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니발리스

제150화. Writer와의 조우 (1)

주작의 세계에 다시 불빛이 돌아온 뒤로, 세 사람은 사흘을 꼬박 걸었다. 발밑의 땅이 점점 낯선 결을 띠기 시작한 건 나흘째 되던 아침이었다— 흙이 아니라 마른 종이를 접었다 편 것 같은 결. 형사가 그 결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멈춰 섰다.

"레테 씨. 이거, 느껴지십니까."

레테가 다가와 같은 자리에 무릎을 굽혔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손바닥을 땅 위에 가만히 얹었다.

"…네." 그녀가 낮게 답했다. "여기, 페이지가 방금 넘어갔어요."

"페이지요?"

"방금까지 어떤 문장이 쓰여 있다가, 지금은 다른 문장으로 바뀐 자리라는 뜻이에요." 그녀가 손을 떼며 설명했다. "보통은 이런 자리를 찾아도, 이미 오래돼서 냄새가 다 날아간 뒤예요. 근데 이건—" 그녀가 손끝을 코끝에 가져다 댔다. "아직 마르지 않았어요. 종이 냄새가 나요. 잉크 냄새도요."

수연은 그 말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지난 넉 달 동안, 그들은 늘 그의 뒤를 쫓았다— 정확히는, 그가 이미 지나가고 식어버린 자리를 쫓았다. 청룡의 세계에서도, 백호의 산맥에서도, 소므니움의 안개 속에서도,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늘 이미 없었다. 형사는 그 시간차를 수첩에 꼬박꼬박 기록해왔다— 그가 다녀간 시각과 그들이 도착한 시각의 간격. 처음엔 그 간격이 거의 한 계절이었다. 그러다 한 달로, 다시 열흘로, 다시 사흘로 줄어들었다. 형사는 그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며 딱 한 번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간격이 이렇게 좁혀지는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현장에서 마주칩니다."

오늘, 그 간격이 처음으로 거의 사라져 있었다.

"…얼마나 됐을 것 같아?" 수연이 물었다.

레테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반나절이 안 됐어요. 어쩌면— 더 가까울지도요."

세 사람은 서로 말을 아낀 채 걸음을 재촉했다. 땅의 결이 점점 짙어졌다. 마른 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자,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늦가을의 오후였다. 하늘은 낮고 희끄무레했고, 공기에는 마른 짚과 연기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여자, 처마 밑에 곡식을 널어 말리는 노인, 골목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평범했다. 지나칠 만큼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수연의 후드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온기가 피어올랐다. 지금껏 그 온기는 늘 일정한 방향으로, 일정한 세기로 켜졌다— 수호자를 향한 나침반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온기는 달랐다. 더 날카롭고, 더 차가웠다. 나침반이라기보다는— 누군가 그녀의 명치를 손끝으로 톡 건드린 것 같은 감각. 그녀는 그 차이를 즉시 알아챘다. 이건 수호자의 것이 아니었다.

"…이 방향이야." 그녀가 낮게 말하며 마을 광장 쪽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인파를 헤치며 광장 쪽으로 걸었다. 장이 서는 날이었는지, 좌판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인파의 한가운데, 좌판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있었다.

긴 짙은 색 외투. 한쪽 팔에 낀 낡은 장부 같은 것. 걸음의 속도, 어깨의 각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 그 모든 것이 수연의 눈에, 몸이 먼저 알아보는 방식으로 박혔다. 머리로 판단하기도 전에, 발이 먼저 멈췄다.

그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을 쓸 이유 자체가 없어 보였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반 발짝씩 길을 비켜주었다. 누구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그의 걸음이 지나갈 자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리 비워두고 있었다.

수연의 숨이, 그 순간 멎었다. 정확히는— 참았다. 자기도 모르게. 폐 속에 든 공기를 그대로 가둔 채, 그녀는 그 뒷모습만을 바라봤다. 옆에 있던 형사가 그녀의 팔을 살짝 붙잡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검자루를 쥔 것도 아닌데, 그냥 허공에 쥔 주먹이 핏기를 잃고 있었다.

"…수연 씨." 형사가 낮게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소리치고 있었다.

"사장님!!"

그 한마디가 광장의 소음을 뚫고 퍼졌다. 몇몇 마을 사람들이 놀라 그녀 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그 뒷모습— 그는, 아주 천천히 돌아섰다.

수연은 그 순간을 나중에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가 돌아설 때, 자신이 기대했던 게 무엇이었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걸. 놀람이었을까. 반가움이었을까. 혹은 그 반대의 무엇이었을까. 무엇이든, 그녀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화도, 슬픔도, 그리움도, 심지어 경계심조차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는 목록을 한 번 훑어보는 얼굴이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과, 처리하지 않아도 될 일을 가르는, 지극히 사무적인 시선. 그 시선이 수연의 얼굴 위에 정확히 한 박자 머물렀다. 아주 짧게, 눈가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인식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봤다. 분명히 알아봤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거뒀다.

