장 두꺼운 방어였다. 파편은 그 세 겹을 종이처럼 관통했다. 첫 겹이 깨지는 감각도, 둘째 겹이 버티는 감각도 없었다. 그냥 눈앞에서 세 장의 얼음이 동시에 가루가 됐고, 수연은 발밑의 눈을 통째로 얼려 비스듬한 빙판을 세우고 그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으로 간신히 궤도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계곡 저편 끝까지, 파편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고랑이 일직선으로 파여 있었다. 눈이, 흙이, 그 밑의 암반까지 한 줄로 도려내진 자국이었다.

'막는 건 안 돼.' 수연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며 판단했다. '지형으로 흘리는 것만 돼.'

"…이게, 파편이라고?" 수연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레테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몸을 떨었다. "진체가 아니에요. 이건 온전히 억눌린 상태의, 그것도 화신 규모의 힘이에요. 만약 저 실이 전부 풀린다면……"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늘이 이미 대답하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낮게 깔렸고, 그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아니라 얼어붙은 눈물 같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울고 있었다— 녹사의 눈물과 똑같은 빛깔로.

공기에서 탄내가 났다. 비명의 파편이 부서질 때마다 주위의 눈이 순간적으로 증발했다가 다시 얼어붙기를 반복해, 그 경계에서 옅게 그을린 냄새가 피어올랐다. 수연은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목 안쪽이 따끔거렸다. 진짜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마치 소리 자체가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피부가 얼얼했다.

돌무더기 뒤에 몸을 낮춘 채, 형사는 발밑의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신발 바닥으로 느끼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진동이 아니라, 뼈로 전해지는 낮은 울림이었다. 그는 예전에 지진이 난 도시에서 구조 작업을 도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땅울림과 비슷했다— 다만 이번엔 그 진원지가 땅속이 아니라, 한 존재의 봉인된 목구멍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파편만으로 이 정도라니." 형사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본체가 풀리면— 아마 이 세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질 겁니다."

멀리, 눈 덮인 지평선 너머로 보이던 산 하나의 어깨가 세로로 쪼개지며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진동이 그곳까지 닿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몇 초 뒤, 낮고 육중한 굉음이 뒤늦게 대성당 폐허까지 밀려와 발밑을 흔들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건 파편의 파편이 만든 결과다. 진짜 본체의 힘이 아니라, 그마저도 실 틈으로 새어 나온 찌꺼기가 만든 결과였다.


네 번째 합에서 수연의 검이 처음으로 밀렸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연은 그 순간 자신의 팔이, 정확히는 자신의 마음이 검을 온전히 내지르지 못하게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녹사의 급소를 향해 검을 뻗어야 하는 순간마다, 손끝이 미세하게 방향을 틀어 급소를 비켜났다. 죽이지 않으려는 게 아니었다— 죽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상처를 낸다는 사실 자체가 몸을 뒤로 잡아당겼다.

검이 안 되자, 몸에 밴 전투 감각이 자동으로 다음 단을 꺼내 들었다. 수연은 크게 거리를 벌렸고, 그녀의 등 뒤 허공에 얼음 창 수십 자루가 순식간에 결정을 맺으며 도열했다. 공연장이었다면 함성이 터졌을, 익숙한 광경. 창들이 일제히 발사됐다— 그러나 녹사의 몸에 닿기 직전, 창끝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궤도를 틀며 전부 급소를 비켜 갔다. 조준이 빗나간 게 아니었다. 마음이, 마지막 반 박자마다 반사적으로 각도를 꺾은 것이었다. 수십 발의 창이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눈밭에 비스듬히 줄지어 꽂혔다.

"가시밭으로 발을 묶으십시오!" 돌무더기 뒤에서 형사가 목청껏 외쳤다. 원정 내내 그녀의 마법을 사건 명명하듯 수첩에 적어온 그였다— 지면 첨주형, 통칭 가시밭.

"뭐?" 수연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가, 반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아, 꼬챙이!"

그녀가 손바닥으로 눈밭을 내리치자, 녹사의 발밑에서 얼음 첨주들이 눈을 뚫고 일제히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들마저 마지막 한 뼘에서 죄다 바깥으로 휘었다. 발을 묶기는커녕— 첨주들은 녹사를 중심으로 둥글게 비켜 솟아, 그저 그녀를 두르는 울타리 같은 모양이 되었다. 가두려던 것이 지키는 모양이 되어버린 걸, 수연은 어금니를 물고 바라봤다.

형사가 낮게 그 결과를 읽었다. "…첨주 전개 정상. 착탄 정확. 전탄, 마지막 한 뼘에서 바깥으로 굴절— 봉쇄, 실패." 조서를 읽는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그 마지막 단어를 적는 손만은 잠깐 멈춰 있었다.

이어서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구름 너머에서 거대한 것이 끌려 내려오는 예열의 빛— 운석 소환이었다. 그녀의 진짜 화력, 공연에서조차 무대장치로 부리던 규모의 마법. 그러나 낙하 좌표를 그리는 순간, 그 좌표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수연은 주문을 중간에 끊었다. 하늘의 붉은 기운이 힘없이 사그라들며 열기가 도로 구름 위로 흩어졌고, 시전을 억지로 끊은 반동에 손끝이 찢어질 듯 아렸다. 그 통증이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그 통증 밑에서, 꺼내지 않은 패 하나가 이빨 안쪽을 눌렀다. 순수한 마력을 상대의 몸속에 직접 흘려 넣어, 안에서부터 끝내버리는 것. 형사의 수첩에는 무단침입이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고, 그녀 자신은 '직접 넣는 거'라고밖에 부르지 않는 그것— 이 지옥을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 뱉지 않기로 한 말처럼 입안에 고여 있었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따져보지도 않았다. 살아 있는 것에게는 쓰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아주 오래전에 저 혼자 그어둔 선이었고, 하물며 상대가 녹사라면— 세상의 아픔을 대신 짊어져온 이 사람이라면, 그 선을 넘는 상상만으로도 모욕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도로 삼켰다.

결국 그녀의 손에서 완성되는 마법은 전부 방벽뿐이었다. 공격 대신 세우는 얼음벽, 가장 소극적인 선택. 하늘을 덮는 빙설 폭풍도, 얼음 창 수백 발의 일제 사격도 전부 손안에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저 사람을 향해서는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메이지가 화력의 구 할을 스스로 봉인한 채, 남은 일 할과 검 한 자루로 신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 상대 앞에서 그건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마지막 수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못 하면— 나 아닌 나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연은 남은 마력을 크게 갈라 제 옆의 허공에 부었다. 눈보라 속에서 그녀와 똑같은 윤곽 셋이 결정을 맺으며 일어섰다. 마력으로 빚은 복제체— 뮤나 페브가 '커튼콜'이라 이름 붙인 뒤로 도시에서 죄다 그렇게 부르던, 그녀는 그냥 '나 하나 더'라고 부르는 마법이었다. 복제체에게는 마음이 없다. 그러니 망설임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셋이 동시에 눈밭을 박찼다. 궤적은 완벽했다. 그녀의 근육 기억 그대로— 아니, 지쳐버린 지금의 그녀보다 나았다. 그러나 급소로 파고들어야 하는 마지막 반 박자에서, 세 자루의 검끝이 일제히, 미세하게 방향을 꺾었다.

수연은 그 광경에 숨이 막혔다. 마력으로만 빚었는데. 마음 같은 건 넣은 적이 없는데. 그녀의 몸에서 나온 것들이라, 복제체들은 그녀의 망설임까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었다. 나 아닌 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한계에 다다른 복제체들이 무너지기 직전,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옆으로 펼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그녀가 수만 명의 관객에게 해 보이던 그 인사였다. 그녀의 몸으로 빚어진 것들이라, 끝나는 순간에 하는 일까지 똑같았다.

세 번의 인사. 세 번의 폭발. 눈보라가 통째로 밀려나며 폐허 전체가 하얗게 지워졌고— 그 폭압에, 녹사의 발이 이 싸움에서 처음으로 한 발짝 뒤로 밀렸다.

그리고 수연은 봤다. 흩어지는 빛의 파편 너머, 검은 실로 꿰매인 그 입가가 아주 잠깐— 웃음과 닮은 모양으로 움직이는 것을. 끝까지 해내고 나서 고개를 숙이는 몸짓이 무슨 뜻인지, 아픔을 관장해온 신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얻어낸 건 그 한 발짝이 전부였다. 다음 호흡에, 녹사의 자세는 이미 오차 없이 재조립되어 있었다.

"…복제 셋, 자폭 셋. 물러난 거리, 한 걸음." 형사가 수첩을 펴지도 못한 채 낮게 읽었다. "그마저 방금, 도로 회수됐습니다."