그것뿐이었다. 화들짝 놀라 도망친 것도, 서둘러 등을 돌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시선을 거두고, 원래 걷던 속도 그대로, 광장 옆에 있던 낡은 문 하나를 향해 걸어갔다. 여관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나무 문이었다. 그가 그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기다려요!!" 수연이 소리치며 인파를 헤치고 달렸다.

그러나 그녀가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형사가 먼저 그 문 앞에 도달해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손이 문지기로서의 감각을 확인하듯 잠시 멈췄다가,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텅 빈 창고였다. 나무 상자 몇 개와 먼지 쌓인 선반뿐. 다른 출구도 없었다.

"…이 문은," 형사가 창고 안을 살피며 말했다. "애초에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은 문입니다. 그냥 문이었어요. 그가 지나가면서, 그 순간만 다른 곳으로 통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지나간 뒤엔— 다시 그냥 문으로 되돌렸군요."

수연은 그 텅 빈 창고를 오래 들여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끝이, 아직도 하얗게 질린 채 떨리고 있었다.

'…나를 지웠어?'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곧바로 스스로 부정당했다.

'아니야.'

'나를… "나중"으로 분류했어.'

그 생각이 명치에 닿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여태 무엇을 두려워해왔는지 처음으로 정확히 깨달았다. 그녀는 늘 최악의 상상이— 그 새끼가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를 삭제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방금 본 것은 그것보다 더 나빴다. 삭제는 적어도, 그 새끼가 한때 자신을 무겁게 여겼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무언가를 지우려면, 먼저 그것이 무겁다는 걸 알아야 하니까. 그러나 방금 그의 얼굴에는 무거움조차 없었다. 그저— 오늘 처리할 목록에 없는 항목을 확인하고,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는 얼굴이었다.

지워진 사람은, 적어도 한때 존재했던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나 "나중"으로 미뤄진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 아무 무게도 갖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야영지를 꾸렸다. 모닥불이 낮게 타올랐다. 형사는 늘 그랬듯 수첩을 펼쳤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다시 덮었다. 레테는 젖은 나뭇가지 몇 개를 불 옆에 세워 말리고 있었다.

수연은 불 앞에 앉아 자기 두 손을 오래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의 그 손끝, 하얗게 질렸던 그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 여정을 버티게 해준 게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봤다. 처음엔 분노였다. 그다음엔 의무감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주 작은 희망이었다. 그 나쁜 놈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닐 거라는, 어딘가에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의 조각이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 그 희망이 없었다면 이 넉 달을, 매일 밤 이런 모닥불 앞에서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밤, 그 희망이 처음으로 다른 모양의 질문으로 바뀌었다. 만약 그 희망이 틀렸다면. 만약 그 망할 놈에게 남은 게 사랑이 아니라— 그저 아직 손대지 못한 서류 한 장이라면. 사람은 서류를 미룰 때, 그걸 미뤄야겠다고 매번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다. 급하지 않으니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급한 다른 것들에 밀려서. 어쩌면 그 짜증나는 새끼는 자신을 지우는 것도 잊었을 만큼, 자신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걸지도 몰랐다. 사랑이 남아 있어서 못 지운 게 아니라— 그냥, 지우는 일 자체를 깜빡한 거라면.

그 생각은 이상하게도, 완전한 삭제보다 훨씬 더 잔인했다. 완전한 삭제라면, 적어도 거기엔 어떤 결단이 있다. 그녀를 지우기로 그 새끼가 선택했다는, 무겁고 확실한 사실이. 그러나 깜빡함에는 아무 결단도 없다. 그냥 부주의였다는 뜻이고, 부주의라는 건— 애초에 신경 쓸 만큼 소중하지 않았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수연은 자신이 그 나쁜 놈의 삶에서, 챙기지 못한 우산 하나, 답장 못 한 편지 한 통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소름이 돋았다. 미움받는 것도, 지워지는 것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잊혀지는 게 아니라 방치되는 것은— 그녀가 준비해온 그 어떤 각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는 결국, 그 생각을 혼자 삼키지 못하고 입 밖으로 냈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작게 나왔다.

"…있잖아." 그녀가 불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오늘 낮에 계속 생각했는데."

형사와 레테가 동시에 그녀를 봤다.

"사랑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우는 걸 깜빡한 거면— 어떡해."