그 재조립되는 몸을 보며, 수연은 이기는 수 대신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생겼다. 그녀는 실체 없는 환영의 창 한 무리를 날렸다— 공연 전에 한 번 굴려보는 리허설처럼, 본방보다 먼저 던지는 가짜. 뮤나 페브가 그래서 '리허설'이라 이름 붙였던 그 페인트였다. 아프게 할 수 없는 마법이라서, 이 싸움에서 처음으로 끝까지 완성된 공격이기도 했다. 녹사 씨라면— 아픔을 관장해온 사람이라면, 아픔을 줄 수 없는 가짜쯤은 한눈에 알아볼 것이었다.

녹사의 몸은 그 환영 전부를, 진짜와 똑같은 정밀함으로 남김없이 쳐냈다.

돌무더기 뒤에서 레테가 숨을 삼켰다. "…방금 건 실체가 없는 창이에요. 맞아도 아플 수 없는 가짜인데— 저 몸이, 전부 진짜처럼 받아냈어요."

수연은 그 완벽한 헛손질을 보며, 이겼다는 기분 대신 속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속은 게 아니었다. 저 몸에는 지금, 진짜와 가짜를 가릴 권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실이 치라면 전부 치는 것뿐. 그 발견이 어떤 급소 공격보다 아프게 박혔다— 저 사람이 얼마나 완전하게 조종당하고 있는지를, 가짜 창 몇 자루가 증명해버렸으니까.

다섯 번째 합에서, 녹사의 팔꿈치가 수연의 옆구리를 스쳤다. 갈비뼈 아래로 둔중한 통증이 퍼졌다. 수연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다잡으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이 후들거렸고, 발목이 눈 속으로 미끄러지듯 꺾였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몸이 이 싸움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은 땀에 젖어 있었는데, 그 땀이 얼어붙어 손잡이에 들러붙는 바람에 손가락을 펴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섯 번째 합에서는 아예 검을 놓칠 뻔했다. 녹사의 발차기를 막아내며 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지만, 팔 전체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반격할 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할 순간, 수연의 손이 스스로 멈췄다. 반 박자의 망설임. 그 반 박자 사이로 녹사의 다음 공격이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일곱 번째 합에서, 수연은 아예 몸을 던져 옆으로 굴렀다. 등에 눈이 쓸리며 파고들었고, 그 차가움이 옷 속까지 스며들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근육이 지쳐서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 저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다리가 거부하는 것 같았다. 무릎이 눈 속에 박힌 채로, 수연은 잠시 숨만 몰아쉬었다.

여덟 번째 합은 아예 합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녹사의 팔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수연은 검을 들어 막는 대신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이 어깨를 강타했고, 몸이 통째로 튕겨 나가 부서진 회랑 기둥에 부딪혔다. 등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그런데도 수연의 손은, 그 순간에도 녹사를 향해 검을 내지르지 않았다.

수연은 눈밭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검끝이 바닥에 닿아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를 냈다. 그 떨림을 내려다보며, 수연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 지금, 지고 있는 거야?'


형사는 여전히 그 돌무더기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물러섰던 밤을 떠올렸다. 상사의 만류를 핑계 삼아 현장에 뛰어들지 않았던 그 밤, 결국 구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왔다. 그때 그는 몸을 사린 대가가 무엇인지 배웠다— 망설임은 언제나 누군가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지금 수연이 무릎을 꿇은 모습에서, 형사는 그 밤의 자신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참지 못하고, 돌무더기 뒤에서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나섰다.

"수연 씨!" 그가 눈보라를 뚫고 목청껏 외쳤다. "저 분은 지금 자기 비명을 우리한테 쓰라고 빌려주고 계신 겁니다! 응답 안 하실 겁니까!"

그 말이 수연의 귓속에 정확히 꽂혔다. 응답. 그 단어가 무릎 꿇은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레테도 그 옆에서 목소리를 보탰다. "녹사 씨가 원한 건 승리가 아니에요! 저분은 자기 고통을 도구로 내주고 계신 거예요. 받아야 할 사람이 안 받으면— 그 고통은 그냥 버려지는 거예요!"

레테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스스로 그 말의 무게에 놀랐다. 그녀는 망각의 신이었다. 무언가를 지우는 것이 그녀의 본질이었고, 그래서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이 '받아주는' 쪽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목청껏 외치는 말은 지우라는 말이 아니라 받으라는 말이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이 원정을 거치며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수연은 눈밭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래도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신살의 힘은 무기였다. 청룡의 사슬을 끊을 때도, 백호의 매듭을 가를 때도, 그 힘은 언제나 무언가를 부수기 위한 도구였다. 부순다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이 따랐고, 그 죄책감을 이겨내는 게 매번 힘의 발동 조건이었다. 그런데 지금, 형사의 외침을 듣는 순간 수연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 힘을 다시 보고 있었다. 부수는 힘이 아니라— 받아주는 힘이라면 어떨까. 녹사가 지금 내미는 것이 공격이 아니라 부탁이라면, 그 부탁을 받아 안는 행위 자체가 힘의 새로운 쓰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수연은 녹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울고 있는 그 눈이, 이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수연을 향해 있었다. 원망도, 애원도 아니었다. 다만 기다림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주 오래된 기다림. 수연은 그 기다림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건 자기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녹사가 내어준 비명을, 제대로 받아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오래전 자신이 세계를 무너뜨렸던 그 밤의 기억이 다시 스쳤다. 청룡을 구할 때도 이 기억은 스쳤었다. 그때는 그 기억을 애써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날 밤 자신이 부순 것은 원인도 경고도 없이, 그저 결과만 남은 파괴였다. 아무도 그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녹사가 원하는 결과는 다르다. 그녀가 직접 걸어와서, 직접 그 결과를 청했다. 같은 힘이라도 방향이 다르면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걸, 수연은 그 순간 온몸으로 이해했다.

'…그래.' 수연은 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여전히 떨렸지만, 그 떨림이 더는 두려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 힘을 쓸 때마다, 나는 뭔가를 부수는 걸 두려워했어. 근데 오늘은 달라. 오늘 이 힘은— 부수는 게 아니라 대답하는 거야. 녹사 씨가 나한테 말을 걸고 있어. 그럼 나도 말을 해야지. 이 검으로.'

수연은 검을 고쳐 쥐었다. 손끝의 떨림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번엔 그 떨림 위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겹쳐 오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감각이 뒤바뀌었다.

지금까지 신살의 힘을 쓸 때는 언제나 차가운 마비, 세계의 법칙을 억지로 비트는 대가로 팔이 저릿하게 굳는 감각이 먼저 왔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손끝이 따뜻해졌다. 아주 잠깐, 마치 누군가의 손을 마주 잡은 것 같은 온기가 검자루를 타고 올라왔다. 원인과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강제하는 힘— 그 힘의 결이 이번엔 파괴가 아니라 응답의 형태로 짜이고 있었다.

수연의 검끝에 얼음이 서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결정형 얼음이 아니라, 그 안에 결과 자체가 미리 새겨진 얼음이었다. 그녀는 그 얼음을 들여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닿으면— 끊긴다."

원인도, 과정도, 저항의 여지도 없이. 그저 그 검이 닿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이미 '실이 끊긴 상태'라는 결과뿐이었다. 지금까지처럼 실을 억지로 잘라내는 힘이 아니라, 실이 끊어져 있는 세계를 그 자리에 그대로 불러오는 힘이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냉기에서 낯선 향이 났다— 눈 냄새도, 얼음 냄새도 아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옅은 냄새였다. 마치 아주 오래된 종이의 냄새, 누군가 오래 써 내려간 문장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녹사가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완벽한 궤적, 완벽한 속도. 수연은 이번엔 그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검을 들어 맞받았다. 두 힘이 부딪히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쇳소리도 파열음도 아닌,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일순 이완되는 듯한 낮은 진동음이었다. 녹사의 팔이 움찔, 아주 잠깐 멈칫했다. 완벽하던 궤적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통했어.' 수연은 그 짧은 멈칫거림 속에서 확신했다. 다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그 떨림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검을 뻗는 손끝에서 아까와는 다른 확신이 실렸다— 이건 녹사를 해치는 검이 아니라, 녹사가 내어준 비명에 대한 대답이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녹사의 입가, 촘촘하게 얽힌 검은 실을 향해— 얼음빛 궤적이 눈보라를 가르며 곧게 날아갔다. 그 궤적을 따라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낮고 길게, 마치 누군가 아주 팽팽한 현을 활로 끝까지 그어 내리는 소리처럼.

형사와 레테는 숨을 죽인 채 그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레테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망각의 신으로서 그녀는 수많은 결말을 지켜봐 왔지만, 이렇게 온몸으로 결과를 바라며 지켜본 적은 드물었다. 녹사의 눈은,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채로— 그러나 이번엔 그 눈물 사이로 처음 보는 빛이 스쳤다. 두려움도 저항도 아닌, 아주 오래 기다려온 무언가를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하늘 전체가 그 순간,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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