그 말을 뱉고 나자,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불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이 넉 달간 쌓아온 단단함을 잠깐 내려놓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사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자기 수첩을 다시 폈다가, 아무것도 적지 않고 그 표지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 침묵이 길었다. 그는 오래전, 아직 형사였던 시절에 다뤘던 사건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 도둑이 훔친 물건들 사이에서 유독 값어치 없는 낡은 사진 한 장만은 현장에 그대로 남겨두고 간 사건. 다른 형사들은 그걸 단순한 실수라고 봤다. 그러나 그는 그 사진을 며칠이고 들여다본 끝에 알았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범인이 자기도 모르게 남긴 유일한 진심이었다는 걸. 도둑질을 하는 순간에도, 그 사진만은 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예전에," 형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형사였을 때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범인이 현장에 뭔가를 남기고 갈 때— 그건 대부분, 실수가 아닙니다."

수연이 그를 바라봤다.

"의도적으로 놔둔 것도 아닙니다. 본인도 왜 그걸 놔뒀는지 설명 못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도 남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벽하게 계산해서 움직여도, 사람 안에는 계산이 닿지 않는 자리가 있거든요. 그 자리가 흘리는 걸, 저희는 현장에서 '본심'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오늘 걘— 나한테 아무것도 안 남겼어." 수연이 말했다. "그냥 봤어. 그리고 그냥 갔어."

"봤다는 것 자체가 남긴 겁니다." 형사가 답했다. "그가 정말로 당신을 서류 한 장 정도로 여겼다면—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아챌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 취급을 했겠죠. 그런데 그는 알아봤습니다. 그 짧은 순간, 눈가가 좁아졌다고 하셨죠. 그건 인식한 겁니다. 인식이라는 건— 무게가 없으면 안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수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형사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그가 당신을 미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미룸이 무의미에서 온 걸까 봐일 겁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사람은 정말 무의미한 것 앞에서는, 미루지도 않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안 보입니다. 그가 당신을 봤다는 것, 그리고 봤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거뒀다는 것. 그건 무게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무게를 감당할 여유가 지금 그에게 없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불이 낮게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수연은 그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끝을 다시 내려다봤다. 낮의 그 하얗게 질렸던 감각이, 조금씩 색을 되찾고 있었다.

레테가 그 침묵 사이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 청룡의 잔해를 담았던 것과 비슷한, 그러나 지금은 비어 있는 병 하나를 꺼내 손끝으로 매만졌다.

"저는 이 여정 내내, 잊힌 것들을 계속 확인해왔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제 보관소에는, 지워지거나 빼앗긴 모든 기억이 결국 흘러들어와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리고— 수연 씨와 그분 사이에 있었던 약속 하나를, 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수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약속?"

"당신이 흔들리면 어떻게든 잡아드리겠다고 하셨던 약속이요." 레테가 답했다. "그리고 그분도, 흔들릴 것 같으면 먼저 말해주겠다고 답하셨던 약속. 저는 그날 이후로 계속, 그 약속이 제 보관소로 흘러들어오는지 지켜봐 왔어요."

"…들어왔어?" 수연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아니요." 레테가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왔어요. 단 한 번도요. 제가 다루는 것들은 잊히거나 빼앗긴 것들이에요. 그 약속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어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요."

"그게 무슨 뜻이야?"

"잊히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레테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워지는 것과 미뤄지는 것은 달라요, 수연 씨. 지워진 건 제 보관소로 옵니다. 그가 정말로 그 약속을 지웠다면, 저는 이미 그걸 손에 쥐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약속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유효한 채로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그가 오늘 한 건— 그 약속을 지운 게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킬 자리를 아직 못 찾은 것뿐일 수도 있어요."

수연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안심이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아팠고, 절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은 빛 한 줄기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안고, 그 위에 이마를 잠시 기댔다.

"…나 진짜, 무서웠어."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지워지는 것보다, 방치되는 게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어."

"압니다." 형사가 답했다. "그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종류의 공포죠."

"…형사님도 겪어봤어?"

형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오래되어 접힌 자국이 깊게 밴 낡은 종이 한 장을 아주 살짝 만졌다가— 다시 손을 뗐다. 그 종이를 꺼내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저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비슷한 걸 겪었습니다." 그가 짧게 답했다. "그리고 그때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방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결국, 미뤄둔 것들의 목록으로 돌아옵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냐는 것뿐이죠."

모닥불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레테가 마른 가지 하나를 더 넣자,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세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수연은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나, 그 목록에서 밀려나 있는 동안 뭘 해야 돼?"

"쫓으면 됩니다." 형사가 답했다. "목록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다만 순서를 강제로 앞당길 수는 있죠— 저희가 계속 그의 앞에 나타나면요."

수연은 그 말에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웃으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그래. 순서, 내가 앞당겨줄게."

그녀는 자기 손끝을 다시 확인했다. 핏기는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불 위에 가만히 펼쳐 온기를 쬐며, 내일 또 다른 세계로 향할 길을 생각했다. 그날 밤, 그녀는 오랜만에 꿈도 없이 깊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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